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500년 제 20 권

by 이병철


신봉승의 조선왕조 500년

제 20 권 [사도세자]


경종의 4년이라는 짧은 치세 후 1724년 영조가 보위에 오른다.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심과 함께 모후가 무수리 출신이라는 핸디캡을 안고 즉위한 영조는 52년간의 치세 내내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닌 망령과 같은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한 임금이었다. 남인과 소론의 지지를 받던 장희빈의 소생인 경종과 노론의 기대를 받았던 영조의 대립에 있어, 경종의 독살설은 영조가 노론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비록 왕위에 올랐으나 취약한 기반 위에 세워진 왕권이었다.


과연 영조는 성군星君인가?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3대 국정지표를 공표한다.

그것은 계붕당(戒朋黨), 계사치(戒奢侈), 계숭음(戒崇飮)이다.

계붕당은 정치적으로 붕당 정치의 폐해를 신료들에게 호소하고 심지어 노론과 소론의 수장들을 불러 손을 맞잡게 하는 등 정치적 화합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를 탕평책을 통하여 상호 반목을 줄이고자 했다.

계사치는 거듭되는 흉년을 맞아 민생을 보살피는 차원에서, 백성은 기아로 허덕이는데 반해 사대부 여인들의 지나친 사치를 법으로 제재하기로 한다. 특히 부녀자들은 머리에 쓰는 가체를 화려하게 꾸미느라 금은으로 치장하는 바람에 목을 제대로 가누기도 힘들 정도라고 하며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에 보면 심지어 그 무게에 목뼈가 부러져 죽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한다.

또한 먹을 양식이 부족한 상황에서 술 제조에 소모되는 곡식을 줄이고자 금주령을 실시한다. 음주를 하다 적발된 남도 병마절도사였던 윤구연을 시범적으로 숭례문 앞에서 사형에 처하기까지 하지만, 금주령 또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도성 내에서 음주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영조는 재위 4년째 경종독살설과 적통성에 문제를 제기한 이인좌의 반란을 경험하게 된다. 경상도 지역에서 발호한 반란군은 세력을 넓혀 삼남 지역 모두로 퍼져나갔고, 정규군에 의하여 약 보름 만에 진압되지만, 결과적으로 소론과 남인들의 몰락을 초래하게 되었다.


영조의 취약한 왕권과 후궁 콤플렉스는 영조의 정신적 심리 상태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보인다.

심지어 영조는 장자인 효장세자와 화평 옹주마저 먼저 떠나보내고,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죽음의 물결 속에서 내심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로 얼룩져 있었다.

영조는 매일 대전으로 돌아올 때 귀를 씻고 입안을 헹구었으며, 옷을 갈아입었다. 영조의 기이한 행동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좋은 일을 할 때와 골치 아프고 궂은일을 할 때 그 출입하는 문을 다르게 했다. 또 사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절대 한 곳에 있지 못하게 했다. 이를테면 세자는 화순 옹주나 화완 옹주와는 같은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의 기이함은 날로 더해가서 사랑하는 사람이 자주 내왕하는 길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절대 다니지 못하도록 명했다. 사람을 만날 때에도 화순 옹주나 화완 옹주를 만날 때는 깨끗한 옷을 갈아입고 대했고, 세자를 만날 때는 입은 옷 그대로 대했다가 말을 나눈 후에는 반드시 귀를 씻었으며, 씻어낸 그 물은 자신이 싫어하는 화협 옹주가 사는 집 광창廣窓으로 던지게 했다.


영조 내면의 콤플렉스와 지나친 결벽증과 강박 장애는 사도세자에 대하여 자신의 자식이 아닌 마치 라이벌로 여기는 것 마냥 표출되기 시작한다.

영조는 사도세자에 대하여 핍박에 가까운 구박으로 일관하기 시작한다.

사도세자가 자신의 과도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측면이 다소 있었으나, 영조는 능행길에 비가 내리는 것도 세자를 탓하는가 하면 세자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트집 잡아 그를 옥죄기 시작한다.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 청정을 시키기도 하는데, 세자가 내리는 결정마다 딴죽을 걸고, 또한 자신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맘대로 처결하느냐고 신료들 앞에서 면박을 주기 일쑤였다.

영조의 정신 상태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세자는 세자대로 영조에 대한 증오와 반발이 커져가고 서로 소통이 단절된 상태로 지내게 된다. 유일한 연결고리는 세손이 되는 이산(후에 정조)의 출생과 이산의 영특한 성장만이 그들이 나눌 수 있는 공감대였다.


