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500년 제 10 권

by 이병철


신봉승의 실록대하소설 조선왕조 500년

제 10 권 [사모곡 1479~1499]


마침내 중전 윤씨가 폐비가 되지만, 이것으로 내명부의 암투가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엄 소용은 폐비 윤씨의 시복이었던 홍이가 저지른 소소한 비리를 잡아내고 이를 기화로 홍이를 통하여 폐비 윤씨에게 공작을 펼친다.

그 이유는 폐비 윤씨가 낳은 원자가 세자가 되는 날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홍이는 사저에 있는 폐비 윤씨를 찾아가 중전으로 복위할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식으로 충동질한다. 이에 윤씨는 소복으로 정죄를 하고 있어야 할 상황임에도 몸단장을 하며 성종의 부름을 준비한다. 더불어, 자신의 동생인 윤구, 윤우, 윤후와 협잡하여 조정 관료들을 접촉하게 하고 도성 내에 폐비의 억울함과 복위의 당위성을 의미하는 소문을 퍼트리는 작업을 진행한다.

이 같은 행위는 성종의 의지와는 정 반대인데, 성종은 오히려 윤씨의 소행을 미루어 짐작하여 조신하게 처신할 것을 당부하는 언문으로 된 교지를 반복해서 내리곤 한다.

엄 소용과 정 소용은 재차 의기투합하여 폐비에 대한 견제의 끈을 늦추지 않는다.

이런 와중에 폐비 윤씨는 자신의 아들 원자 이융이 궐 밖 출입을 하리란 정보를 받아 먼발치에서나마 원자를 보고 싶은 마음에 변복을 하고 사저를 벗어나 외출을 한다.

인수대비와 성종은 폐비 윤씨에 대한 함구령을 모든 신하에게 엄중히 내린 바 있고, 이를 발설할 시에는 중형에 처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렇기에 폐비 윤씨의 바깥출입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짓이었다.

소식을 접한 성종은 폐비 윤씨 사저 근방에 있는 주민들을 줄 소환하여 심문을 하고 폐비 윤씨의 반복된 외출을 확인한다.

이에 성종은 고뇌 속에서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린다.

성종이 내린 교지는 아래와 같다.

“원래 성품이 흉악하고 위험해서 행실에 패역함이 많았다. 그래서 과인을 노예와 같이 대우하며, 심지어는 발자취까지도 없애버리겠다고 말하였으나 이러한 것은 자질구레한 일이므로 더 말할 것도 없다....항상 독약을 스스로 가지고 다니면서 혹은 가슴속에 품거나 혹은 상자 속에 간수하기도 했으니, 그가 시기하는 사람을 제거하려는 것뿐만 아니라 장차 과인에게도 해로운 것이다....오히려 대의로써 차마 단죄하지 아니하고, 다만 그를 폐비하여 서인으로 삼아 사제에 있게 하였다....이는 비록 지금은 그리 깊이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지마는, 후일에 있을 화를 어찌 이루 다 말하겠느냐! 그가 만일 흉악하고 위험한 성격으로 임금의 권세를 잡게 되면, 원자가 현명하더라도 그 사이에서 어떻게 하지를 못하여서 발호하는 뜻이 날로 더욱 방자하여질 것이다. 그리하여 한나라의 여후와 당나라 무후의 화를 열망하여 기다리게 될 것이니 나의 생각이 여기에 미친 것이 참으로 한심하다......이에 금년 8월 16일에 그 집에서 사사한다. 이는 종묘와 사직을 위하는 큰 계책으로서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후는 여태후, 무후는 측천무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폐비 윤씨는 사약을 받았지만, 비어있는 중전의 자리는 조신한 처신으로 일관한 다른 후궁 윤 숙의의 차지가 되고, 엄 소용과 정 소용의 그간의 계략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그리고 3번째 중전(한명회의 딸, 폐비 윤씨 이후)이 된 윤씨는 지극 정성으로 원자 이융을 보살피고, 원자는 윤씨가 생모인 줄 알고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새로이 중전이 된 윤씨가 생산한 아들이 진성대군이고, 후에 중종이 된다.


한편, 세월은 흘러 1487년(성종18년), 한명회는 73세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그는 성종에게 “시근종태(始勤終怠)는 인지상정이나, 원컨대 종신(終愼)할 것을 여시(如始)하소서(시작할 때는 근면하나 끝날 무렵에 태만해지는 것이 사람의 상정이다. 전하께서는 끝끝내 처음의 시작처럼 삼가소서)”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과 하직한다.

정계의 표면으로 부상해서 죽음에 이르는 세월이 삼십 수 년, 단종부터 성종까지 4대의 왕을 거치면서 한 시대를 풍미한 한명회. 그 긴 세월을 한결같이 권부의 정상에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단순히 간신으로 평가되는 현실과 엄연한 거리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한명회의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명회의 죽음 이후 7년이 지나 성종은 불현 듯 심신의 나른함을 느끼더니 자리에 눕는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눈을 감았다. 춘추 38세, 실로 아까운 나이였다.

