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봉승의 실록대하소설 조선왕조 500년
제 9 권 [설중매 1460~1478]
궁을 나온 수빈 한씨(한확의 딸)는 세조가 한명회의 셋째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했다는 소식에 한명회의 집을 방문한다.
자신의 동서가 될 소녀 냉이를 만나 궁중 생활에 대한 법도와 예절, 세자빈으로서의 처신 등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그 자리에서 냉이의 동생 송이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수빈 한씨는 송이를 보자마자 미래 자신의 며느리 감으로 생각을 해본다.
“다섯 살이면 우리 막내와 좋은 짝이 될 만 하군요.”
수빈의 막내는 이름이 혈이라 하고, 후에 자산군이 되며 성종이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함께 한 시간은 우연찮게도 3대의 왕비가 한 자리에 앉아 있는 셈이었다.
수빈 한씨는 추존왕이 되는 덕종의 왕비 소혜왕후이자, 인수대비가 되는 분이요, 열 여섯 살의 냉이는 예종의 추존 왕비인 장순왕후가 되며, 다섯 살의 송이는 성종의 첫 번째 왕비, 공혜왕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냉이와 송이는 족보상으로는 숙질간의 혼인이 된다.
3대 왕비가 모두 청주 한씨로 이루어짐은 한확과 한명회의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확은 누나와 누이 모두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 되었고, 그로 인해 명나라의 관직을 제수받은 사람이다. 당시 조선 외교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고, 한명회는 수양을 오늘의 왕으로 만든 책사로서 실세 중의 실세라 할 수 있다.
병자옥사도 지나고 노산군(단종)에 대한 아픈 기억도 아물어 가는 등, 세자빈의 책봉으로 태평스런 분위기가 조성될 무렵, 국경에서는 야인들의 도발로 정세가 매우 어지러워졌다.
간단히 요약하면, 야인들의 부족 중 올적합과 올량합이 서로 반목하여 싸우는 통에 조선의 국경을 넘어와 그 피해가 적지 않았고, 그들은 또한 명나라로부터 벼슬을 받은 상태인지라, 조선에서 관직을 주고 회유하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상황이었다. 명으로서는 야인 족들을 이용하여 조선이 북으로 팽창하는 것을 견제하는 일종의 완충 지역으로 유지코자 하는 의도가 다분했다. 명으로서는 조선과 야인 무리들을 화해시켜 만주 지역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보는 것이지만, 조선의 입장에서는 야인들의 반복되는 도발로 4군 6진의 유지조차 힘들 수 있는 지경에 이를 수 있는 일이었다.
고구려 땅의 회복을 위한 북진을 항시 염두에 두고 있는 세조로서는 명의 지시를 순순히 따를 수 없는 것이었고, 명의 지시를 거절하기도 힘든 애매한 입장이었다.
그는 밤을 새워 고민하기를 ‘명의 화해 종용을 따르는 체하면서, 한편으로는 야인들의 불온한 무리들을 일시에 섬멸해버리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명의 칙사가 상기와 같은 내용의 칙서를 들고 내려오는 와중에, 신숙주와 홍윤성 그리고 양정을 파견하여 전광석화 같은 야인 정벌의 작전을 개시한다.
그리고 전선이 확대가 될 경우를 상정하여 한명회를 평안도로 파견하여 후방을 든든하게 지킨다는 작전을 수행한다. 그의 가까운 측근들을 모두 투입하는 작전이었다.
야인 정벌을 완료한 후에 명나라에 사후 보고를 하겠다는 배짱이었다.
신숙주는 군사 운용에도 기민함을 보여 혁혁한 성과를 내며 야인 토벌에 성공을 한다.
이에, 세조는 황해도와 평안도의 순행(巡行)을 하기로 결심한다.
역대 어느 임금이 야인을 정벌하고 서도를 순행했던가!
변방의 안정은 바로 내정에 전념할 수 있게 하기에 그 의미는 남달리 컸고 세조가 이룬 가장 큰 치적 중의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조는 내정에 힘을 쏟아 6조의 직계제를 부활시켜 왕권을 강화하였고, 호패제를 통한 전국의 방위체제 수립, 경국대전의 편찬, 과전법(科田法)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하여 과전을 폐하고 직전법(職田法)을 실시, 현직자에게만 토지를 지급하여 국가재정을 절약한다.
세조와 함께 한명회에게 드리워진 가장 큰 먹구름은 자식들의 요절이었다.
세조의 큰아들은 세자 책봉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요절(후에 덕종으로 추존)을 했고, 그 뒤를 이은 동생 예종 또한 20살을 넘기지 못했다.