이런 상황에서 세자는 경종의 독살설에 대하여 영조와 노론간의 야합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렇기에 세자는 노론과의 관계가 결코 원만할 수 없었다. 노론의 입장에서도 세자가 보위에 오를 경우 그들에 대한 숙청은 명약관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에, 그들은 나경언이란 자를 포섭하여 소위 “동궁궐실십여조(東宮闕失十餘條)”라는 흉서를 영조에게 전달되도록 계략을 짠다. 궐실이란 해서는 안 될 잘못을 저지른 허물을 의미하는 것이며 세자의 궐실이 10여 조항으로 적혀있다는 것이었다.

그 내용을 옮기면, “...옆에 시침하는 나인이 요괴스러운 귀신같다 하여 칼로 쳐 죽이고는, 매일같이 갑갑증이 심해 북성에 나가 놀다가 비구니 하나를 얻어 들어와 수태하게 하고, 또한 의대증이 심하여 옷을 입을 때마다 네댓 벌의 옷을 찢고 태운 뒤에야 옷을 입는데 잘못 입히려다가는 내관이고 나인이고 마구 쳐 죽이매 이에 죽은 자가 총애 받던 박빙애이고 서행 길에 얻어온 장미라는 기녀이옵고 . . .동궁은 두 번이나 세자빈을 칼로 죽이고자 했고, 화완 옹주도 여러 번 죽을 때를 벗어났으며....”


상기의 내용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한 영조의 노기는 하늘을 찌르고, 세자의 직을 폐할 것을 결심한다. 영조는 동궁전으로 거둥하여 세자에게 자진할 것을 명하지만, 세손 이산의 울부짖음과 동궁 내관들의 만류로 자진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여, 결국 세자를 뒤주에 가둬둘 것을 하명한다. 뒤주에 갇힌 세자는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8일째 숨을 거둔다.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자신의 아들 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겨 죽이는 이런 기막힌 사건을 임오화변壬午禍變이라고 한다(1762 영조38년). *1762년이면 사도세자가 죽은 해에 다산 정약용(1762~1836)이 태어난다.

세자의 죽음 이후 영조는 회한에 젖어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린다.

“내게 죽음을 당했으나 내 아들임은 분명하고 세손의 아비임도 속일 수 없다. 하여, 죽은 아이에게 시호를 내려 그 가련한 영혼을 달래고자 하니 다시 거론하지 않도록 하라. 죽은 아이에게 사도세자思悼世子라는 시호를 내리고, 세자빈은 효장세자가 죽었을 때 그 빈을 효순현빈이라 했던 것처럼 혜빈惠嬪이라 궁호를 내리고, 새로 혜빈의 옥인 일체를 내려 조정에서 통용되도록 하라.”

이는 연좌제가 있던 당시 시대 상황에서 영조는 사도세자를 역모나 죄인이 아닌 아비의 훈육에 따라 죽임을 당한 사건으로 처리하여 세손 이산을 보호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사도세자의 죽음으로써 세손 이산으로의 승계가 과연 무탈하게 이뤄질 수 있을 것인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노론의 입장에서 세손 이산이 보위에 오르면 마치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경우처럼 관련자들에 처참하게 죄를 물었던 경우가 반복되지 않겠는가.

세손 이산을 둘러싼 모든 인물들은 어떻게 하든 세손이 즉위하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이다. 세손을 대체할 인물을 찾는 것은 누가되든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왕족 중에서 허수아비 같은 존재를 찾아 옹립하면 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세손 이산과 대척점에 있는 대표적 인물로서 정순 왕후가 있다. 정순 왕후는 영조와 무려 51세의 차이가 나는 뒤늦게 맞은 중전이었다. 세손이 영조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르면 대비는 혜빈 홍씨가 되고, 자신은 실권 없는 왕대비로 전락해버리는 것이 자명한 일이 된다. 정순왕후는 영조의 곁에서 오라비 김귀주와 함께 세손을 모함코자 끊임없이 계략을 만들어 낸다.

다음으로 홍인한과 화완 옹주가 있다. 홍인한은 세손 이산의 외할아버지 홍봉한의 동생이다. 그러나 그 기질이 달라 홍봉한과 경쟁하는 세력에 몸담고 있었고, 사도세자의 죽음을 주도했던 사람이었다.

그들은 세손의 동궁을 샅샅이 염탐하여 누굴 만나는지 무엇을 하는지 정보를 캐내어 중상모략의 재료로 활용하기도 하고 협박의 익명서를 보내기도 한다. 심지어 자객을 보내어 암살을 기도하면서 동궁 내관들을 살해하기도 한다.

이 같은 시련 속에서 세손을 끝까지 격려하고 지키고자 한 인물이 외할아버지 홍봉한, 외숙부인 홍낙인, 홍국영 등이 함께 하며 동고동락한다.


