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표가 운명이 되는 순간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부모님이 주신 용돈 5천 원을 들고 학교에 갔다. 당시로선 꽤 큰돈이었다. 그런데 하교할 때 내 주머니는 텅 비어 있었다. 떡볶이를 사 먹은 것도, 오락실을 간 것도 아니었다. 그 돈을 천 원씩 쪼개 친구 5명에게 나눠주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이안이는 참 착하네.” 친구들이 던진 그 한마디가 너무 좋아서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내가 산 것은 우정이 아니라 ‘착한 아이’라는 이름표였다. 그리고 그 이름표는 무서운 힘으로 나를 통제했다. 그 평판을 깨지 않기 위해 떼쓰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하기 싫은 심부름을 도맡았다. 남들이 붙여준 ‘착하다’는 낙인이 내 행동의 가이드라인이 되어버린 셈이다. 착한 아이가 될 수만 있다면 기꺼이 손해 보는 쪽을 택했다.
어른이 된 지금, 문득 섬뜩한 생각이 든다. 고작 ‘착하다’는 긍정적인 말 한마디도 한 사람의 행동을 이토록 강력하게 구속하는데, 만약 그것이 ‘문제아’나 ‘구제불능’ 같은 부정적인 낙인이라면 어떨까?
사회학자 하워드 베커(Howard Becker)는 이를 '낙인 이론(Labeling Theory)'으로 설명한다. 어떤 행동이 문제가 되는지는 행동 그 자체보다, 그 행동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반응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똑같이 복도에서 뛰더라도, 모범생에게는 "급한 일이 있나 봐"라며 웃어넘기지만, 평소 문제를 잘 일으킨다고 여겨지는 아이에게는 "또 말썽이네" 하며 혀를 차는 상황처럼 말이다.
무서운 건 그다음이다. 주변에서 계속해서 비난의 눈초리를 보내면, 멀쩡하던 아이조차 '난 원래 구제 불능인가 봐'라고 체념하게 된다. 결국 그 슬픈 낙인에 어울리는 진짜 문제아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교단에 서면 이 이론이 살아 숨 쉬는 것을 목격한다. 유독 질문이 많은 아이가 있었다. 수업의 맥을 끊고 엉뚱한 질문을 던질 때면, 짓궂은 아이들이 키득거리며 소리친다. “아, 쌤! 쟤 또 시작이에요. 완전 관종이라니까요.”
순간, 질문을 던진 아이의 표정이 굳는다. 호기심은 순식간에 '관종 짓'이 되고, 열정은 민폐로 전락한다. 만약 그때 교사인 나조차 “수업 방해하지 말고 조용히 해”라고 핀잔을 준다면 어떻게 될까? 그 아이는 아마 입을 닫아버리거나, 정말로 수업을 방해해서라도 관심을 끄는 관종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낙인이 스스로 실현되는 자성 예언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 이론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나 역시 편견이라는 색안경 앞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 또한 무심코 아이에게 씻을 수 없는 낙인을 찍을 뻔한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한 번은 학교에 형제가 나란히 다닌 적이 있었다. 중3 형은 소위 ‘노는 무리’에 속해 수업 방해, 흡연 등으로 교무실을 자주 들락거렸고, 나는 그 동생인 중1 아이의 담임이었다. 어느 날, 우리 반에서 큰 사고가 터졌다. 그 동생이 커터 칼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 친구의 손을 다치게 한 것이다. 피가 흐르고, 병원에 가고, 화가 난 학부모님의 고성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사고를 수습하며 진이 다 빠진 퇴근길, 위로해 주는 동료 교사에게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내뱉고 말았다. “아니, 걔가 평소엔 얌전해 보였는데 왜 그런 위험한 장난을 쳤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3학년 ○○이 동생이더라고요.”
말을 뱉는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 나는 지금 눈앞의 아이를 본 것인가, 아니면 그 형의 그림자를 본 것인가. 형에게 덧씌워진 부정적인 이미지가 동생에게도 그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무의식적 편견이, 그 아이의 실수를 ‘역시 그 핏줄’이라는 필연으로 단정 짓고 있었다. 그 아이는 그냥 장난을 치다 실수한 14살 소년이었을 뿐인데, 나는 그 아이의 이마에 ‘형 같은 문제아’라는 주홍 글씨를 새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의 부끄러움은 아직도 내 교직 생활의 빚으로 남아 있다.
그 빚을 갚는 심정으로, 이제 아이들에게 새로운 이름표를 달아주려 노력한다. 낙인 효과는 양날의 검이다. 나쁜 꼬리표가 아이를 망치기도 하지만, 좋은 꼬리표는 아이를 춤추게도 한다.
한 번은 우리 반에 에너지가 넘치다 못해 폭발하는 남학생이 있었다. 쉬는 시간마다 복도가 떠나가라 노래를 부르고, 수업 시간에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아이였다. 누군가는 혀를 차며 ‘산만하다’라고 했을 모습이었다.
어느 나른한 5교시 점심시간 직후, 아이들이 식곤증과 싸우며 힘겹게 앉아 있을 때였다. 분위기를 띄워보려 해도 반응이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당시 유행하던 아이돌 노래 ‘손오공’을 틀며 외쳤다. “얘들아, 분위기가 너무 축축 처진다. 혹시 이 노래에 맞춰서 춤출 사람? 선생님이 상점 쏜다!”
사실 기대하지 않았다. 중학생 특유의 수줍음 때문에 아무도 안 나올 게 뻔했다. 그때였다. 그 녀석이 벌떡 일어났다. “선생님! 저요!” 녀석은 교실 앞으로 나와 음악에 맞춰 열정적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진지하면서도 익살스러운 그 몸짓에 교실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되었다. 졸던 아이들의 눈이 번쩍 뜨였고, 박수가 터져 나왔다. 녀석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와, 네가 바로 인간 비타민이다! 덕분에 다 깼네. 상점 2점 줄게!”
그날 이후, 녀석은 사회 수업 분위기 메이커가 되었다. 수업 시간에 불쑥 끼어드는 버릇은 여전했지만, 그전처럼 맥을 끊는 게 아니라 썰렁한 분위기를 살리는 적절한 추임새로 변해갔다. ‘비타민’이라는 긍정적 이름표가 아이의 자존감을 세우고, 행동을 선순환으로 이끈 것이다.
물론 이것 역시 또 다른 형태의 통제일지 모른다. 칭찬이 아이에게 ‘너는 늘 밝아야 해’라는 무거운 의무가 된 건 아닌지, 여전히 조심스럽다. 세상에 가벼운 이름표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교실 문을 열며 주머니 속을 더듬는다. 손끝에 ‘관종, 빌런, 금쪽이’라고 적힌 낡은 스티커와 ‘비타민, 유망주, 가능성’이라고 적힌 빛나는 스티커가 동시에 잡힌다. 어떤 이름표를 꺼낼지는 온전히 나의 몫이다.
나는 아이를 부르려다 잠시 입을 다문다. 내가 무심코 던지려는 이 말이, 아이의 뿌리를 적시는 단비가 될지, 아니면 숨통을 조이는 덩굴이 될지 아직은 확신할 수 없기에, 섣불리 이름표를 꺼내지 못하고 그저 아이의 눈을 한참 바라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