예종이 세자 시절 세자빈으로 간택된 한명회의 둘째 딸 냉이는 세손을 생산하지만 출산 후 5일 만에 1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후에 장순왕후로 추증). 그리고 세손 또한 1년이 채 못 되어 곁을 떠난다. 결국 돌고 돌아 세자의 자리는 자산군(성종, 덕종의 작은 아들)의 차지가 되지만, 중전이 되는 한명회의 넷째 딸 송이 또한 자리를 오래 지키지 못하고 19세의 나이로 명을 달리한다(후에 공혜왕후로 추증).
세조의 두 아들과 한명회의 두 딸은 공히 20세를 넘기지 못 하고 요절을 하는 운명을 맞이한다. 권세와 부귀영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세조는 피의 대가로 얻은 왕위인지라, 주변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한다. 특히 이시애의 난에 있어, 이는 길주의 지방 호족인 이시애가 조정의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체제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반란인데, 이시애는 자치 생활에 익숙한 북방 민들의 불만을 등에 업고, 도성에 유언비어를 퍼트려 조정 내분을 유발한다. 그 내용은 “함길도 절도사 강효문이 도성에 있는 신숙주, 한명회 등과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시애는 “신숙주 한명회와 결탁한 강효문이 반역을 꾀하고 있으므로 이를 살해했다. 지금 함길도의 민심이 흉흉하니 함길도 사람으로 고을의 수령을 삼아주기 바란다”는 상소를 올리기에 이른다.
세조는 이 같은 농간에 말려들어 신숙주와 그의 아들을 의금부에 하옥시키고, 병을 앓고 있는 한명회를 사저에 연금을 시킨다.
그리고 왕실의 종친인 귀성군 준과 남이 장군, 유자광에 의존하며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도록 한다.
난의 진압 후에 세조는 신숙주와 한명회를 방면하지만, 이는 세조가 말년으로 가면서 정신 쇄약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1468년 9월 7일
세조는 예종에게 양위를 알리고 즉각 즉위교서를 반포하게 한다.
그리고 다음 날 9월 8일 세조는 52세의 나이로 훙어(薨御)하였다.
세종 사후의 난국을 수습하고 성종조의 태평성대를 받침 하는 주춧돌이 되었다는 것과 강력한 왕권을 구사했던 세조의 시대가 막을 내린다.
경기도 양주 땅에 장사지내고, 능호를 광릉이라 한다.
제 8대 왕으로 보위에 오른 예종은 춘추 19세였다.
당시 정인지, 정창손, 신숙주, 한명회와 같은 원로 중신들은 이미 뒷자리에 물러나 있었고, 세조가 임명한 30대 영의정 귀성군 준이 어린 예종을 보필하기에는 힘에 겨운 상황이었다.
원로들로 구성된 원상(院相)제도를 만들었지만, 세조가 신진 세력으로 힘을 실어준 귀성군 준, 남이 장군, 유자광 3인이 조정의 핵심 인물이었는데, 유자광은 세조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예종에게 남이 장군의 역모를 들어 그를 고변하기에 이른다.
남이 장군은 한명회의 가장 친한 친구 권남의 사위인데, 권남은 죽기 전 한명회에게 남이의 괄괄한 기질과 오만한 성격을 지적하며 남이에 대한 보호를 각별히 부탁한 바 있었다.
남이가 함길도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러 갔을 때 지었다는 시가 있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닳아지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말렸네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편히 하지 못하면(男兒二十未平國)
훗날에 그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유자광의 고변에 따르면, 상기 시에 있어서 미평국(未平國)이 아니라 미득국(未得國: 나라를 얻지 못하면)이라 하여 역모에 해당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남이는 28세의 나이로 차열을 당하고, 한명회는 달리 손 쓸 도리가 없어 권남에게 사죄의 잔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1469년,
예종의 단명은 또 한 차례 정국을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게 만든다.
세조가 죽고 1년 만이다.
후계 구도에 있어 예종의 아들은 4살이라 수렴청정도 어려운 상황이고, 결국 예종의 형 의경세자(덕종)의 자손 중에서 물색을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큰 아들이 월산군, 작은 아들 자산군. . .
월산군은 어려서부터 병이 잦았고, 자산군이 어리기는 하나 세조가 일찍이 그 도량을 칭찬하였던 터라 자연스레 자산군으로 의견이 모아졌고, 더불어 한명회는 국구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13세의 자산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니 이가 바로 성종이다.
원로들로 이루어진 원상이 정사를 보위하고, 세조비 윤씨(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는데, 조선 역사 최초의 청정이 결정되었다.
