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신치토세 공항
어릴 적엔 추운 북극 지방을 좋아했었는데, 그곳에 사는 북극의 이누이트 같은 민족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고등학교 시절쯤에 상대적으로 한국과 가깝고 추운 지역인 홋카이도를 찾아보다가, 북극 문화권의 최남단 민족인 아이누 민족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시야가 꽤 좁았다고 할 수 있겠다. 중국에 소수민족이 있는 건 알아도 일본에 야마토 민족 이외의 토착민족이 있는 줄 몰랐다. 가장 가까운 곳의 북극 문화권이자 북방민족이었다. 아이누어는 한국어와 어순이 비슷했으며, 아이누가 화인과 교류하며 파생된 단어들도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감색의 아미프(Amip, 아이누의 전통의상)와 의상 곳곳에 수 놓인 문양에도 매료됐다.
홋카이도는 나에게 성지 같은 곳이었다. 아이누의 땅이자 미지의 지역이었다. 직접 가보기에 가장 허들이 낮으면서 꿈꾸기에도 모자라지 않았다. 그러나 2020년 초에 코로나로 하늘길이 막히면서 국외로 떠나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게 되었다. 2022년쯤 되어서야 서서히 코로나도 끝나가는지 해외여행을 가는 추세였다. 그동안 나는 곧 졸업을 코앞에 두고 있었고, 졸업여행은 삿포로행이었다. 홋카이도에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4월 초중순의 홋카이도는 비수기였다. 그때는 설국 홋카이도의 눈이 거의 다 녹아 없어질 때고, 벚꽃이 피기에는 아직 일렀다. 꽃도 눈도 이르거나 늦은 시기. 풍경을 느끼기엔 애매한 때였다. 그러나 그만큼 비행기 표가 싸게 나와서 여행 최적기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풍경과 낭만을 눈에 담으러 가는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한국이 막 벚꽃으로 절정일 때 떠나는 건 아쉽지만, 벚꽃은 다음을 기약하고 아침 일찍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신치토세 공항으로 출발했다. 인천공항에서 신치토세 공항까지는 약 3시간 정도 소요된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공항에 도착하니 도라에몽 조형물이 제일 먼저 반겨주고 있었다.
나와서 오른쪽에는 국립 민족공생상징공간 우포포이에서 아이누 문화를 홍보하는 패널이 늘어서 있었다. 일본어, 영어 외에 한국어랑 중국어로도 병기돼 있어서 공항을 찾은 방문객들이 간단하게 아이누의 문화를 알아갈 수 있었다.
공항 자판기에는 홋카이도 한정의 하스캅(haskap, 외래어 표기 규정에 따르면 하스카프) 맛 이로하스 음료를 판매하고 있는데, 이 이름은 아이누 말이다. 하스캅은 "겉에 가지가 난 것"이라고 풀어쓸 수 있다고 한다. 주로 추운 곳에서 자생하는 나무로, 홋카이도 이외에 만주나 함경도 등지에도 볼 수 있다고 한다. 한국에선 하니베리나 댕댕이나무라고도 불린다. 모양이 둥글고 길쭉한 블루베리처럼 생겨서 맛도 블루베리와 비슷하다.
이번에 묵을 숙소가 있는 토마코마이의 시화도 하스캅 나무이다.
토마코마이의 지명은 아이누어의 to-mak-oma-nay(토마코마나이, 늪 속으로 들어가는 강)이라는 설과 tu-makomay(투마코마이, 마코마이 강의 하구)라는 설이 있다. 바다에 접한 항만도시로 홋키라는 함박조개가 유명한 고장이다.
토마코마이 스에히로쵸苫小牧 末広町에는 시립 미술 박물관이 소재해 있는데, 토마코마이와 아이누의 역사 문화를 알 수 있는 귀중한 박물관이다.
시라오이白老에 있는 우포포이 박물관과, 비라토리平取의 니부타니 자료관으로 갈 때도 토마코마이는 두 지역을 방문하기 편리한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다. 신치토세 공항과 삿포로를 가기에도 교통편이 수월하기 때문에 이곳을 거점으로 숙소를 잡았다.
나는 바로 토마코마이로 가지 않고 신치토세 공항 안을 좀 더 둘러보기로 했다. 상점가로 가는 긴 통로로 수평보행기가 이어져 있었다. 공항 내 상점에는 쟈가폿쿠르나 쟈가피리카 같은 홋카이도 한정의 과자, 시로이 코이비토 등 다양한 특산품이 즐비했다. 기념품 숍을 천천히 살펴보다 보니 전통의상 아미프를 입은 도라에몽 인형이 보였다. 아이누모시리 공예품점이었다.
전통 자수를 넣은 액자, 나무를 깎아 만든 여러 가지 공예품, 전통 문양의 에코백이나 동전지갑. 소박한 상점 안에는 머리에 둘러매는 두건 마탄푸시(matanpus, マタンプㇱ)와 전통의상 아미프도 있었다. 아미프는 한 벌에 한국 돈으로 백만 원가량 했던 것 같다.
