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500년 제 4 권

by 이병철


제 4 권 [세자 양녕]


동 소설의 4권은 1416년~1421년 즉 태종 16년부터 세종 3년까지를 다루는 내용이다.

1400년에 태종이 즉위하고 1418년까지 약 18년 간 왕위에 있으면서 가장 가슴 아픈 사연은 중전인 정비 민씨의 남동생(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들을 모반 행위라는 죄명으로 모두 제거한 사건과 세자 양녕에 관한 일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태종은 자신의 제위 기간 동안 매일 되새기 듯 다짐한 것은 “자신이 모든 악업을 짊어짐으로써 차세대부터 굳건한 왕권을 확립하고 성군 정치를 가능토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중전 민씨의 외척을 제거하고, 개국 공신들(이숙번, 목인해등)을 숙청한 모든 일련의 행위는 상기의 각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남은 과제는 성군의 출현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태종은 적장자가 왕위를 잇는 전통의 확립을 위하여 장손인 이제를 세자로 책봉하였으나 마지막 단추는 자신의 뜻과 달리 어긋나기만 했다.

세자의 일탈과 방탕한 생활은 수차례 경고에도 불구하고 심해져 가기만 했다. 세자의 신분으로 궐밖으로 나가 술독에 빠져 밤을 지새우는 경우가 허다했고, 세자에게 줄을 대는 일당들은 그 같은 세자의 일탈을 구실삼아 행동 대원이자 앞잡이의 역할을 자청했다.

양녕은 급기야 ‘어리‘라는 여인에 빠져 물불 가리지 않는 질주를 거듭한다.

어리는 중추원부사 곽선의 첩이었는데, 그 미모가 매우 빼어나서 소문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단 두 여인의 미모에 대한 언급이 있다고 하는데 어리와 장희빈이라고 하니, 어리의 미모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을 듯하다. 중국 4대 미녀(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에 버금가는 절세미인이라 하면 상상이 될까?

양녕은 어리에게 접근하고 세자의 지위를 이용하여 그녀를 강탈하다시피해서 동궁으로 함께 잠입한다.

이 같은 사실이 들통이 나서 태종이 격노를 하게 되지만, 쫓겨난 어리를 장인인 김한로의 집에 몰래 숨겨뒀다가 다시 입궁을 시키고 어리와의 사이에 딸을 생산하게 된다. 유모를 구하는 통에 이 같은 사실이 다시 발각되고, 결국 세자 양녕은 폐위됨과 동시에 유배의 길에 오른다.

유배지에서도 어리를 구하고자 태종에게 상소를 전하는 등, 양녕은 태종의 심경을 무참히 찢어 버리는 행각을 멈추지 않는다.

결국 태종은 어리와의 동거를 허락하지만, 그 둘은 후에 양녕의 돌발 행위로 말미암아 어리가 목을 매어 자결하는 비극으로 끝이 난다. 세자까지 폐위되는 경국지색으로 태어난 어리는 미인박명의 한계를 넘지 못했음일까?


세자 양녕을 폐위하는 과정에서도 태종은 중전 민씨와 힘겨운 마찰을 빚는다. 백년 천년의 국가 미래를 설계하는 태종과 친동생을 모두 잃어버린 상황에서 장손까지 폐위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하는 중전 민씨와의 갈등은 운명의 장난이라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태종실록> 18년 5월 30일조에 적혀 있는 세자의 비행을 그대로 인용한다.

“세자의 사람됨이 광포하고, 미혹하고, 오락을 즐기고, 말 달리기를 좋아하고, 유생을 좋아하지 않고, 학문을 일삼지 않았다. 매양 서연에는 병이라 칭하고 나오지 않다가, 강론하는 스승이 앞에 있으면서 전에 한 말과 지난간 행동을 이끌어다가 되풀이하여서 이를 타일러도 전심하여 듣지 않았다...........(축약). 세자가 잘못을 뉘우친다는 뜻으로 맹세의 글을 지어서 종묘에 고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어리를 김한로의 집에 숨겨두고 다시 전에 들이었다가 일이 또 발각되니, 임금이 종사의 대계를 위하여 통절히 꾸짖어 거의 스스로 새 사람이 되도록 하였고, 또 김한로를 외방에 유배하였다. 세자가 도리어 원망하고 분개하는 마음을 품고 드디어 상서를 하였는데, 사연이 심히 패만하고 또 큰 글씨로 특별히 써서 두 장이나 부진(敷陳:널리 진술함)하니 심히 무례하였다.”


