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와 신뢰 사이, 교사가 서 있는 딜레마
“선생님, 누가 제 틴트 훔쳐 갔어요! 교실 CCTV 좀 돌려봐 주세요.”
“야, 내가 너 치고 지나간 거 실수라니까? 쌤, 억울해요. CCTV 까보면 알잖아요!”
학기 초가 지나고 교실 분위기가 조금 느슨해질 무렵이면, 교무실 문을 두드리는 아이들의 단골 멘트다. 사라지는 품목도 다양하다. 샤프나 지우개 같은 사소한 학용품부터 교과서, 에어팟, 심지어는 편의점에서 사 온 소중한 빵까지. 아이들은 분쟁이나 도난 사고가 생길 때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외친다. “쌤! CCTV 확인해 주세요!”
그때마다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답한다. “얘들아, 미안하지만 우리 교실 안에는 CCTV가 없어.”
아이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편의점에도, 엘리베이터에도, 길거리 전봇대에도 달린 그 흔한 ‘눈’이 왜 학교 교실에는 없냐는 항변이다. 사실 교실 내 CCTV 설치는 학생과 교사의 인권, 사생활 침해 문제로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복도에 설치된 카메라도 안전 관리 목적이라 열람 권한이 엄격히 제한된다.
하지만 아이들의 요구를 마냥 철없는 투정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사실, CCTV 설치 찬성론에도 타당한 근거는 차고 넘친다. 서로를 믿지 못해 날 선 눈빛을 보내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의 서늘한 통찰이 떠오른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이기적이라 보았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막기 위해 강력한 통제 기구(리바이어던)가 필요하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CCTV는 교실의 평화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리바이어던’인 셈이다. 피해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며, 잠재적 범죄를 예방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 이 효율적인 시스템을 거부하는 것은, 피해 학생 입장에서는 어쩌면 교사의 직무 유기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이 명쾌한 해결책 앞에서 자주 마음이 흔들린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 효율성에 기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얼마 전, 옆 반에서 과자 도난 사건이 발생했다. 한 여학생이 친구들과 나눠 먹으려 가져온 과자 꾸러미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심증 가는 아이들은 있지만 물증이 없는 상황이었다. 범인을 찾을 길이 없자, 답답했던 담임 선생님은 내게 조언을 구한 뒤 아이들에게 하얀 거짓말을 했다. “사실 교실 뒤편 사물함 위에 초소형 CCTV가 숨겨져 있어. 선생님이 그거 확인하기 전에, 가져간 사람은 오늘 밤까지 개인 톡으로 자백해라. 그러면 조용히 넘어갈게.”
이 거짓말은 미셸 푸코가 말한 ‘판옵티콘(Panopticon)’의 원리를 정확히 이용한 것이었다. 죄수가 감시자의 시선을 내면화하여 스스로를 통제하듯,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 카메라의 공포에 떨었다. 결과는 즉각적이었다. 그날 저녁, 남학생 두 명이 담임 선생님께 카톡으로 자백했다.
사건은 해결됐고, 과자는 변상되었다. 하지만 내 마음 한구석은 찝찝했다. 아이들이 자백한 이유는 무엇일까. 친구에게 미안해서일까? 아니, 그저 CCTV에 찍혔을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니, 범인을 찾아낸 성공이 씁쓸하게만 느껴졌다.
교실은 점점 서로를 믿지 못하는 공간이 되어간다. 한 번은 학생부장님과 상담을 하던 학생이 손목에 찬 애플워치를 슬그머니 터치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녹음 기능을 켜는 동작이었다. 선생님의 말실수를 잡아내어 나중에 무기로 쓰겠다는, 혹은 나를 보호하겠다는 무언의 방어 기제였다. 교사인 나조차도 아이들과 대화할 때 ‘이 말이 나중에 어떻게 편집되어 돌아올까’를 검열하며 방어적으로 변해간다.