진시에 예종이 붕어하고, 사시가 채 지나기 전에 자산군의 즉위와 태비의 청정이 결정되었으니 순식간의 일이자,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조치였으니 이는 바로 한명회가 복안을 세워 두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 번 한 시대가 그의 손바닥 안에서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더불어 성종 초기에는 대비가 많았는데, 세조비 정희왕후가 대왕대비요, 예종비 안순왕후가 왕대비, 그리고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왕후가 대비, 성종비인 공혜왕후가 중전이었으니 절대 흔하지 않은 일의 하나였다. 바야흐로 여인천하의 시대가 다가오는 것이었다.
내명부(內命婦).
품계가 있는 궁중의 여인들을 이르는 말이다. 빈(嬪)에는 무계와 정1품이 있고, 종1품이 귀인(貴人), 정2품이 소의(昭儀), 종2품이 숙의(淑儀), 정3품이 소용(昭容), 종3품이 숙용(淑容), 정4품이 소원(昭媛), 종4품이 숙원(淑媛)이다. 모두 임금의 후궁들인데, 임금의 은총이 더해지면 마치 사대부들의 승진처럼 품계가 높아지고 임금의 핏줄을 생산하게 되어서야 귀인을 거쳐 빈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정5품에서 종9품에 이르는 수많은 상궁들도 내명부에 해당되는데, 임금의 사랑을 받기 위한 내명부간의 모함과 투기를 투총이라 한다.
성종비 공혜왕후 한씨(한명회 딸)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 서서히 내명부의 기강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성종이 즉위한 이후 원상들의 노련한 행정력에 힘입어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는 시기에, 내명부 후궁들의 사랑싸움은 비어있는 중전의 자리를 향해 거세게 불타고 있었다.
특히 숙의 윤씨, 소용 정씨, 소용 엄씨 간의 3파전은 음모와 모략, 요상한 도술 등으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전개되고 있었다.
숙의 윤씨가 성종의 원자를 임신하면서 중전으로 간택이 되고, 곧바로 아들을 순산하는데 이가 후에 연산군이다. 그러나 중전 윤씨는 자신과 아들을 소용 정씨와 소용 엄씨가 해칠 것을 염려하여 그들을 미리 제거 하고자 비상을 챙겨두거나 비상을 바른 곶감을 장만하여 두기도 한다. 심지어 굿을 하는 방법을 적은 서책도 소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성종에게 이 같은 행각이 발각이 되고, 성종은 이때부터 중전 윤씨를 멀리 하기 시작한다. 2년의 시간이 흘러 중전 윤씨가 생일을 맞는 날 성종은 다른 후궁과 시간을 보낸다. 화를 참지 못한 윤씨가 후궁의 방으로 침입하여 그간 성종의 홀대와 쌓인 앙심을 터트리며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성종의 용안에 상처를 입힌다.
화가 극도로 치민 성종이 중신들과 중전 윤씨에 대한 징계를 논하고 있을 때, 소용 엄씨는 중전 윤씨가 벌인 것으로 보이는 칼을 꽂은 인형(엄 소용과 정 소용)들을 그간 감추고 있다가 결정적인 증거물로 제시한다. 마침내 중전 윤씨는 자신의 생일 바로 다음 날 폐비가 되고 서인의 신세로 사저로 내쳐진다. 후궁간의 암투에서 최후 승리자이자 된 중전 윤씨는 세자의 모후, 그리고 대비까지 이어지는 탄탄대로를 손에 거의 잡았다가 놓친 결과가 되어 버렸다.
시국이 태평한 반면, 궁내는 사랑싸움으로 연일 어지럽기만 하다.
하늘은 인간을 호락호락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 법이다.
*P/S
세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보기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것인가? 왕실의 보존을 위한 구국의 일념이었나? 일견 겉으로 보면 왕위 찬탈이라고 한 줄로 요약하면 간단하겠지만, 내면을 보다 세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단종이 계속 왕위에 있었다면 혜빈 양씨를 비롯하여 김종서, 황보인, 그리고 안평대군의 손아귀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세조만큼 뚝심을 갖고 명나라와의 외교적 교섭과 야인 정벌 등을 과감히 진행할 수 있었을까? 나이든 김종서는 뇌물과 자식 승진에 관한 고변을 수차례 당한 바 있고 황보인과 함께 금군(禁軍)을 동원하여 사저를 증축하느라 정인지로부터 지적까지 받은 사람이다. 또한 안평대군의 왕재로서의 자질은 논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변방의 위협으로부터 분신과도 같은 수하들을 일사분란하게 지휘하여 국경 지대를 사수한 것은 왕재의 자질이 있었던 세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평가한다. 세조에 대한 평가는 각자의 몫이다.
------ 조선왕조 500년 9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