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봉승의 실록대하소설 조선왕조 500년
제 7 권 [문종, 단종 1451~1453]
1450년 2월 17일
세종이 동별궁에서 승하하시니, 왕위에 계신 지가 32년이고, 나이는 54세였다.
세종에 관하여 조선왕조실록은 이렇게 적고 있다.
“임금은 슬기롭고 도리에 밝으매, 마음이 밝고 뛰어나게 지혜롭고, 인자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지혜롭고 용감하게 결단하며, 배우기를 좋아하며 게으르지 않아,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다...(중략)... 처음으로 집현전을 두고 글 잘하는 선비를 뽑아 고문으로 하고, 경서와 역사를 열람할 때는 매양 즐거워하여 싫어할 줄 모르고, 희귀한 문적이나 옛사람이 남기고 간 글을 한 번 보면 잊지 않으며....., 이웃나라 사귀기를 신의로써 하였다. 인륜에 밝았고 모든 사물에 자상하니, 남쪽과 북녘이 복종하여 나라 안이 편안하여 백성이 살아가기를 즐겨한 지 무릇 30여 년간이다. 거룩하고 덕이 높고 높으매, 사람들이 이름을 잣지 못하여 당시에 해동요순(海東堯舜)이라 불렀다....”
아무리 성군을 찬양하는 글이라 할지라도 이만하면 더 쓸 것이 없으리라.
성군이 승하하였다 하여 보위를 비워둘 수는 없는 법. 세자가 왕위에 오르니 춘추가 37세였고, 조선왕조의 다섯 번째 임금인 문종이 된다.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고 말이 적으며, 여색(女色)과 놀이와 구경 등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아버지 세종에 버금가는 성군의 자질이었으나, 등에 난 큰 종기는 악화 일로에 있어 거동마저도 자유롭지 못할 정도였기에 백성들은 한숨을 놓았고 중신들은 걱정했다. 게다가 원자(元子)의 나이 이제 겨우 열 살이었다.
문종은 병약한 몸을 이끌고 하루하루 정사에 최선을 다하고 경연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다. 주위에서 몸을 돌보는 것이 우선이라고 조언을 수시로 했으나 그는 왕으로서 해야 할 책무를 다 하고자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인명은 재천이라, 그의 재위 기간은 2년3개월.
1452년 5월 14일
문종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엄청난 아쉬움을 남기고, 39세의 나이에 떠나가니 애석함을 넘어 정국은 불안과 동요가 시작되고 있었다.
문종의 승하와 동시에 그를 보좌하는 신하들 모두가 엄청난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다. 그것은 망발에 가까운 것이었고 불충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문종의 승하 이후 보위를 비워두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자그마치 나흘 동안이었다.
보위를 비워놓고서야 종사가 성립할 수 있을까. 임금이 없는 나라가 있을 수가 있는가. 임금이 승하하면 촌각을 다투어서 다음 임금이 즉위해야 한다. 여기에는 이유도 까닭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종이 승하한 14일부터 17일까지 새 주상이 보위에 오르는 즉위식은 전혀 없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이가 시사 하는 바는 향후 정국의 전개에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문종의 동생 수양대군이 의정부 문짝을 차듯이 밀고 들어와, 보위가 비워 있음을 지적하고 일갈 노성을 지르고 있음에도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는 물론이요, 정인지를 비롯한 6판들도 숨을 죽이고만 있었다고 한다.
왕의 친척은 종사에 관여할 수 없다는 원칙에 따르면, 수양대군의 이 같은 행동은 비난을 살 여지가 많았지만, 중신들은 허리를 굽히며 송구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즉위식을 늦춘 것은 그만큼 잘못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나흘간이나 즉위식을 이행하지 않고 있었을까?
이 대목에서 내 머리 속에 영화 ‘반지의 제왕’이 불현 듯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절대 반지를 손에 쥐는 자는 그것이 파괴되어야 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한번 쯤 손가락에 끼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다음 임금이 10살 박이 어린아이라는 사실에 권력을 쥐고 있던 중신들은 절대 반지가 손에 주어지자 ‘유혹’이란 늪에 빠져 자기네들에게 유리한 모종의 타협점을 찾고자 하지는 않았을까?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한다.
세종대왕 30년 통치 기간 동안 태평성대를 누린 조선은 문종과 단종의 즉위를 기화로 역사상 가장 격동적이고 드라마틱한 시국으로 빠져든다.
이 한 편의 역사적 드라마는 기저에 깔린 배경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우선적으로 파악해야 하는 것이 조선은 이성계에 의한 역성혁명으로 만들어진 나라이고, 북방 무인 계급과 신진사대부들이 주축 세력이었다. 그렇기에 국가의 새로운 이념과 국정 운영에 있어 신하들의 능력에 많은 것을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면이 있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대표적인 예가 삼봉 정도전과 태종 이방원의 대립이었다.