1775년 영조가 여든이 넘는 나이에 이르자 기력이 쇠진하여 세손에게 대리 청정할 것을 주문한다. 대리 청정은 바로 세손의 즉위를 공식화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인데, 홍인한을 비롯한 노론이 방관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세손에 대한 삼불필지지설(三不必知之設)을 내세워 세손의 대리 청정을 반대하였는데, 하나는 불필지노론소론(不必知老論少論)으로 붕당의 정치적 역학 관계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고, 둘은 불필지이판병판(不必知吏判兵判) 즉 인재를 운용하는 이판의 업무와 병사에 관한 일을 세손이 모르고 있다는 것, 셋은 불필지조사(不必知朝事)로서 조정의 작급과 종사의 작급에 대하여 개념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허나, 영조는 “세손과 더불어 강론하는 것을 보면 노론과 소론의 일을 입에 담지 않은 것은 나의 탕평에 거스르지 않으려는 배려가 있었던 것이고, 세손의 학문이 깊어 이판의 일과 병판의 일을 거침없이 말하는 것을 듣지 않았느냐. 또 조사에 관한 일도 막힘이 없는 것을 보았지 않느냐”며 강력히 대리 청정을 밀어붙인다.

이렇게 영조와 신료 간에 힘겨루기를 하고 있을 때 행부사직 서명선은 상소를 올려 홍인한의 삼불필지지론은 세손으로 하여금 보위를 잇지 못하게 하려는 음흉한 술책이기에 지금이 대리 청정의 적기라는 것을 주장한다.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홍국영은 세손 이산에게 여태껏 위해 세력으로부터 받은 갖은 어려움과 괴한이 침방에 까지 들어온 사실, 내관의 의문사 등을 적은 상소를 올리도록 한다.

두 개의 상소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이에 영조는 동궁에서 익명서가 나붙고 괴한이 침입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되묻고 책임자로서 영의정 한익모와 좌의정 홍인한을 끌어 내린다.


비로소 정조의 대리 청정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776년 3월 영조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재위 기간은 52년이고 수는 83세였다. 처음 보위에 오를 때부터 정쟁의 힘으로 대권을 쥐었으니 어쩌면 그의 앞에 피어린 당쟁사가 펼쳐지는 것이 필연적일지도 모르겠다. 사도세자를 손수 처단하고, 나이어린 중전과 옹주가 붕당의 이권 쟁탈과 어울리게 되는 것도 보아야 했지만, 탕평의 정책을 고수하려 애썼던 임금이었다.

더불어, 균역법의 시행은 양민들의 삶에 실제적인 큰 득을 주었고, 농사를 중시하고 사치를 금했으며, 각종 형제刑制를 인륜에 맞게 바꾸는 등 민생을 살피고자 했다. 이 밖에도 서얼을 등용케했다든지 훈학서적, 음악서적, <<문헌비고文獻備考>>등의 서적을 남겨 인문 정책의 기틀을 마련했다.


앞으로 펼쳐질 정조의 시대는 과연 당쟁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P/S

1. 영정조 시대에 홍대용이란 인물에 관하여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그는 조선 사대부들의 경전에 의존하는 공부를 허학虛學이라 칭하며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을 추구한 학자이다. 그는 후에 북학파인 박지원과 박제가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홍대용은 유학자이면서도 천문학자로서 지전설을 주장하였다. 숙부인 홍억이 동지사 사정관으로 북경에 갈 때 무관으로 동행하였고, 그곳에서 선교사들을 통하여 다양한 서구 문화를 접하게 된다. 심지어 그는 거문고 연주의 대가였는데 천주교회에 있는 파이프오르간 연주를 듣고선 음계를 파악하여 즉석에서 파이프오르간 연주를 했다고 한다. 전통무술에도 관심이 많아 무예도보통지라는 책의 발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세손 이산과 교류를 가지게 되었고, 정조조에 벼슬을 하기도 한다. 통섭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2. 영조는 청나라 옹정제(재위기간 15년)의 시기를 지나 건륭제 30년까지 52년이라는 오랜 시간 보위에 있었다. 반세기가 넘는 기간이었다. 그동안 변모하는 청나라의 소식과 정보를 분명히 접했음에도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지 못한 것은 많은 아쉬움을 안겨준다. 이에 영조를 성군으로 부르는데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3. 강희대제의 뒤를 이은 옹정제의 수련 내용을 보면 만주어, 몽골어, 한어 공부, 역사, 말타기, 활쏘기, 수영 등 매우 다양하다. 청나라에 통합된 다양한 이민족과의 소통을 위하여 외국어 학습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다. 명나라를 비롯한 중국을 하늘처럼 떠받들던 사대부들이 한어를 공부했다는 글을 읽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역관은 중인 계급이었으니까 .... 그러나 상기 언급한 홍대용은 북경에 가기 전에 한어를 공부하여 보다 알찬 습득을 준비하는 장면이 나온다. 최소한 영정조 시대에 그들이 한어를 공부하여 청나라를 상대하고 그들로부터 신문물을 받아들였다면 어땠을까? 갑자기 소현세자가 떠오른다.


----조선왕조 500년 제 20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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