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봉승의 실록대하소설 조선왕조 500년
제 8 권 [고운 님 여의옵고 1453~1459]
1453 계유년 10월 10일
한명회의 지시에 따라 그리고 그가 작성한 살생부에 의거하여 거사(巨事)가 진행되었다.
수양대군이 김종서의 집에 찾아가 그의 아들 김승규를 함께 주살한 뒤, 일행은 단종이 머물고 있던 영양위 정종(단종의 매형)의 집으로 향한다.
시어소(時御所: 임금이 잠시 머무는 곳)에서 수양은 단종에게 김종서 일당이 모반을 기획하고 있었다는 과장된 보고를 한 뒤, 명패(命牌:임금이 3품 이상의 신하를 부를 때 쓰던 패)를 하달할 것을 요구한다. 중신들을 모두 시어소에 모이게 함이었다.
얼마 후, 그들은 시어소에 입장하는 즉시 한명회의 손가락 하나에 생사가 결정되는 기막힌 순간을 겪어야만 했다.
그 와중에 죽은 줄 알았던 김종서가 잠시 정신을 차리게 되고 가마에 실려 도성에 진입하고자 시도하지만, 이 역시 한명회의 사전 지시에 따라 홍달손이 미리 손을 써 모든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좌의정 김종서일지라도 출입이 허락되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수양의 일당은 김종서를 즉각 수소문하여 며느리 집에 숨어 있는 그를 효수하여 길에 매달게 된다.
향교동에 위치한 영양위 정종의 집에서 죽은 이는 황보인, 이양, 조극관 세 사람이었고, 군사를 보내어 윤처공, 이명민, 조번, 김연, 민신 등을 주살하였다. 또한 안평대군은 삼촌인 성녕대군의 집에 숨어 있다가 잡혔고 강화도로 보내진다.
수양대군 일파의 거사는 완벽하게 성공하였고, 이를 계유정난이라 부른다.
영의정의 자리에 오른 수양대군은 3공 6조의 면면을 새로이 하고 소위 정난공신이라 명하는 논공행상을 시행한다. 이는 기존 인물들에 대한 판갈이의 성격과 새로이 관료로 등용되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소위 말하는 훈구파의 생성이 시작되는 시점이라고 볼 수 있다.
계유정난이후 가장 수양이 곤혹스러웠던 점은 안평대군의 처리 문제였다. 애초에 한명회가 살생부를 작성할 때 김종서, 황보인 다음으로 기명되었으나 수양이 이를 거부하였고 이로 인하여 의견의 충돌이 있었다. 수양이 정권을 잡은 이후로 대소 신료들에 의하여 안평대군의 주살을 요구하는 주청이 부지기수로 올라 왔으나 골육의 관계인 안평대군을 쉽사리 처리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안평대군의 존재는 언제나 정권에 위협이 되므로 이에 대한 처리가 뒤따라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단종과 수양은 신료들의 반복되는 주청에 견디지 못하고, 1453년 10월 18일 사약을 내린다.
안평대군.
세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학문을 좋아하고 시문에 능하였고, 그 서법이 당대 제일이라는 평을 얻었다. 풍류를 즐겨 수성궁을 지어 놓아 아리따운 궁녀들을 두고, 마포 강가에는 담담정(淡淡庭)을 지어 시인묵객들과 가무음곡으로 세월을 보내었다. 형님인 문종이 승하한 후 수양대군과 대립하여 김종서, 황보인과 행동을 같이 하다가, 나이 서른여섯에 불귀의 원혼이 되고 말았다.
김종서를 척결한 수양이 시급히 처리해야할 시급한 일은 병권의 확보와 국경의 수비였다.
김종서가 개척한 두만강 6진은 그의 최측근인 이징옥이 함길도도절제사를 맡고 있었고, 그는 김종서와 결탁하여 유사시에 군사를 일으킬 약조를 했으며, 경성부사 이경유가 병기를 서울로 실어낸 것을 알고도 묵인해 준 혐의를 받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징옥을 도성으로 조용히 불러 처리하고자 하였으나 김종서의 처형 사실을 알아 챈 이징옥은 자신의 군사를 끌고 남하하고자 시도하고 있었다. 이징옥이 여진족의 힘을 빌려 남진을 한다면 조정으로서도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 종성의 절제사로 있던 정종(영양위 정종과 다른 인물)은 꾀를 내어 이징옥을 설득한다.
“도성의 방비는 결코 소홀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수양대군은 무략에도 밝은 사람이니 여기서 도성까지 가느라 전력을 다 소비하고 나면 승산이 없습니다. 일찍이 대금국도 이 땅에서 시작하여 중원까지 제압하였사옵니다. 도성에서 승산 없는 싸움을 할 것이 아니라, 이 곳에서 다시 대금국의 창업을 선도하시고 대금 황제가 되시옵소서.”
이 같은 꼬임에 넘어간 이징옥은 진짜 황제가 된 마냥 도읍을 두만강 넘어 오국성으로 정하고 첩을 황후라 하며 아들들을 왕으로 봉하는 등 웃지 못 할 일들을 벌인다.