세종 때에 있었던 대표적인 갈등이 훈민정음 창제와 보급에 있어 최만리와 그를 따르는 유생들의 집단적 항거 등을 들 수가 있다.
단종의 시대에 있어 절대적 권력을 갖고 있던 의정부 3인(황보인, 남지, 김종서)과 제 1 왕숙인 수양대군간의 갈등은 정치적 주도권을 누가 갖느냐는 파워 게임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단종이 보위에 오르는 순간부터 항간에는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중 누가 실질적인 왕이 될 것인가를 두고 말들이 많았다. 왜냐하면 단종의 생모인 현덕빈 권씨가 출산 직후 타계를 했고 문종은 다른 여인을 배필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중전이 없는 상태였다(후궁은 왕이 죽으면 궐밖으로 나가는 것이 상례이고 수렴청정을 할 지위를 부여받지 못함). 즉 어린 단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할 인물도 없고, 문종이 임종할 때 섭정을 지시한 바도 없기에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아이가 왕위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꼴이 된 것이다.
수양대군은 문무를 겸한 인물로서 태종 이방원의 기질을 많이 닮아 직설적이고 호방하며 그 기상이 매우 높고 결단력이 있었다.
반면에 안평대군은 보다 부드러운 성격에 글과 서예에 조예가 깊고 풍류를 즐기는 등 문객들이 연일 찾아 들었다고 한다.
단종의 즉위식이 끝나고, 조정의 대소사는 모두 황표정치(黃標政治)라 일컫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섭정이 없는 관계로 단종의 재가를 받아야 하는데, 의정부에서 인사 등의 문제가 있으면 3배수로 올리면서 그 중에 노란색 점을 찍어 두면 이를 단종이 재가하는 형태를 의미한다. 의정부의 결정에 따르는 꼭두각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형태였다. 게다가 생모인 현덕빈 권씨 사망 이후, 세종은 후궁 중의 한 명인 혜빈 양씨에게 갓 태어난 단종의 육아를 의탁하였는데 단종은 할머니뻘인 세종 후궁의 손에서 자라게 된 것이었고, 혜빈 양씨는 세종 사후 궐 밖으로 나갔어야 했으나, 단종을 보육하는 관계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실질적인 어미의 역할을 하면서 의정부 중신들과 뜻을 맞춰 가고 있었다.
이 중에서 김종서는 안평대군과도 관계를 긴밀히 가져가면서 아주 조심스럽게 단종이 성인이 될 때까지 섭정의 역할을 제안하는 詩를 건네기까지 한다.
안평대군은 그에 대한 화답으로 한 폭의 그림을 전달하는데, 바위를 뚫고 솟아오르는 난초로 자신의 심정을 표현함으로써 두 사람은 의기투합을 하게 된다.
그리고 김종서는 영의정 황보인과 함께 안평대군과 손잡을 것을 약조하고, 안평대군은 혜빈 양씨와 밀담을 진행한다. 그리고 김종서의 최측근인 이징옥은 함길도 절도사임에도 병기를 경성으로 밀반입시키는 작업을 진행한다.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중신들의 입장에서는 강직하고 권력욕이 있는 수양을 택하느니, 제 2 왕숙이지만 안평과 손잡는 것이 명분과 함께 배후 조종하기에 수월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움직임을 대략이나마 파악한 수양대군은 측근인 권남을 통하여 난관을 수습할 책사를 물색할 것을 종용한다. 이때 등용되는 자가 바로 권남과 동문수학한 한명회이다.
한명회는 전형적인 파락호(破落戶 : 행세하는 집안의 자손으로 허랑방탕하여 아주 결딴난 사람)로서 뼈대 있는 가문의 자손이지만, 꿈과 이상을 좇아 거의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때를 기다려 온 인물이다. 그가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것은 태재 유방선(柳方善)의 문하에서 서거정, 권남 등과 더불어 글을 배운 일밖에 없지만, 일사천리의 언변, 타고난 머리 회전과 기회 포착 본능, 기민한 문제 해결 능력으로 한명회는 첫 눈에 수양대군의 맘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수양대군은 한명회를 장자방(한무제 때의 장량)에 비유하며 자신의 책사로 등용한다.
이 때부터 한명회는 물 만난 고기마냥 모사꾼의 기질을 최대한 발휘하는데, 그는 세종 사후에 전개될 시국을 정확히 읽어내고선 안평대군을 접할 기회도 가지고 수양대군도 만나 둘을 놓고 저울질한다. 안평대군의 지나친 여성 편력과 왕숙으로서 현실에 안주하는 모습에 실망을 하고 수양대군과의 극적인 만남을 고대하며 시간을 보낸다.
