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에는 특이한 지명들이 많다. 이미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거나, 찾아본 적이 있다면 어째서 그런지 단번에 알 것이다. 홋카이도의 지명들은 아이누어에서 유래된 것이 대부분이다. 메마르고 큰 강이 있는 삿포로(삿포로 펫), 땅이 끝나는 곳 시레토코(시리에톡), 모래 사이의 강 오타루(오타오로나이), 여름의 마을샤코탄…
한국식 음으로 읽은 북해도란 이름도 분명 친숙하고 멋진 이름이다. 그러나 홋카이도란 이름은 에도 시대 말기의 탐험가 마츠우라 타케시로(松浦武四郎)가 아이누어의 카이(이 땅에 태어난 사람)라는 단어를 따, 정부에 홋카이도란 이름을 제안했다. 선주민족에 대한 존중이 담긴 명칭인 셈이다. 그래서 이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되도록이면 북해도가 홋카이도란 이름으로 불렸으면 한다.
아이누는 일본을 구성하고 있는 민족 중 하나이다. 지금의 홋카이도와 토호쿠 지방, 쿠릴 열도, 사할린에 일만 년 전부터 건너와 살아온 북방민족이다. 여타 아시아계의 인종과 다르게 다소 입체적인 두상이 특징적이다. 아이누는 북극 문화권 중에서도 최남단의 민족으로, 옛 일본의 선주민이었으나 야마토(大和)인에게 밀려 점차 북부인 홋카이도까지 세력이 밀려나게 된다.
아이누 민족은 스스로를 "사람"이란 뜻의 아이누(Aynu, アイヌ)로 부르고, 야마토인을 이웃이란 뜻인 시삼(Sisam, シサㇺ), 그리고 화인(和人)이라고 불렀다. 홋카이도라는 이름이 생기기 전 그들의 땅은 "아이누의 땅"이라는 뜻의 아이누 모시리(Aynu mosir, アイヌモシㇼ)였다. (그러나 아이누 모시리는 범위가 광범위하기에 홋카이도 쪽만을 가리켜 야운 모시리 yaun mosir(직역하면 육지의 나라)라고도 했다.) 그러나 화인은 아이누 민족을 오랑캐란 뜻으로 에조, 에미시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에도 시대 말기까지도 홋카이도는 화인의 영향력이 적은 오랑캐의 땅인 에조치(蝦夷地)였다.
에도 막부 시기에는 남부 하코다테에서 마츠마에 번松前藩이 영향력을 발산했으나 홋카이도 전역에 미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오래도록 아이누 민족과 화인은 잦은 교역을 하며 지냈다. 아이누는 주로 화인에게서 술을 빚을 쌀과 목예품, 철 제품이나 옷 등을 모피, 연어, 다시마 등과 교역했다. 마츠마에가 있기 전에는 화인과 아이누 간의 무역이 자유로웠으나, 마츠마에 번은 아이누와의 무역 독점을 하고 번내 이외의 지역에서 교역하는 것을 금지했다. 또한 아이누에게 불리한 교역을 일삼아 반발이 일기도 했다.
홋카이도 전체가 완전히 야마토 치하에 들어가는 것은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후이다. 당시 시베리아를 집어삼키고 점점 남진하는 러시아를 경계하기 위해 북방을 개척한다는 명목 아래였다. 1869년, 에조치는 홋카이도로 개칭되며 일본에 완전히 편입된다.
화인은 아이누 민족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1899년 구 토인 보호법(旧土人保護法)을 만들고, 아이누의 토지를 몰수하고 전통적인 풍습과 생활양식을 금지시켰다.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시키고 일본어를 사용하게 하며 민족말살정책을 펼쳤다. 한반도에서 자행된 창씨개명과 동화정책은 보다 먼저 아이누 민족에게 시행됐던 것이다.
오늘날 아이누어는 거진 사어가 되고 아이누 민족은 화인에 대부분 동화되었으나, 스스로 자신들의 뿌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잊지 않기 위해 아이누인들은 끊임없이 선대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만약 조선이 독립하지 못했더라면, 내선일체가 성공했다면, 현대의 한민족은 어떤 모습일까? 한민족도 아이누 민족과 같은 길을 갔을지도 모른다. 지배의 효율성을 강화하기 위해 지배 민족들은 끊임없이 피지배 민족의 민족성을 말살하고자 든다. 그것이 아무리 반인륜적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것은 제국주의 시대에 끝난 이야기가 아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위구르와 티베트가 다른 화인(華人, 중국 사람)들의 억압에 시름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비라토리 쵸 니부타니 코탄의 전통의상을 입은 아이누 목조상
나는 여행책자 읽는 걸 좋아한다. 그중에서 홋카이도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한국인에게도 사랑받는 관광지이다. 홋카이도 곳곳에 산재한 메이지 시대 근대건축물과 웅장한 자연경관, 그리고 가히 설국다운 눈의 삿포로… 각종 영화나 드라마, 예술작품에서 낭만화하는 그곳. 분명 모두 아름답고 낭만적인 곳이다. 그러나 선주민족인 아이누 민족에 대해서는 앞서 말한 지명에서나 조금 알아가고 말뿐, 여행에서 큰 비중은 없다. 홋카이도를 여행하면서 그 땅에 수천 년 이상 살아왔던 민족의 발자취를 조금이라도 더 알리고자 이 글을 시작한다.
