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임승차의 유혹과 시민의 자격
종례를 알리는 종소리는 아이들에게 일종의 ‘출발 신호’다. 학교라는 1라운드가 끝나고, 학원이라는 2라운드로 달려가야 하는 아이들의 마음은 이미 교문 밖을 서성인다. 하지만 그들의 발목을 잡는 것이 있으니, 바로 빗자루다.
“야, 너 청소 안 해? 쌤, ○○이 도망가려고 해요!”
“아, 나 학원 늦는다고! 엄마가 빨리 오랬단 말이야!”
교실 뒤편은 매일 작은 전쟁터다. 먼지 구덩이 속에서 묵묵히 빗자루질하는 성실한 아이들과, 빗자루를 칼싸움 도구로 쓰거나 투명 인간처럼 사라지려는 아이들의 실랑이. 이 난장판은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s)’ 그 자체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공공재(Public Goods)는 묘한 특성을 가진다. 돈을 안 낸 사람도 쓸 수 있고, 내가 쓴다고 남이 못 쓰는 것도 아니다. 깨끗한 교실이 딱 그렇다. 청소를 땡땡이친 녀석도, 땀 흘려 청소한 녀석과 똑같이 쾌적한 교실에서 수업을 듣는다. 누군가 치워주겠지, 선생님이 치우겠지. 이 합리적(?)인 계산 끝에 아이들은 빗자루를 놓는다. 경제학은 그들을 ‘무임승차자(Free Rider)’라고 부른다.
하지만 빗자루를 던지고 도망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도 든다. 이 아이가 정말 이기적인 걸까, 아니면 하루의 속도가 이미 아이의 몸을 앞질러 가버린 건 아닐까. 학교가 끝나자마자 다음 일정으로 밀려나는 아이들의 삶에서, 친구를 위해 빗자루를 드는 5분은 감당하기에 너무 ‘비싼 선택’ 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만든 숨 가쁜 시간표 안에서, 아이들은 어쩌면 생존하기 위해 무임승차를 선택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청소를 면제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처음 교단에 섰을 땐, 나의 인문학적 믿음 하나로 이 문제를 돌파하려 했다. "자녀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 이 명제가 교실에서도 통할 거라 믿었다. '내가 먼저 솔선수범해서 땀 흘려 청소하는 뒷모습을 보여주면, 아이들도 무언가 느끼고 빗자루를 들겠지.'라는 일종의 미러링 효과를 기대한 것이다.
나는 매일 아이들보다 더 열심히 쓸고 닦았다. 하지만 현실은 드라마와 달랐다. 아이들은 안도하는 듯했다. ‘다행이다. 선생님이 다 치워주시네.’ 나는 존경받는 스승이 아니라, 그저 아이들의 노동을 대신해 주는 착한 서비스맨이 되어가고 있었다.
저경력 교사 연수에서 만난 한 선배 교사의 말씀이 내 뒤통수를 쳤다. “아이들이 직접 청소하게 만드는 게 진짜 교육이야. 아이들에게 왜 우리가 함께 치워야 하는지 설득하고 가르쳐야지, 교사가 다 해주면 그건 방임이야.”
그 말이 맞았다. 아이들에게 편안함은 주었을지 몰라도, 공동체에 기여하는 법은 가르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방식을 바꿨다. 착한 서비스맨이 되기보다 시스템 설계자가 되기로 했다. 우리 반은 학기 초마다 ‘1인 1역’을 정한다. 쉬는 시간에 칠판 지우기, 아침마다 시간표 쓰기, 분리수거 당번까지.
