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500년 제 6 권

by 이병철


신봉승의 실록대하소설 조선왕조 500년

제 6 권 [세종 1431~1450]


세종이 1418년 22살의 나이에 보위에 오른 지, 어느 덧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제 6 권은 세종의 치적들에 관한 내용인데, 이를 천편일률적으로 나열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듯 하여 보다 세세한 부연 설명으로 독후감을 써볼까 한다.


세종은 여러 차례 자신의 포부를 3가지 큰 항목으로 나누어 중신들에게 털어 놓곤 하였다.

“내가 보위에 오른 이래 나는 세 가지 할 일을 생각해냈어요. 그중, 첫째는 중국의 음악과 우리나라의 저속한 음악을 버리고 순수한 우리나라 아악을 성취해보자는 것이었고, 둘째는 우주만상의 원리를 깨닫고 그 깨달음으로 만백성들을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으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 가지 소원이 모두 성취가 된 것입니다. 박연이 없었던들 내 어찌 아악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겠으며, 장영실이 아니었던들 우주만상의 원리를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실로, 박연과 장영실은 과인을 위해 하늘이 내려준 인재들인가 보오. . .”

이에 영의정 황희가,

“전하, 그런데 나머지 하나의 소원은 무엇이온지요?”

“나의 세 번째 소원이란 바로 문자 창제입니다”


박연을 등용하여 조선의 아악을 정리한 것은 제 5 권에서 다룬 바 있고, 이제 장영실에 대하여 그가 얼마나 위대한 발명가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장영실의 발명품은 아래와 같이 조선 과학사에 획을 긋는 굵직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 자격루 : 자동적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

- 혼천의 : 천체 관측 기구로 혼의기 (渾儀器), 선기옥형 (璇璣玉衡)이라고도 불린다. 태양,

달, 오행성(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위치를 측정하는 데 사용되었다. 혼천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기후를 예측하기 위한 천문 관측에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장영실의 발명품은 측정을 할 때마다 수동으로 작동을 해야 할 필요가 없이 자동으로 알아서 시간과 날짜를 알려 주었다.

- 앙부일구 : 그림자를 이용해 시간을 알려주는 해시계

- 측우기 : 강우량을 측정하는 기구.

- 옥루 :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의와 물시계를 결합해 천문기구를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세종 20년에는 또 하나의 자동 물시계인 옥루를 만들었는데, 옥루는 물시계와 천문시계를 합친 종합 물시계였다. 세종은 경복궁 자신의 침전 옆에 흠경각을 지어 그 안에 옥루를 설치하기까지 했다(흠경각은 양녕대군이 작명하였으며, 경회루 동쪽 천추전에 설치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처럼 장영실은 세종의 각별한 보살핌 속에서 찬란한 발명품들을 만들었으나 1442년(세종 24년) 안여(임금이 타는 가마)가 부서지는 소동으로 곤장 80대의 처벌을 받고 낙향한 후 역사 속에서 사라진 인물이다.

세종은 장영실의 퇴출 즉시 경회루 근처에 있던 간의대(천문대)를 없애버리라고 명을 내리는데, 이는 명나라와의 외교적 문제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취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즉 당시 명나라의 풍속 및 법률을 정리해 놓은 “야획편”에 따르면, 명나라 황제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천문학 공부를 할 수 없으며 달력을 만들다 발각되면 사형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즉 조선으로서는 독립적인 천문과 역법을 만들 수가 없었던 시대적 상황에 처해 있었다고 보여진다. 허진호 감독의 <천문: 하늘에 묻는다>라는 영화에 따르면 이 같은 상황에서 세종은 장영실을 명나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안여 사건을 침소봉대하고 장영실을 내쫓는 상황 극을 의도적으로 연출한 것이라 평가하고 있다.

게다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1442년이면 한글 창제 1년 전이다(창제 1443년, 반포 1446년).

조선이 천문과 역법의 독립을 꾀함과 동시에 고유의 문자까지 만든다는 것은 명나라로부터 절대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아마도 세종은 장영실과 훈민정음 중에서 한글을 택한 것이 아닐까?