다행히 과자 도난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은 아이들을 따로 불러 화해의 자리를 마련했다. 가해 학생들은 처벌이 두려워 자백했지만, 피해 학생이 눈물을 글썽이며 “나는 나눠 먹으려고 가져왔는데, 배신감 느껴서 너무 속상했어”라고 말하자 그제야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순간 아이들의 표정에 스친 것은 공포가 아니라 부끄러움이었다. “정말 미안해.” 진심 어린 사과가 오가자, 날 서 있던 피해 학생의 표정도 누그러졌다. 기계가 찾아낸 것은 범인이었지만, 아이들을 다시 친구로 돌려놓은 것은 결국 사람의 마음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하는가. 사실 나에게는 아주 비효율적이고, 때로는 내 지갑을 털어야 하는 바보 같은 해결법이 하나 있다. 방충망이 찢어지거나 친구의 물건이 부서졌는데 범인이 나오지 않을 때, 나는 교실의 불을 끄고 아이들에게 말한다.
“자, 모두 눈 감고 고개 숙이자.”
적막이 흐르는 교실, 나는 낮고 진지한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호소한다. “선생님은 누가 그랬는지, 왜 그랬는지 묻지 않을 거야. 혼내지도 않을 거고, 부모님께 이르지도 않을 거야. 이건 너와 나 사이의 비밀로 무덤까지 가져간다. 다만, 선생님은 너희가 마지막 ‘양심’만큼은 속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지금 손을 들면, 그 용기에 대한 책임은 선생님이 대신 질게.”
처음에는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다. 아이들도 계산을 한다. 지금 손을 드는 게 이득일지, 끝까지 버티는 게 이득일지. 나는 포기하지 않고 2번, 3번 더 호소한다. “괜찮아. 실수할 수 있어. 하지만 숨기는 건 실수가 아니야. 선생님이 기다릴게.”
그렇게 몇 분의 지루한 침묵이 흐르고 나면, 어둠 속에서 조용히, 아주 조심스럽게 손 하나가 올라온다. 나는 그 손을 잡거나 아는 척하지 않는다. 행여나 친구들이 눈치챌까 봐, 그저 속으로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생각할 뿐이다. ‘그래, 네가 양심은 속이지 않았구나. 고맙다.’ 그 묵직한 안도감은, 이 침묵을 견뎌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감정이다.
“됐다. 고개 들자.”
그 후 약속대로 나는 아이를 따로 불러 혼내지 않는다. 부서진 화장품이나 학용품은 내 사비로 변상한다. 누군가는 묻는다. 왜 선생님 돈을 써가며, 범인에게 면죄부를 주냐고.
하지만 나는 그것이 비용이 아니라 수업료라고 생각한다. 물론, 가장 중요한 과정이 남는다. 피해 학생을 조용히 불러 사정을 설명한다. “범인은 찾았어. 그 친구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깊이 반성하고 있더라. 누군지 밝혀서 망신 주기보다는, 한 번만 기회를 주는 건 어떨까? 대신 변상은 선생님이 책임지고 해 줄게.”
피해 학생도 처음에는 범인이 누군지 궁금해하지만, 선생님의 진심 어린 설득에 대부분 고개를 끄덕인다.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는 어른의 태도를 배우는 순간이다.
모든 수습이 끝나면 반 전체에게 엄중히 이야기한다. “이번 일은 누군가의 용기로 잘 마무리되었다. 선생님이 책임을 졌지만, 우리의 신뢰가 공짜는 아니야. 만약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그때는 선생님도 기다려줄 수 없어. 우리 반의 양심을 믿는 건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아이가 훗날 어른이 되었을 때, 감시 카메라가 없는 곳에서도 자신의 양심을 지키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 싹을 틔우기 위해서라면, 내 지갑 속 몇 푼과 범인을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쯤은 기꺼이 지불할 용의가 있다.
물론, 학교는 여전히 시끄럽다. 아이들은 또 싸우고, 물건은 또 사라질 것이다. 그때마다 아이들은 또다시 외칠 것이다. “쌤! CCTV 확인해 주세요!”
그럼 나는 또다시 난감한 표정으로, 하지만 조금 더 단단한 마음으로 답할 것이다. “얘들아, 우리 반엔 CCTV가 없어. 대신 선생님이 너희를 믿고 기다릴 거야. 기계보다 더 정확한 너희 마음속 양심이 켜질 때까지.”
오늘도 나는, 고장 난 CCTV처럼 아이들의 거짓말에 속아주면서도, 끝내 그들의 양심이 작동하기를 기다리며 지루한 눈싸움을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