먼저, 홋카이도의 지역 구분은 가장 대표적인 도앙道央, 도남道南, 도북道北, 도동道東으로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 도남은 마츠마에 번이 있던 곳으로, 홋카이도 내에서 가장 화인의 역사가 긴 곳이다. 일본식 성채와 고료가쿠, 일본 3대 야경을 볼 수 있는 하코다테 전망대 등이 있다. 홋카이도의 개척의 시작이자 침략의 시발점이다.
도동 지역은 가장 넓고 자연유산이 잘 보존된 곳으로, 웅대한 자연경관을 느끼기 위해 많은 여행객들이 이곳을 찾는다. 아이누어로 "땅이 끝나는 곳"인 시리에톡(sir etok, 시레토코知床)의 시레토코 곶, "들어가는 땅"인 아파시리(apa sir, 아바시리網走)에서는 오호츠크 해에서 떠내려오는 유빙을 볼 수도 있다.
또한 쿠시로 시의 아칸 호(阿寒湖) 아이누 코탄도 도동 지역의 명소이다. 혼자서 가기에는 교통편이 꽤 불편해 주로 단체여행으로 많이 방문한다.
도북 지역에는 아사히카와旭川, 왓카나이稚内, 리시리利尻 섬과 레분礼文 섬 등이 있다. 그중 리시리 섬은 조선 사람과 인연이 있었다. 이지항의 "표주록"에 따르면, 이지항 일행이 강원도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리시리 섬까지 표류하게 된다. 그리고 그 섬의 아이누 사람들한테서 도움을 받고, 리시리와 소야를 지나 화인들이 있는 마츠마에까지 안내받아 무사히 조선으로 송환되는 표류 기록이다. 조선 사람으로서 아이누 민족과의 최초의 접촉이 있었던 곳이다.
마지막으로 도앙 지방은 유명 관광지들이 몰려 있는 곳이다. 홋카이도에서 가장 큰 도시 삿포로부터 온천 마을 노보리베츠나 운하의 도시 오타루… 치토세 공항, 노란 멜론으로 유명한 유바리도 도앙 지방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라오이 정에 우포포이 아이누 박물관이, 비라토리정 니부타니에 아이누 자료관이 소재해 있다.
또한 홋카이도의 면적은 남한과 비슷하게 맞먹는다. 종종 섬이기에 제주도 면적을 상상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크고 넓은 섬인 것이다. 무턱대고 경로를 짰다간 길지 않은 여행 일정의 대부분을 기차나 버스에서 보낼 수 있기 때문에, 이번 여행에서는 홋카이도의 중앙부인 도앙 지방을 중심으로 아이누의 족적을 따라가기로 했다.
옛날에 아이누 민족에 대해 알기 전에는 홋카이도가 먼 옛날부터 일본 땅이었고, 야마토 민족이 오래도록 땅을 일구어 살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찾으면 찾아볼수록 홋카이도에는 혼슈에서 볼 수 있는 오래된 일본식 목조건물보다 서양식 근대건축물이 더 많았다. 게다가 홋카이도가 일본에 완전히 편입된 게 그리 오래가 아니었던 것도 충격이었다.
일본은 팽창하던 제국주의 시절 북쪽의 홋카이도를 새 영토로 편입하고 남쪽의 류큐국을 오키나와로 병합했다. 북으로 남으로 작은 섬들을 야금야금 먹어치우고 청일전쟁으로 타이완 섬까지 청으로부터 할양받는다. 그리고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괴뢰국인 만주국까지 세우기에 이른다. 이에 그치지 않고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는 동남아시아까지 패권을 늘리고자 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의 원폭 투하로 일왕이 항복하며 일본의 폭주는 막을 내린다.
그렇게 패전 후 일본은 식민지 국가들에게서 철수하며 여러 국가들이 독립을 맞게 된다. 여기까지는 대부분이 아는 사실이지만, 일본의 패전 후에도 암울한 역사를 지나온 아이누와 류큐 사람들은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다. 아이누에 대해, 또 류큐에 대해 오래도록 관심을 가져온 한 사람으로서 이번 여행의 방향을 정하게 되었다. 대중적인 여행 루트인 홋카이도의 웅장한 자연경관이나 눈의 풍경을 관람하는 것은 잠시 밀어 두었다. 대신 박물관을 위주로 하여 홋카이도의 역사와 선주민족의 문화를 톺아보기로 했다. 일종의 답사 여행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