심지어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금혼령(禁婚令)이 내려지는 경우가 3가지 있었는데, 왕이 배우자나 후궁을 간택할 때, 혹은 세자가 간택을 할 때, 그리고 공녀(貢女)를 선별하여 명나라에 바칠 때이다. 명나라 사신은 조선에 와서 사대부 집안 처녀들을 데려가기 위하여 온갖 만행을 저질렀으나 이를 묵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이제 세종의 한글 창제 과정을 들여다보자.

무엇보다도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한글의 전반적인 구성과 착안은 전적으로 자신이 직접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여 주도적으로 완성해 갔다는 점이다.

한글의 주요 골격이라 할 수 있는 초성과 중성, 종성에 대한 착안을 세종이 직접 했다는 것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만물의 이치인 음양오행과 소리에 있어 그 관계를 치밀하게 연구한다.

성삼문과의 문답에서 그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말의 이치와 원리를 어떻게 밝혀야 좋으냐?”

“사람은 누구나 입과 혀와 목구멍을 움직여 소리를 냅니다. 따라서 소리는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다섯 가지라는 것은 무엇무엇이냐?”

“우선 목구멍에서 나는 목구멍소리(후음 喉音)가 있고, 어금니 근처를 막고 내는 소리로 어금닛소리(아음 牙音)가 있사옵니다. 또 혀끝으로 내는 혓소리(설음 舌音)와 윗니 근처에서 나는 잇소리(치음 齒音), 그리고 마지막으로 입술에서 나는 입술소리(순음 脣音)가 있사옵니다.”

성상문, 박팽년, 이개, 정인지와의 끊임없는 문답으로 세종은 오행의 근원에서 소리의 구성을 찾아낸다.

그리고 소리에 대한 이론에서 자형(字形)을 찾기까지 밤새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어금닛소리(아음)---- 군君, 규虯, 쾌快

혓소리(설음)-------- 두斗, 담覃, 탄呑, 나那

입술소리(순음)------- 별彆 보步 표漂 미彌

잇소리(치음)--------- 즉卽 자慈 침侵 술戌 사邪

목구멍소리(후음)------읍挹 허虛 홍洪 욕欲

이와 같은 분류를 써서 수없이 발음을 해본다. 어린 아이가 말을 배우는 것처럼 또박또박 읽어 내려가며 혀의 움직임을 떠올렸다. 그러나 자신의 입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없기 때문에 혀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를 상상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밤 새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세종은 드디어 혀의 모양새에서 착안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한다.

군(君)을 발음할 때 어금닛소리는 열린입천장에 올려 붙이고 거기를 막아내는 소리인데, 그때 혀뿌리는 목을 막고 있다.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ㄱ’과 같은 모양이 된다는 것을 떠올린다.

ㄱ, 牙音, 如君字 初發聲 (ㄱ은 어금닛소리이니 군君 자의 첫 발성과 같다.


나(那)를 발음할 때 혀뿌리를 윗잇몸에 붙이는 모양을 따서,

ㄴ, 舌音, 如那字 初發聲 (ㄴ은 혓소리이니 나那 자의 첫 발성과 같다).


입술소리 미彌를 발음할 때 입 모양을 관찰하여 ㅁ의 형상을 만들어 내었다.

ㅁ, 脣音, 如彌字 初發聲 (ㅁ은 입술소리이니 미彌 자의 첫 발성과 같다).


술戌을 발음할 때 혀끝이 윗니 뒤쪽에 가까이 접근하면서 거기서 갈이소리(마찰음)가 나오고 있음을 알고,

ㅅ, 齒音, 如戌字 初發聲 (ㅅ은 잇소리이니 술戌 자의 첫 발성과 같다).


이처럼 ㅇ는 목구멍의 둥근 모양에서 따오는 식으로 자모를 하나씩 구성해 간다.

이렇게 ㄱ ㄴ ㅁ ㅅ ㅇ 등 5음의 기본 글자를 만들고 ㅋ ㄷ ㅂ ㅈ ㅎ 등으로 연계하여 닿소리 17자를 완성해 간다.

