교실이라는 이름의 법정

“억울해요”와 “정의구현” 사이

by 서이안

쉬는 시간 종이 울리면, 교무실 문이 벌컥 열린다. 씩씩대는 두 아이가 내 자리로 돌진한다. 앉기도 전에 터져 나오는 첫마디는 약속이나 한 듯 똑같다.

“선생님, 억울해요!”

나는 하던 업무를 멈추고 익숙하게 판사석에 앉는다. 아니, 어쩌면 탐정이나 형사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무슨 일이야?”

“얘가 제 어깨를 때렸어요!” (A학생)

“아니에요. 걔가 먼저 저를 밀쳤다니까요?” (B학생)

“밀긴 누가 밀어! 네가 먼저 나한테 욕했잖아.” (A학생)

“욕 안 했어! 그냥 혼잣말한 거야!” (B학생)


폭행에서 시작된 진술은 신체 접촉, 언어폭력, 그리고 급기야 ‘혼잣말의 정의’를 다투는 철학적 논쟁으로까지 번진다. 이 끝없는 도돌이표 속에서 나는 목격자를 찾고, 앞뒤 정황을 맞추느라 진을 뺀다. 도대체 너희는 왜, 단 한 번에 “미안해”를 하지 않는 거니.


물론 일방적인 괴롭힘이나 명백한 폭력이라면 당연히 법과 원칙대로 단호하게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쉬는 시간마다 나를 찾아오는 단골손님들의 다툼은 대개 그 경계가 모호하다. 51대 49의 쌍방 과실이거나, 장난과 시비 사이를 오가다 서로 감정이 상한 경우가 태반이다. 서로를 탓해야만 하는 이 안타까운 상황을 보고 있으면, 사회 교과서의 한 페이지가 머릿속을 스친다.


바로 ‘죄수의 딜레마’라는 게임 이론이다. 두 명의 용의자가 격리된 취조실에서 조사를 받는다. 둘 다 범행을 자백하지 않고 침묵하면 가벼운 형량만 받고 풀려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불신이다. 만약 나는 의리를 지켜 입을 다물었는데, 저 녀석이 배신하고 나를 범인으로 지목하면? 나는 독박을 쓰고, 저 녀석만 풀려난다. 이 최악의 공포 때문에, 결국 두 용의자는 서로를 배신하고 자백하는 쪽을 택한다. 둘 다 파국을 맞는 최악의 균형이다.


교실 속 갈등 상황에서, 종종 이 냉혹한 게임의 법칙이 겹쳐 보일 때가 있다. 아이들이 싸웠을 때 가장 좋은 해결책은 간단하다. 둘 다 솔직히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다. 그러면 선생님께 “다음부터 사이좋게 지내라”는 가벼운 훈계만 듣고, 우정도 지킬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계산한다.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했는데, 쟤가 “거 봐요, 선생님! 쟤가 인정했잖아요!”라고 나오면 어떡하지?’

이 순간, 사과는 미덕이 아니라 패배이자 자백이 된다. 나만 혼날 수는 없다는 생존 본능, 내가 뱉은 사과가 나를 찌르는 칼이 될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아이들은 협력 대신 배신을 택한다. “난 절대 안 했어요.” “억울해요.” 그것은 뻔뻔함이라기보다, 신뢰가 깨진 법정에서 살아남기 위한 아이들 나름의 필사적인 변론인 셈이다.


불신이 깊어지면, 이제 교사의 지도가 설 자리는 사라지고 차가운 증거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한 번은 복도에서 두 학생이 진한 스킨십을 하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중학생이라기엔 수위가 높다는 목격담이었다. 아이들을 불렀다. 역시나 “억울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저희는 그냥 서로 안고만 있었어요. 맹세해요.” 눈 하나 깜짝 않고 말하는 아이들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믿어줘야 할까, 파헤쳐야 할까. 하지만 “보기 불편하다”는 다수의 제보와 목격담이 잇따르는 상황에서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거짓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결국 더 큰 상처가 될 게 뻔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 상황을 솔직하게 매듭짓게 도와주고 싶었다. 두 아이를 각기 다른 상담실로 따로 불렀다.