성종의 치세는 곧잘 세종의 태평성대와 비교되곤 한다. 비록 폐비 윤씨의 사사와 같은 불미한 일은 있었다고 해도 정치, 사회적인 안정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고, 특히 문화적인 면에서의 업적은 대단한 것이었다.

독서당을 두어 학문을 장려한 덕으로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동문선과 같은 명서가 나왔고, 교서관(校書館)에 명하여 수많은 전적을 간행하게 했다. 조선왕조의 통치대전이라 불리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개정과 교정을 거쳐 시행하였으며, 정착되게 한 것도 성종 시대의 일이었다.

어미인 인수대비는 망연자실했다. 그녀도 어느덧 58세에 이른다.

“춘추 한 창이 아니십니까, 주상! 스무 해만 더 살았어도...” 라고 홀로 되뇐다.

그렇다. 성종의 치세가 20년만 더 이어질 수 있었다면 조선왕조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생전 폐비 윤씨와 관련하여 성종은 성종 20년에 “폐비의 무덤을 윤씨의 묘라 칭하고 속절에 제사를 지낼 수 있게 하되, 다만 이 명은 100년 뒤에도 고치지 못할 것이니라!”는 영을 예조에 내린다. 그리고 수여백년지후(雖予百年之後) 영불개역(永不改易) 이준부지(以遵父志) 라는 유지를 미리 남겨두었다. 그 뜻은 “비록 내가 죽은 후 100년이 지날지라도 아버지의 뜻을 영원히 변경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성종은 승하한 지 다섯 달 만에 광주 땅에 묻힌다. 능호는 선릉(宣陵), 지금은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하고 있다.


1494년 성종의 뒤를 이어 세자 이융(연산군)이 19세의 나이로 그 뒤를 잇는다.

연산군은 세자 시절부터 할머니인 인수대비로부터 지나칠 정도로 혹독한 교육을 받으며 자라는데, 이는 어미인 폐비 윤씨의 비극적인 사건으로 말미암아 더욱 그녀로 하여금 집착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왕재로 다듬고자 기우린 노력은 오히려 세자 이융을 정서적으로 불안하게 만들었고 차후에 심각한 성격 장애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시작부터 공신으로 이루어진 훈구파와 유교 사상으로 무장된 사림 간의 갈등 구조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찾고자 많은 고민을 한다.

이런 와중에 성종실록 편찬에 관한 사초가 문제가 된다.

사건의 발단은 김종직이 작성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문제가 되는데, 그 내용은 항우에게 살해당하여 물에 던져진 회왕 즉, 초나라 의제를 추모하는 글이며, 이는 세조가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죽게 한 것을 비꼬는 것으로 여겨질 소지가 다분한 것이었다.

이는 왕실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인한 비방으로서 김종직은 물론 사초에 담은 김일손 등 유림의 영남학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기에 이른다. 이를 무오사화(戊午士禍)라 부른다.

아주 특이한 점은 연산군이 사림 학자들에 참형을 내리면서, 다음과 같은 명을 덧붙인다.

“또한 백관들은 모두 나아가 김일손의 능지처사를 보라. 만일 보기를 꺼려서 혹 고개를 돌리거나 혹은 낯을 가리거나 참예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모조리 이름을 써서 아뢰도록 하라. 내 그들을 엄벌에 처할 것이다.”

능지처사에 고개를 돌리는 백관은 벌을 주겠다는 잔인함, 자신의 심기를 어지럽힌 자는 모조리 처결하겠다는 독재성, 그것은 연산군이 폭군이 되려는 징조가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연산군을 둘러싼 유자광, 임사홍, 신수근 등은 연산군의 최대 비밀인 그의 출생과 폐비 윤씨에 관한 언급으로 환심을 사고자 했으며, 이를 서서히 교묘하게 발설함으로써 연산군이 자신의 생모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도록 충동질을 해댄다.

유자광은 한명회에 버금가는 영리함과 간계에 뛰어난 자인데, 예종 때 남이 장군을 고변해서 공신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허나 타인에 대한 중상모략을 일삼는 행위로 말미암아 성종이 유배를 보내어 기용하지 않도록 했던 바 있으나, 오랜 인고의 시간 끝에 복귀하여 연산군의 심기를 흩뜨리며 정쟁을 도모한다.

유자광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임사홍에게 폐비 윤씨의 어머니인 신씨를 지속적으로 잘 보살펴주라고 조언하고, 마침내 폐비의 비참한 최후를 알게 된 연산군에 의하여 두 사람은 최측근으로 복귀하게 된다.