그 후에 된소리, 거센 소리, 탁한소리, 맑은소리 유성음, 무성음 등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정인지를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은 세종이 닿소리 17자를 완성한 사실에 놀라움과 부끄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입의 모양과 혀의 움직임을 본떠서 글자를 만든다는 착안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던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중성을 이루는 골격을 만들어 내야하는 과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즉 현대어로 치면 모음에 해당하는 것이다.


세종은 답답하고 터질 듯 한 마음에 문을 열고 겨울바람을 마시고자 한다.

그리고 눈 내리는 하늘과 전각의 지붕, 멀리 보이는 관악산의 봉우리를 쳐다본다.

세종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온다.

“하늘!”

“땅!”

“사람!”

하늘과 땅과 사람. 바로 우주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요소가 아닌가!

초성 17자를 만들 때 5행의 도에 따라 5음을 이루었듯이,

아~~라고 발음하며 ‘ . ’을 그렸다.

으~~라고 발음하며 ‘ -’를 그렸다.

이~~라고 발음하며 ‘ ㅣ '를 그렸다. 사람이 서 있는 모습과 흡사했다.

천, 지, 인의 세 글자가 완성되었다. 이제부터는 음양의 배합이 남았다.

먼저 하늘과 사람이 사귀는 형상으로, 사람의 형상인 ㅣ의 오른쪽에 ‘.’를 배합하여 맑고 고운 ‘아’를 만들고, ㅣ의 왼쪽으로 음성의 어두운 소리를 만들었다.

여기에서 겹친 가운뎃소리는 ‘아’에서 ‘야’를 만들고 ‘어’에서 ‘여’를 만드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종성인 끝소리뿐이었다. 이것을 해결하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모든 만물은 처음 땅에서 태어나서 땅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음양5행의 도에 따라 초성인 닿소리를 그대로 종성으로 삼았던 것이다.


1443년(세종25년) 12월 30일

세종은 마침내 언문(諺文) 28자를 만들고 이를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하며, 이는 글자 그대로 백성들을 가르치는 바른 글이라는 뜻이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3가지의 과제가 남아 있었기에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을 불러 후속 작업에 대한 지시를 내리고자 한다.

“가장 시급한 것은 새 문자를 만들게 된 동기와 그 사용법 및 원리를 밝혀내야 할 것이야. 이것을 밝혀내지 않으면 아무리 총명한 사람이라도 새 글자를 자유롭게 쓸 수가 없음이야. 그러나 용례 및 원리를 자세히 밝혀주면 둔한 사람도 열흘이면 능히 깨우칠 수 있을 것이야.”

“두 번째로는 각 지방마다 다른 방언을 수집하여 하나로 통일하는 일이야. 한 나라의 사람들이 서로 말을 다르게 쓰고 있음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방어를 하나로 통일한다면 백성들이 의견을 소통하는 데 불편이 없을 게 아닌가.”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 쓰는 한자음을 우리나라 말로 정리해보는 것이다. 두 번째 일이 우리나라 말의 음운을 정리하는 것이라면 이 일은 한자음을 정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세종은 훈민정음의 제작 원리와 해설은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상문, 이개, 이선로 등 문자 창제에 가담했던 학자들에게 위임했고, 우리나라 말의 음운과 방언 정리는 신숙주, 최항, 성상문, 강희안, 조변안, 손수산 등에게 맡겼다.

이 밖에도, 선왕들의 공적을 찬양하는 대서사시 <용비어천가>를 언문으로 짓게 하여 새 문자를 시험해 보고자 했다. 만에 하나라도 후일에 이르러 새 문자인 훈민정음과 또 그것으로 쓰인 전적들이 가해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까지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럴 경우 왕조의 창업과 선대의 위업을 그린 전적이라면 아무도 손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였다.


이렇게 3년의 세월 동안 훈민정음의 해례본을 완성하고자 노력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1446년(세종28년) 9월 28일 위대한 과업의 완성을 이루게 되었다. 감격에 겨운 세종은 직접 훈민정음의 서문을 쓰고자 한다.

“나랏〮말〯ᄊᆞ미〮中듀ᇰ國귁〮에〮달아〮

文문字ᄍᆞᆼ〮와〮로〮서르ᄉᆞᄆᆞᆺ디〮아니〮ᄒᆞᆯᄊᆡ〮...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서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않는 고로, 어리석은 백성들은 마음속의 일을 말하고 싶어도 마침내 그 뜻을 다 펴지 못하는 자가 많도다. 내가 이를 가엾이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뿐이다.“


이 대목에서 내가 생각하는 한글의 위대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본다.