운명적 만남이란 시운이 닿고 상대적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질 때 불꽃이 이는 법이다. 수양대군과 한명회의 만남은 바로 이런 경우일 것이다.
단종의 즉위 이후 고명(誥明) 사은사(謝恩使)를 정하는 문제가 조정의 큰 이슈가 된다.
사은사로서 명나라에 간다는 것은 조선을 대표하는 일일 뿐 아니라 명나라로부터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은 조선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린 단종이 즉위한 상황이고 김종서를 비롯한 중신들이 왕실을 배척하고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정국에서, 제 1 왕숙의 입장에 있는 수양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때 한명회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처방책을 뚝딱 내어 놓는다.
우선 집현전 학자 중에서 가장 유순하고 시대에 순응하는 성격의 정인지를 병조판서로 임명하여 김종서의 손아귀에 있는 병권을 무력화시키고자 한다. 그리고 신숙주를 사은사를 보좌하는 상서관으로 지명하여 약 4개월간의 여행길을 동반하도록 한다. 즉 수양대군이 사은사로서 취할 수 있는 대내외적인 메리트를 최대한 누리고(*태종 이방원 또한 고명 사은사로 가서 황제를 배알하고 자신의 기상을 유감없이 발휘함으로써 명성과 입지를 단단히 한 경우가 있었음), 어수선한 시국이지만 병권을 확실히 틀어막아 약 4개월간 벌어질 수 있는 돌발 상황을 미연에 방지한다.
게다가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 황보인의 아들 황보석을 사은사의 종사관으로 지목하여 동행토록 한다. 즉 조정의 실세인 김종서와 황보인의 자식들을 인질로 데려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숙주를 상서관으로 데리고 가서 수양의 사람으로 확실히 박음질을 하도록 한다. 그동안 자신은 정인지를 최대한 포섭하여 향후에 있을 계획을 준비하도록 한다는 안을 내놓자 수양은 일을 이처럼 쉽게 처리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며 한명회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시작한다.
더불어 한명회는 거사(擧事)에 필요한 무력 배양을 차질 없이 준비하는데, 신분 고하에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려 지낸 파락호 시절 동안 알아 둔 홍윤성, 양정, 홍달손 등을 자기의 사람으로 만들어 두는데 이들은 수양대군의 측근들과 함께 중대한 역할을 맡게 되고 후에 홍윤성은 예조판서와 우의정의 지위에 까지 오르게 된다(예종 때는 영의정이 된다).
수양대군이 명나라에서 사은사로서 활약을 하는 동안 조선에는 김종서와 황보인이 정인지를 찍어내기 위한 작업을 한다.
먼저 시비가 붙은 것은 금군(禁軍 : 궁궐을 지키는 왕의 친위대)을 중신들의 사저를 개축하는 노역으로 부리는 병폐를 정인지가 지적하고 나온 것이다. 이에는 김종서와 황보인의 가택도 포함이 되어 있었고, 그렇지 않아도 눈의 가시인 정인지를 두 사람이 합심하여 한직으로 내려 보내고 자신들의 측근을 병조판서로 임명해버린다. 이 같은 조치는 당대 최고의 석학이자 명성이 자자한 정인지를 스스로 내친 결과가 되고, 나중에는 정인지가 수양과 사돈까지 맺게 된다.
이는 중신들이 제 1 왕숙인 수양대군의 인사 조치에 대한 도전이자 왕실에 대한 항명으로 해석될 수 있는 바였다. 이 같은 일의 수순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한명회는 정인지에게 접근하여 그를 자연스레 수양대군에 가담하게 만들어 버린다.
사은사의 역할을 마치고 귀국한 수양대군은 그 위세가 대단하였고, 한명회는 신숙주로 하여금 갖은 미사여구로 수양의 활약상을 과대 포장하여 궁내는 물론 장안에 소문이 돌게 금 유도한다. 여론전에서 수양은 안평과 김종서에 대하여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는 셈이다.
예를 들면 명나라에서 처음으로 코끼리를 보러 갔는데 수양대군이 나타나자 그 큰 코끼리가 수양의 기상에 눌려 뒤로 주춤하더라는 둥 . . .
물론 과장인 줄 아는 얘기지만 신숙주란 인물이 누구인가?
세종 때 한글 창제를 위하여 명나라를 15번이나 다녀오고 왜구와 만주 야인들이 쓰는 언어에도 능통한 천재 중에 천재가 묘사하는 것임에 누가 감히 토를 달겠는가?