정종은 뜻이 맞는 부하들과 틈을 보다가 오국성으로 이동하기 전날 이징옥을 만취하도록 유인한 후 처치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과 처첩을 모두 효수함으로써 함길도의 평정을 되찾게 된다. 이 때의 일을 이징옥의 난이라고 한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비록 계유정난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정난공신까지 책록하였지만 수양을 제거하려는 음모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한명회의 간계로 궁에서 쫓겨난 혜빈 양씨는 세종의 6째 아들 금성대군을 찾아간다. 금성대군은 기개가 수양과 비슷하다는 평을 얻고 있었는데, 안평대군의 사사이후 수양에 대하여 심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정난 2등 공신으로 책록되었다가 내시라는 이유로 군호를 삭제당한 엄자치는 모욕감에 깊은 앙심을 품고 있었는데 금성대군은 엄자치에 1등공신 책록을 약속하고 궁내에 심어 두고 있었다. 이처럼 궐 안팎으로 세력을 키워가던 와중에 금성대군은 사저에서 사연(射宴:활쏘기)을 했다는 이유로 병조판서 이계진에게 고변을 당한다. 이로 인해 금성대군은 무죄로 풀려나지만 엄자치는 제주 관노로 보내지고 도중에 죽고 만다.
이 같은 전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금성대군은 혜빈 양씨의 소생인 한남군과 영풍군, 그리고 단종의 매부인 영양위 정종 등과 결탁하여 수양을 제거하고자 음모를 꾸민다. 허나, 주도면밀하지 못한 성격의 금성대군은 사전에 누설되어 또 다시 포박을 당하게 된다.
결국 금성대군, 혜빈 양씨, 한남군, 영풍군 등은 귀양길에 오르게 된다.
단종은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심지어 어머니 같은 혜빈 양씨, 형제처럼 지내는 영양위 정종 등이 귀양길에 오르는 등 고립되는 상황에서 수양대군의 위세에 자신도 언제 그들처럼 될지 모르는 위기의식을 느낀다. 그리고 그는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양위할 것을 결단한다. 몇 차례의 고사 끝에 수양대군은 종묘사직의 보존을 위한다는 큰 뜻을 받들어 보위에 오른다. 1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고뇌에 찬 1년 8개월을 보내고 단종은 상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비극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1456년 6월
세조의 즉위를 축하하러 온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성상문, 박팽년, 이개 등을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과 운검(雲劒 : 임금이 임하는 행사에 무반이 큰 칼을 차고 임금의 뒷자리에 시립하는 것)을 서기로 한 3인 성승(성삼문의 아버지), 유응부, 박쟁 등이 의기투합하여 세조와 그의 세자까지 일시에 제거한 후, 단종을 복위하기로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한명회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 운검이 누구인지 검토를 하고, 세조의 명이라고 사칭하여 운검을 세우지 못하도록 지시한다.
성삼문은 계획이 차질을 빚자 차일을 도모하고자 한다. 그리고 지속적인 회합을 통하여 세조를 제거하기 위한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게 된다.
그러나 이런 일은 시간이 흐르다보면 변절자가 생기기 마련인 법, 김질은 자신의 장인인 정창손을 거사 후에 영의정으로 세우겠다는 성삼문의 말에 현혹된 것인데, 일이 그르치거나 사전에 들통이 나면 역모 죄로 멸문지화를 당할 것이라 겁을 먹고 그럴 바에 밀고를 하여 공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다.
김질의 밀고에 따라 성삼문을 비롯한 관련자 모두가 일망타진되지만, 세조는 어릴 적부터 친교를 맺어온 집현전 학자들을 어떡하든 국정에 참여시키고자 회유를 한다.
그러나 성삼문과 박팽녕은 옥중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거열형에 처하게 된다.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봉래산 제 1봉에 낙락장송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이에 화답이나 하듯이 박팽년이 조용히 읊었다.
금생려수(金生麗水)라 한들 물마다 금이 나며
옥출곤강(玉出崑岡)이라 한들 뫼마다 옥이 나며
아무리 여필종부라 한들 임마다 좇을손가.
회유가 무위로 돌아가자 세조는 이들을 거열형에 처하였고, 효수된 목은 3일간 거리에 걸었고 처형된 인원은 100여명에 이른다. 이를 사육신(성상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의 상왕복위모의(上王復位謀議), 이른 바 ‘병자년 옥사’라 부른다.
병자옥사는 이것으로 마감되는 것이 아니었다.
상왕이 된 단종이 이들의 음모를 사전에 인지하고 묵계가 있었다는 것이 드러남에 따라 세조의 고민은 더욱 깊어진다.
상왕 단종의 복위 음모는 예서 그치지 않고, 단종의 장인이 되는 송현수와 단종의 잉첩의 장인인 권완이 모종의 복위 음모를 꾀하다 적발이 된다.