1. 세계에서 유일하게 발명자와 창시자를 알고 있고 그 기록이 있는 문자이다.

한자와 알파벳을 누가 고안했는가?

2. 경음(ㄲ, ㄸ, ㅃ 등)과 격음(ㅋ, ㅌ, ㅍ 등)을 모두 자유롭게 표기할 수 있는 문자이다.

영어의 “T”가 가지는 음가(音價)는 “트”에 가깝지만 불어나 스페인어는 “뜨”에 가깝다. 이

를 문자로써 구별하여 표기할 수 있는 언어는 한글이 유일하다고 생각한다.

3. 이중 모음과 삼중 모음 등에 구애 받음 없이 세상 소리 모두를 글로써 나타낼 수 있다.

4. 소리 문자이기 때문에 전산 작업에 있어 중간 과정 없이 컴퓨터에 그대로 입력할 수 있다.


상상력으로 사물과 생각을 표현하는 미술,

생각과 사고를 표현하는 문학 작품들,

음계를 이용하여 마음을 전달하는 작곡 혹은 연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이런 사람들을 우린 천재라고 부른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 혹은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들을 기존의 도구나 음계나 악기를 이용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헌데, 소리로만 존재하는 말을 과학적으로 체계화하여 문자 자체를 만들어 내는 작업을 무어라 칭해야 하는 것인가? indescribable!

더불어, 우리가 매일 숨 쉬며 지내지만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고 있는 것처럼, 한글의 위대성과 고유 문자를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을 잊어버리고 사는 날들이 있다. 세종대왕에게 백배사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한글 창제로써 세종은 자신이 하고자 했던 3가지 큰 그림의 화룡점정을 완성한다.

세종은 문치를 통한 성군의 역할만 한 것이 아니었다.

1419년 대마도 정벌을 이룬 기해동정을 비롯하여, 1433년 최윤덕을 파견하여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을 정벌하여 4군(여연, 자성, 무창, 우예)을 설치하였고, 1434년 김종서를 통하여 두만강 하류 연해주와의 접경 지역에 6진(종성, 온성, 회령, 경원, 경흥, 부령)을 구축함으로써 평안도와 함경도에 걸친 즉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영토를 확정하였다.

세종은 22세에 보위에 올라, 30대에 들면서 여러 가지 질환으로 고통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집안 유전이라고 보여 지는 등창을 비롯하여 안질, 조갈증, 당뇨 등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한글 창제에 주력하는 기간에는 안질이 심하여 매일같이 고생을 하였으나, 막바지에 이른 한글 창제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고 전해진다.


세종의 치적을 하나씩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흐르는 큰 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박연을 통한 아악 정비,

조선 농토와 기후의 특수성을 감안한 농사직설의 편찬,

장영실에 힘입은 천문 지식의 독립성,

한자의 난해성을 타개하고자 몸을 던져 창제한 훈민정음 . . .

이 모든 것은 <<조선의 자주성>> 확보를 위하여 몸부림 친 세월이었고,

그것은 또한 위민애민(爲民愛民) 정신의 발현이었다.


*P/S

세자 향에 관한 언급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세자 향은 처음 결혼한 휘빈 김씨가 압승술등의 비방을 사용한 죄목으로 폐위되고 새로이 순빈 봉씨를 맞이하지만, 후궁인 승휘 권씨를 총애하기 시작한다. 순빈 봉씨는 정염과 질투가 매우 강한 여인으로 묘사되는데, 자신의 시녀인 소쌍과 동성애를 나누는 등 자신의 정염을 주체하지 못한다. 당시 궁녀와 나인들 간에는 동성애가 빈번히 있었으나 묵인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국모가 될 여인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까닭에 순빈 봉씨는 폐위되어 서인으로 폐출된다. 결국 승휘 권씨는 현덕빈의 지위에 오르게 되고 후일 단종이 되는 원손을 출산하지만, 하루 만에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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