이 모든 일련의 작업은 한명회의 치밀한 간계에서 비롯되었음은 당연하다 하겠다.
다음으로 단종의 실질적인 어머니 혜빈 양씨는 김종서를 비롯한 중신들과 투합이 되어 있었고, 단종을 자신의 치맛바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가스 라이팅에 가까운 정신적 지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으며 중전도 아니면서 내명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한명회는 잔꾀를 낸다. 단종의 생모 현덕빈 권씨와 함께 세자(문종)의 승휘로 입궐한 홍씨가 문종이 즉위하자 귀인 홍씨로 승격되어 있었다. 이에 귀인을 빈으로 승격을 시키면 족보상으로 단종의 어미가 되면서 상궁 나인들을 모두 총괄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다. 중전에 버금가는 자리가 된다.
이는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가 단종을 보육했다는 명분만으로 유지하고 있는 자리를 원천적으로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즉 대비도 아닌 세종의 후궁이 상궁과 나인 모두를 통괄하는 것은 편법도 아니고 명분이 없다는 논리였다.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기가 막힌 발상이었다.
결국 김종서, 황보인, 안평대군, 혜빈 양씨로 이루어진 연합군은 한명회 하나를 당하지 못해 수세에 몰리게 되는 지경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결정적으로 사태를 촉발시킨 것은 단종의 중전 간택 문제였다.
대비마마도 없는 상황에서 단종의 중전 간택은 왕실의 안정과 번성을 위하여 매우 중요한 안건이었다. 그러나 중신들은 한사코 문종의 상중이라는 구실로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규범상으로는 국상 중에 간택하는 것이 어긋나는 일이다. 하지만 소위 권제라고 해서 형식적으로 위법이 될지라도 국익을 위해서는 시행하지 않을 수 없을 경우 권제라는 방식으로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수양의 간청이 통하지 않자 그는 연속 3차례에 걸쳐 주청을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왕실의 종친 70여 명의 연명으로 된 봉장(封章)을 올렸으나 이 또한 허락되지 않았다.
이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왕실과 중신의 기세 싸움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와중에 한명회는 방안에 틀어 박혀 며칠 동안 두문불출을 한다.
그리고 며칠간 묵상 끝에 그는 수양을 찾아가 불쑥 소책자를 꺼내 놓는다.
제목은 생살부(生殺簿)였다. 그 첫장에는 김종서, 다음으로 황인보, 그리고 안평대군. . . .
수양대군에게 마음의 결심이 서면 생살부를 자신에게 돌려 달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 선다.
수차례에 걸친 중전 간택이 불발되고 종친의 연명으로도 허락되지 않는 것은 수양에게 분노와 함께 좌시할 수 없다는 결행의 의지를 불태우게 한다.
“종사가 이씨(李氏)의 나라거늘. . . 어찌 황보가나 김가가 종사를 좌지우지 하는가. 그들은 파당을 짓겠지. 권무세도의 전횡... 마침내 임금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되고...”
1453년 10월 10일
결국 수양은 한명회가 만든 생살부의 실행을 결단한다.
구체적 실행 안은 당연히 한명회의 머리에서 나온다.
1. 김종서의 주살. 이 일은 수양대군이 맡아서 해야 한다.
2. 도성 8대문의 확보. 이 일은 홍달손에게 맡긴다.
3. 주상을 모신다. 수양대군이 맡는 것이 안전하다.
4. 중신들의 소환과 주살, 이것은 한명회와 홍윤성이 관장한다.
홍달순은 사전에 궁궐의 순시감으로 입궐하여 있었고 그가 감순(監巡)하는 당번 날에 맞추어 거사일을 정한 것이었다.
계유년 10월 10일 늦은 밤.
수양대군은 부하들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을 향한다.
이렇게 계유정난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단종의 즉위를 나흘간 미뤄뒀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P/S
한확(韓確)이라는 인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록 족보상으로는 청주 한씨 한명회와 9촌 관계이지만 전혀 연관이 없이 성장한 인물이다. 태종 때 명나라에 바치는 공녀로 불행히도 자신의 누나가 선발되었지만, 명나라 성조(成祖)의 후궁인 여비(麗妃)로 책봉되자 명나라의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에 제수되었다. 1424년 명나라 성조가 북정(北征) 중 유목천(楡木川)에서 죽자 여비도 자결하였다. 그러자 명나라에서는 또 그의 누이동생을 선종(宣宗)의 후궁으로 간선하였다. 명나라의 공직을 제수함과 동시에 그는 조선의 외교의 민감한 문제를 도맡아 처리한 인물이었고, 수양대군과 사돈을 맺어 후에 인수대비(성종의 어머니)의 아버지가 된다. 공정한 인품으로 이조판서와 우의정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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