“많은 학생들이 목격했다고 해서, 선생님도 무조건 네 말을 믿어줄 수는 없어. ○○이도 지금 마음이 많이 무거운 것 같더라. 서로를 위해서라도 솔직하게 말해주면, 선생님이 잘 마무리될 수 있게 도와줄게.”


결과는 허무했다. 굳건해 보이던 둘만의 비밀은 불안이라는 감정 앞에서 흔들렸다. '혹시 친구는 이미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았을까? 나만 끝까지 우기다가 더 곤란해지는 건 아닐까?' 결국 아이들은 5분을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며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것은 배신이라기보다, 거짓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아이들의 여린 양심이었다.


상담실 문을 닫고 나오는 내내 입맛이 썼다. 사랑(?)조차 의심으로 시험해야 하고, 제자의 마음을 열기 위해 신뢰를 담보로 심리전을 펼쳐야 하는 현실. 이것은 교육인가, 아니면 수사인가.


거짓을 밝혀냈다는 안도감보다, 아이들을 궁지로 몰아넣었다는 씁쓸함이 더 컸다.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일에만 몰두하다가, 정작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은퇴하신 한 선배님이 식사 자리에서 하셨던 말씀이 떠오른다.

“요즘 학교는 너무 삭막해. 예전엔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먼저 손을 잡게 했어. 호되게 혼내더라도 끝에는 떡볶이 사주며 마음을 풀었지. 그게 지도였고 정이었어. 근데 요즘은 다 증거와 원칙으로 하려 들어. 학폭위 열고, 사실 확인하고... 절차는 완벽해졌는데, 이상하게 아이들 마음은 더 멀어지는 것 같아.”


그 말씀에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론 서글퍼진다. 나 역시 마음보다 증거를, 대화보다 취조를 앞세워야 하는 순간들을 매일 마주하기 때문이다. 물론 ‘학교폭력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은 폭력의 사각지대에 놓인 피해자를 구하기 위해 탄생한 소중한 법이다. 학교가 약육강식의 정글이 되지 않도록 지켜주는 ‘최소한의 안전망’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를 지켜줘야 할 이 안전망이 지금은 아이들의 사소한 다툼까지 재단하는 ‘만능열쇠’처럼 휘둘러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 교과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법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정의의 실현이다.”

나는 매년 아이들에게 위 문장에 밑줄을 그으라고 한다. 하지만 속으로는 묻는다. 과연 교실에서의 정의는 무엇일까?

아이들의 불안을 이용해 거짓말을 밝혀내고 벌점을 주는 것,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따져 물어 생활기록부에 ‘가해 학생’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 물론 그것도 정의의 한 모습일 수는 있다. 하지만 자꾸만 되묻게 된다. 과연 그것이 교실이 추구해야 할 정의의 전부일까?


우리는 그것을 ‘정의구현’이라 부르며 만족하지만, 정작 그 차가운 판결문 속에 ‘사람’과 ‘회복’은 증발해 버린 건 아닐까.


“선생님, 그래서 제 말이 맞죠? 쟤가 더 잘못했죠?”

오늘도 아이들은 나에게 판결을 종용한다. 억울함이라는 이름의 면죄부를 얻기 위해.


나는 들고 있던 볼펜을 판사봉처럼 내려놓는다. 그리고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린다.

‘재판은 끝났다. 판사님은 퇴정 할 테니...’


짐짓 엄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바라본다.


“자, 이제 선생님이랑 이야기 좀 하자.”


나는 판사가 되기를 거부한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명쾌한 판결문 대신, 조금은 답답하고 느릴지라도 서로의 눈을 보고 대화하고 사과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다. 법정은 판결로 끝나지만, 교실은 판결 그 이후에도 계속되어야 하기에. 그것이 내가 이 소란스러운 법정에서 지키고 싶은, 유일한 교실의 정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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