그리고 매년 아이들에게 강조한다. 교실은 기계가 아니라 거대한 몸이라고. 기계는 부품 하나가 고장 나도 다른 부품들은 무심하게 제 할 일만 한다. 하지만 우리 몸은 다르다. 발가락 끝에 작은 가시 하나만 박혀도, 온몸이 웅크리며 그 통증을 함께 느낀다. ‘너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 되는 것, 그게 살아있는 생명체다. 내가 빗자루를 놓으면, 내 친구가 그만큼 더 허리를 숙여야 한다. 그래서 1인 1역은 기계적인 내 할 일의 완수가 아니라, 내 옆의 친구가 혼자 무거운 짐을 지지 않게 하려는 서로에 대한 감각이어야 한다.
그렇게 나는 아이들에게 교실을 돌보는 역할을 맡기고, 매일 5명씩 돌아가는 청소 당번제를 가동한다. 여기엔 나만의 작은 원칙이 있다. “그날의 청소 당번들은, 청소가 다 끝날 때까지 운명 공동체다.”
누군가는 이것을 연대 책임이라며 걱정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협력이라고 부르고 싶다. 학원 버스 시간이 급하다고? 그렇다면 친구를 도와라. 네가 빗자루질 한 번 더 하면 우리 모두 1분 더 빨리 나갈 수 있다. 빨리 가고 싶은 욕망을, 친구를 돕는 행동으로 연결하는 것. 이것은 벌이 아니라 협력의 효능감을 가르치는 과정이다.
물론, 시스템이 완벽할 순 없다. 무임승차의 유혹은 질량 보존의 법칙처럼 어디에나 존재한다. 반마다 꼭 한두 명은 요리조리 청소를 피해 간다. 반대로, 누가 보든 안 보든 묵묵히 빗자루를 드는 아이들도 있다.
그 묵묵한 아이들을 위해 나만의 작은 보상을 준비한다. 청소가 끝나고 아이들이 우르르 빠져나갈 때, 열심히 한 녀석을 조용히 불러 주머니에 슬쩍 간식을 찔러 넣어준다. “오늘 고생했어. 선생님이 다 봤다.” 아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그 작은 인정 하나가 뭐라고, 녀석은 다음 청소 시간엔 더 신나서 빗자루를 휘두른다. 묵묵히 흘린 땀을 선생님만큼은 알고 있다는 신호, 이것이 내가 교실에서 가르치고 싶은 소박한 정의다.
물론 지금도 가끔은 흔들린다. 청소하느라 학원 늦었다는 민원을 걱정하며, 청소가 덜 된 상태에서 슬그머니 아이들을 일찍 보낼 때가 있다. 사실, 그날도 그랬다. 누군가는 빗자루를 들고 땀을 흘리고 있었고, 누군가는 이미 가방을 멘 채 교문 밖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짐짓 모른 척 그들을 보냈다. 교실에 흐르는 묘한 정적과 남은 아이들의 눈빛. 나의 비겁한 침묵은, 결국 도망간 아이들의 손에 무임승차권을 쥐여준 암묵적 동의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부끄러움을 딛고, 다시 아이들에게 말한다. “지금 너희가 빗자루를 잡는 태도가, 10년 뒤 너희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될 거야.”
아이들은 “에이, 쌤 또 겁주신다”며 웃어넘긴다. 하지만 이것이 저주가 아니라 믿음이기를 바란다. 지금 내 몫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빗자루를 드는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남을 위해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는 품격 있는 시민이 될 거라고. 반대로 지금 친구의 노동에 무임승차하는 아이는, 사회에 나가서도 교묘하게 의무를 피하는 합리적 이기주의자가 될지 모른다고.
오늘도 나는 빗자루를 든다. 아이들이 떠난 텅 빈 교실에 혼자 남아, 삐뚤어진 책상을 맞추고 떨어진 휴지를 줍는다. 그리고 칠판을 닦으며 조용히 생각한다.
‘오늘 우리가 누린 이 깨끗함은, 과연 누구의 시간을 값으로 치른 걸까.’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차가운 진리가, 교실에서만큼은 서로의 땀을 기억하는 따뜻한 예의가 되기를 바라며. 나는 빗자루를 제자리에 세워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