이 많은 물건들 중에서 홋카이도에 오기 전부터 제일 궁금했던 건, 아이누의 구금악기인 묵쿠리였다. 대나무를 재료로, 입에 갖다 대고 엮인 현을 잡아당기면 윙, 윙, 하고 공명하는 소리가 난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나 바람 부는 소리 등을 표현할 수 있다.
자연의 소리를 그대로 담아낸 듯한 소리가 묵쿠리의 매력일 것이다. 다른 공예품들은 돌아올 때 다시 보기로 하고 나는 1,100엔을 주고 묵쿠리를 샀다.
공항에는 곳곳에 우포포이를 홍보하는 포스터가 보였다. 코로나가 전 세계를 강타하기 시작한 2020년, 홋카이도 시라오이에 국립 아이누 민족 공생 상징공간인 우포포이가 개관했다. 일본이 아이누 민족을 내세워 러시아에게서 북방 지역 영유권을 확보하기 위한 일환이라고 할 수 있으나, 멸실해 가는 아이누의 전통과 문화를 보전하기 위해 국립 시설을 마련했다는 것 자체는 환영할 일이 아닐까.
그만 토마코마이로 가야 했다. 건물에서 빠져나와 30신치토세 공항선 버스를 타고 토마코마이역 앞에 내리면 숙소 근처였다. 30번 팻말 앞에 서 있자 누군가 다가와서 종이를 보여주며,
"무로란?"
하고 묻는 것이었다. 잠깐 당황하다 아저씨가 손에 든 버스 시간표를 보곤 대답했다.
"아…. 토마코마이!"
"토마코마이? 여기서 잠깐 기다려요."
공항 밖에서 듣는 첫 일본어에 잠깐 버벅거렸다. 버스회사 직원인 걸까? 아저씨는 정류장 근처에서 손님들 짐을 버스에 실어주거나 했다.
공항버스정류장에서 한 10분 즈음 기다리자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를 탈 때 뽑는 정리권(整理券, 차표)을 뽑아 손에 꼭 쥐고 좌석에 앉았다. 토마코마이까지 가는 동안의 창밖은 평야였다가 곧 현대식 단독주택들이 즐비해 있었고, 역 근방과 가까워지니 항만도시이자 공업도시답게 멀리 제지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내가 만난 토마코마이는 고즈넉한 도시였다. 또 어쩌면 황량한 동네이기도 했다. 오는 동안 모든 것이 듬성듬성 있었다. 그래도 내가 본 게 전부는 아니기 때문에 쉽게 단정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첫날 일정은 정해져 있었다. 숙소에 입실 후 짐을 풀어놓은 뒤, 토마코마이 역에 통로로 이어져 있는 메가 돈키호테로 갔다. 그 큰 건물 속엔 롯데리아나 한국에서 일찍이 철수했던 미스터도넛도 있었고, 쿠마자와 서점도 들어와 있었다.
한국에서는 아이누에 관련된 서적이라면 대부분 품절이나 절판된 게 많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외서를 찾아봐야 했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 사고 싶었던 일서 몇 권을 살 생각이었다.
일본 서점은 혐한·혐중 코너가 있는 걸로 악명이 높은데, 쿠마자와 서점은 본사 지침으로 헤이트스피치 도서를 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 덕분에 편하게 서점을 둘러볼 수 있었다.
쿠마자와 서점 토마코마이점은 따로 '아이누의 문화를 알아보자' 코너가 있어 아이누 관련 서적을 모두 모아볼 수 있었다.
일반인들에게 아이누 문화에 관심을 갖게 만든 건 역시 노다 사토루의 '골든 카무이'가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을 것이다. 러일전쟁 시기의 일본과 홋카이도를 배경으로 아이누 문화를 이야기 속에 녹여낸 만화이다. 실제로 이 만화의 영향력으로 아이누 민족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홋카이도의 아이누 자료관 등을 성지순례하듯 가는 사람들도 왕왕 생겨났다. 아이누 문화를 알리는 데에 일등공신인 셈이다. 이처럼 어떤 문화를 문화콘텐츠로 만드는 건 중요한 일이 아닐까. 잊혀져가는 것들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릴 수 있는 원동력인 것이다.
나는 치리 유키에의 아이누 신요집과 관련된 도서 두 권을 샀다. 일본이라고 책 가격이 많이 싸진 않았다. 한국에서 다 못 쓴 도서문화상품권을 여기에서 쓸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았다.
책을 사고 나서 바로 옆의 메가 돈키호테에서 간단한 먹을거리를 샀다. 마침 마감세일로 연어알 군함이 든 초밥 세트가 반값세일을 하는 시간이었다. 웅성웅성 모인 틈에 나도 초밥 한 팩을 담고, 나와서는 미스터도넛에서 도넛을 몇 개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마감세일 초밥은 마트 초밥치고 굉장히 알차고 맛있는 구성이었다. 몇 년 만에 다시 먹어보는 미스터도넛도 여전히 맛있었다. 토마코마이에서의 첫날이 그렇게 끝나갔다.
2023.04.03 가다
2023.04.10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