특히 임사홍의 아들 임숭재가 성종의 옹주와 연을 맺게 되어 연산군과는 처남 매부지간이 되는데 임숭재는 좋게 말하면 풍류객이요, 천하의 바람둥이였다. 여색에 빠진 연산군은 수시로 임숭재의 집을 방문하여 연회를 가졌으며 임숭재는 장희빈을 비롯한 절세미인들을 조달하는 채홍사의 역할을 하게 된다.

신수근은 자신의 누이가 연산군의 세자 시절 세자빈으로 연을 맺어 중전 신씨가 됨에 따라 우의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또한 그의 딸은 연산군의 배다른 형제(성종의 세 번째 중전 윤씨) 진성대군의 부인이 되었고, 후에 진성대군이 중종이 되자 국구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으나 반정 세력에 의하여 참형을 당하게 되고, 그의 딸 중전 신씨도 폐비가 된다.


연산군은 중전 신씨와의 사이에서 원자를 생산하게 되고, 원자가 병을 앓자 궁을 떠나 피병(피접)을 하고자 한다. 마땅한 곳으로 선별된 곳은 성종의 형이자 연산군의 백부인 월산대군의 집으로 가기로 한다. 월산대군은 애초에 병약한 몸 때문에 자산군인 성종에게 왕위가 돌아 간 적이 있었으며 성종 이전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부인 승평부부인 박씨가 홀로 남아 있었다. 월산대군의 집은 현재 덕수궁 터로서 풍월정이라는 정원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풍월정만큼이나 이름난 미인이 바로 승평부부인 박씨였다.

어릴 적부터 연모의 정을 내심 품고 있었던 연산군은 원자의 간호를 핑계로 백모인 승평부부인 박씨를 자주 방문하게 되는데, 급기야 연산군은 박씨를 겁탈하기에 이른다.

그뿐 만아니라 연산군은 외명부를 포함한 중신들과 수시로 연회를 열어 그 중에서 맘에 드는 부인이 있으면 왕의 권위를 무기로 겁박하여 닥치는 대로 패륜적 행위를 일삼는다.

승평부부인 박씨는 자결을 생각하지만 그럴 용기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연산군에 끌려 다니는데, 연산군은 박씨의 막내 동생 박원종이 다른 중신들로부터 탄핵을 당할 때 그를 끔찍이 감싸기도 한다. 박원종은 무관 출신으로 기골이 장대하고 승평부부인 박씨의 황당한 경우를 접하고서 연산군에 대한 증오의 칼을 간다.

박원종에 대한 연산군의 비호는 결국 자신을 잡아먹는 호랑이를 키운 결과로 이어진다.


주지육림에 빠진 연산군의 패륜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P/S

- 장구한 조선 역사에 있어 가장 큰 스캔들은 바로 어우동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어우동은 승문원 지사 박윤창의 딸로 태어나 왕족인 태강수 이동에게 출가를 한다. 타고난 미모와 끼를 주체하지 못해 이동을 비롯하여 다른 왕족인 병산수 이난, 수산수 이기 등과 어울리는 등 노예부터 왕족에 이르기까지 신분에 개의치 않고 음행을 저지른다. 간통을 저지르면서 사내의 팔뚝이나 등에 먹물로 이름을 새기게 하기도 한다. 시와 서화에 매우 뛰어났다고 하는데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바는 없다. 개인의 음행에 나라가 관여할 수 없다는 신하들의 고언에도 불구하고 성종은 “풍속을 고칠 수 없다면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어찌 형벌을 쓰리! 어우동을 중형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고려가 망할 무렵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어우동은 마땅히 교형에 처해야 할 것이오!” 라며 어우동을 교형에 처한다.


- 창경궁의 애초 이름은 덕수궁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함흥차사 이후 태상왕으로 물러앉으면서 한성에 거주할 자리를 태종이 창경궁 자리에 마련하였고, 개경에서 있던 궁의 이름 덕수궁을 그대로 쓰게 하였다. 후에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나면서 그 자리를 수강궁이라 했고, 성종 때 인수대비의 거처로 확장하면서 창경궁이라 불렀다(작명은 김종직이 함).

한편, 현존하는 덕수궁은 애초에 세조가 덕종(예종의 형)의 죽음으로 궁을 나오게 되는 수빈 한씨(인수대비)를 위해 거처를 마련해 준 곳이었다. 인수대비는 둘째 아들 자산군이 성종이 되면서 다시 궁에 들어갔고, 자산군의 형 월산대군이 거처하게 된 곳(상기 언급된 풍월정)이었다. 선조 때는 시어소(왕이 단기간동안 머물며 정무를 보던 곳)였고, 인조 때는 경운궁이었으며, 순종 때 덕수궁이란 이름을 쓰게 되었다.


- 조선왕조 실록 제 10 권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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