태종 18년(1418)에 태종은 이제를 세자에서 폐하고 어릴 적부터 성군의 기질이 다분한 충녕을 세자로 책봉한다.

여기에서 중전 민씨 소생의 4 아들(양녕, 효령, 충녕, 성녕)의 면면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양녕대군은 타고난 기질이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서, 두뇌는 명석하나 제도와 관습에 얽매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자기만의 삶을 추구하는 타입이다.

효령대군은 내색하는 법이 없고 여러 방면에 소질이 있으나 적극성이 결여되고 한편으로는 음험한 성격도 다소 있는 듯하다.

세자 양녕은 자신이 언젠가는 폐세자가 될 운명인 것을 직감이라도 하듯이 하루는 효령대군을 찾아가 효령에게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은 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그것도 아주 직설적으로, 차기 세자는 충녕이 되는 것이 모두에게 이로운 것이니 언감생심 허황된 꿈을 꾸지 말 것을 꾸짖듯 일침을 놓는다. 이에 효령은 자신의 이중적 행실과 감추었던 속셈이 간파되었음을 알게 되자 크게 부끄러워하며 통곡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양녕은 세자로 있으면서 형제간의 갈등을 미리 조정하는 등 나라의 운명을 염려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스스로 마무리하고자 노력한 부분도 있다.

충녕은 어릴 적부터 성군의 기질을 타고난 바, 성실하며 예의바르고, 학문에 매진하는 등 전형적인 유교적 사상을 몸에 배어 익힌 왕재였다고 보여 진다.

막내인 성녕 또한 충녕과 기질과 성향이 비슷하여, 태종과 중전 민씨가 극심한 갈등 관계에 봉착했을 때 양쪽의 가교 역할을 하며 사랑을 독차지할 정도로 영민하고 매사에 있어 행동거지가 반듯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녕은 그의 나이 14세(1418년 2월)에 욕창으로 요절을 하게 된다.


이제를 세자위에서 폐한 이후 태종은 중신들과 상의하여 충녕을 세자로 책봉하기에 이른다. 태종 18년(1418) 충녕의 나이 22세였다.

충녕이 세자가 되고 2 달 만에 태종은 세자에게 양위를 한다. 급격한 변화였다. 아마도 지난 세월 양위 문제로 얽혀 정비 민씨의 남동생들을 자진하게 한 기억이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앉고 모든 정사를 세종에게 일임한다. 단, 병권만은 태종이 쥐고 군사의 지휘를 도맡아 하기로 한다. 병권을 여전히 태종이 장악하게 되는 구도는 조정 업무에 상당한 혼란을 가져오기도 하고, 항간에는 이런저런 구설수가 생기기도 한다.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이원집정제와 흡사한 구도라고 해도 무방한 처사였을 것이다. 특히 병조참판 강상인은 국왕과 상왕에게 군사 업무를 이중으로 보고해야 하는 등 업무에 혼선이 오자 이를 몇몇에게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당시 태종의 심사가 무엇이었는지 알 길이 없으나 병무에 어두운 세종에게 문치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이라 보는 것이 합당하다 하겠다.

강상인의 불만은 결국 태종의 귀에 들어가게 되고, 이에 태종은 강상인을 비롯하여 그와 동조한 세력을 불순한 작당 세력으로 간주하여 일망타진하고자 한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세자빈은 공비 심씨가 되면서 중전의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심온은 국구(國舅)의 지위이자 영의정으로 승진하게 된다. 심온의 승진은 당시 좌의정이었던 박은 으로부터 질투의 대상이 되는데, 박은은 자신의 차지라고 생각했던 영의정 자리가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심온에게 돌아가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심온은 청송 심씨로서, 태조 이성계의 딸 경선공주(경순공주가 아님)가 아버지 대에 며느리로 들어오고, 자신의 딸이 중전이 되는 가문 최대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상기 언급한 강상인이 심온의 동생 심청과 접촉을 하여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던 사실로 말미암아 소위 강상인의 옥사에 간접적으로 연루가 되게 된다.

심온이 세종의 즉위와 태종의 양위를 명나라에 알리기 위한 주청사의 자격으로 명나라로 떠난 사이 강상인의 옥사는 산불처럼 타올라 수많은 관리들이 투옥되고 처형되는 수난을 겪게 된다. 이때 좌의정 박은은 강상인과 심온의 동생 심청을 즉결 처분하도록 주청하여 심온으로 하여금 강상인과 대면할 기회조차 없애 버린다. 주청사의 책임을 완수하고 돌아온 심온은 즉시 체포되었고, 강상인과 대면하면 무죄가 판명날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미 강상인은 처형된 후였다. 결국 그는 박은의 모사에 빠져 처형을 면치 못하게 된다. 당시의 문초는 답을 정해 놓고 무지막지한 고문을 가하는 통에 의금부에서 원하는 답을 자백하지 않을 수가 없도록 만든다. 심온은 자신이 전혀 모르는 사이에 헤어나지 못할 난국에 빠졌음을 깨닫고, “청송 심씨는 절대 반남 박씨와 혼인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진하게 된다.


세자로 책봉된 지 두 달 만에 보위에 오르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상인의 옥사를 치르면서 장인과 처가 집 식구들이 처형당하고 관노로 전락하는 처참함을 목격한 세종으로서는 22세의 나이에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세종은 태종의 의지에 따라 문치를 중시하는 성군 정치를 위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간다.

무엇보다도 몇 해 동안 지속되는 가뭄으로 인하여 근초목피로 연명하는 것도 어려운 백성들의 실상을 파악하고 자신도 쌀밥을 먹지 않고 혼식을 하기로 한다. 그리고 쌀의 낭비가 심한 술을 입에 대지 않기로 천명한다. 수시로 미행을 하며, 나라의 곳간에서 방출한 진휼미로 죽을 만들어 생명을 구제하는 대열에 서서 직접 백성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도 한다. 심지어 맹사성에게 명하여 경회루 근방 한 구석에 삼간초옥을 만들고 바닥을 볏짚으로 깔게 하여 백성의 삶과 같은 체험을 하며 수시로 삼간초옥에서 글을 읽고 가야금을 타며 명상의 시간을 가지곤 했다. 초옥에 기거하고자 하는 세종의 의지가 워낙 강하여 태종과 중전 민씨는 잉첩이라도 들여서 그가 침전에서 자도록 하라는 하명을 내리기도 한다.


세종이 즉위하고 겪어야 했던 환란은 가뭄과 옥사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왜구들의 침범이 보다 광폭해지고 그 규모도 커져만 가서 백성들의 피해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1419년 기해년을 맞아 태종은 왜구들의 본거지인 대마도 정벌에 나선다. 약 14,0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대마도에 당도한 병사들은 대마도의 험난한 지형과 낯선 환경을 맞았지만 결국 우여곡절 끝에 왜구의 두령인 도도웅와로부터 항서를 받아낸다. 그리고 태종은 아래와 같은 선지를 적어 대마도가 복속되었음을 천명한다.

“대마도는 경상도의 계림에 속해 있으니, 본디 우리나라 땅이라는 것이 문적에 실려 있음을 상고해볼 수 있다. 다만 그 땅이 심히 작고 또 바다 가운데 있어서 왕래함이 막혀 백성들이 쓰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이러므로 왜인들 가운데 그 나라에서 쫓겨나 갈 곳이 없는 자들이 와서 함께 모여 살아 굴혈을 삼은 것이며, 때로는 도적질로 나서서 평민을 위협하고 노략질하여 전곡을 약탈하고 마음대로 고아와 과부 등 사람들의 처자를 학살했으며....(중략) 이제 대마도 한 섬에도 역시 하늘에서 내린 윤리와 도덕의 성품이 있을 것이니 어찌 시세를 알고 의리에 통하여 깨닫는 사람이 없겠는가. 대마도 수호 도도웅와는 그 자신(自新)할 길을 열어 화를 면하게 하고 나의 생민을 사랑하는 뜻에 맞도록 하라.”


세종은 즉위 직후부터 험난한 여정을 맞는다. 아무리 태종이 병권을 맡아 대마도 정벌을 주도한다 할지라도 기해동정은 세종의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왕이 된다는 것, 그것은 바로 왕관의 무게를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P/S

1421년(세종3년) 중전 민씨는 학질에 걸려 앓다가 세상을 떠난다. 이방원을 태종으로 만드는 데 절대적으로 기여한 인물이자 조선 건국에 주도적 역할을 한 여걸이었다.

존호는 원경왕태후라 했고, 능호는 헌릉이다.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헌릉이 있으나, 지나는 길손들은 무심하여 파란으로 점철된 원경왕후의 일생을 입에 담을 줄 모른다. 그러나 그 여인은 분명히 여장부였다.


-----제 4 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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