이에 세조는 중신들의 주청을 이기지 못해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을 한다. 그리고 강원도 영월에 있는 청령포로 귀양을 보낸다. 청령포로 지정한 것도 한명회의 안이었는데, 삼면이 강이고, 뒤는 기암절벽이라 조용하고 경계가 좋은 곳이라고 추천한다.
단종은 중전도 없이 홀로 청령포로 떠나게 되고, 노산군을 호종한 왕방연의 노래가 전해지고 있다.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놋다.
이 즈음 단종 복위를 두 번이나 시도했던 금성대군은 영남 지방 순흥에 위리안치 되어 있었다. 그에게 단종의 노산군 강등과 영월 유배 소식을 전해 준 자는 다름 아닌 순흥부사 이보흠이란 자였다. 영남은 선비가 많은 고장이라, 금상의 불의를 탓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향리와 선비들이 뻔질나게 금성대군의 거처를 드나들며 정국을 한탄하는 불온한 기운이 뻗어나고 있었다.
순흥부사 이보흠은 금성대군에게 다음과 같은 거사 계획을 꾸미기 시작한다.
[우선 금성대군의 이름으로 영남 각 고을에 격분을 보내 따르게 한다. 이보흠의 계산으로는 따르지 않을 수령들은 하나도 없으리란 것이었다. 그러는 한편 순흥의 군사들을 비밀리에 영월까지 보내어 상왕(단종)을 모셔오게 한다. 상왕이 순흥에 닿을 무렵이면 영남 각 고을은 모두 충성을 맹세해올 것이다. 그런 연후에 조령, 죽령의 두 길을 차단하여 조정의 군세와 대치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귀가 솔깃해진 금성대군은 격문을 일필휘지로 쓰게 되고, 후일을 도모하며 자신의 방에 보관하게 된다.
하지만, 금성대군의 시녀 중 하나가 이 같은 역모를 엿듣게 되고 그녀는 자신의 연인인 이동이란 자에게 발설을 하게 된다. 이동은 공을 세울 기회라고 보고, 시녀에게 격문을 훔쳐 달아날 것을 제안한다. 이동은 오래 전 자신이 길 안내를 했던 판중추원사 이징석(이징옥의 형)을 기억하고선 그와 함께 도성으로 올라와 격문을 바친다.
한편, 격문이 사라진 것을 보고 금성대군은 정신없이 허둥대기 시작하는데, 이런 모습에 회의를 느낀 이보흠은 오히려 금성대군의 역모를 조정에 먼저 고발하는 것이 살 길이라 생각한다.
이동과 이보흠의 고변장계(보고)가 엇갈리는 부분이 있지만, 조정에서는 사람을 파견하여 그 전모를 모두 밝혀내게 된다.
혈육에 대한 세조의 또 다른 고뇌가 시작된다.
단종의 장인인 송현수와 권완, 그리고 금성대군까지. . .
세조는 단종 잉첩의 아버지인 권완 만을 효수할 것을 허락하고 다른 것에는 함구하고 만다.
이런 와중에 궁내는 다른 일로 소란스러워 진다.
바로 세자 장이 심각한 병을 얻은 것이었다. 이에 세자의 회복을 기원하는 심정으로 죄인들에 대한 극형을 삼가거나 보류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결국 시름시름 앓던 세자 장(후에 덕종으로 추존)은 결국 나이 스무 살에 이 세상을 하직한다. 그의 죽음과 동시에 조정의 분위기는 소강상태에 있던 옥사를 매듭짓는 쪽으로 급변하기 시작했다. 신하들은 금성대군에 대한 처벌은 물론 죄의 화근인 노산군(단종)에 대한 처벌을 주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근 두 달 가까이 세조는 중신들과 입씨름을 하였고, 결국 그들의 주청에 따라 노산군을 포함한 모두의 처형을 윤납(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1457년 10월 21일
단종. 나이 17세. 열 살에 세자가 되어 열두 살에 부왕을 잃고 임금이 되었다. 열세 살에 계유정난을 겪고 열다섯에 수양에게 양위하여 상왕이 되고 끝내는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땅에 유배되었다가 결국 죽음을 당했으니, 참으로 한 많은 짧은 인생이었다.
세자 장의 죽음은 왕위 승계에 또 다른 문제를 안겨주고 있었다.
세자 장은 한확의 딸 수빈 한씨(후에 인수대비)와의 사이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월산대군이고, 또 하나는 자산군이다. 하지만 세자 장이 별세하자 수빈 한씨는 아이들을 데리고 궁 밖으로 나와 살아야만 했다. 큰 아들이 네 살, 작은 아들이 생후 4개월이었기에 세자의 자리는 장의 동생 황에게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수빈 한씨는 목전에 왔던 중전의 자리가 물거품이 됨과 동시에 세손이 될 수도 있었던 아이들을 데리고 사저로 돌아간다.
수빈 한씨는 한확의 딸로서 학문의 수준도 높았고 사리분별력과 정치적 야망이 많았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정치적 생명은 인고의 세월 끝에 빛을 발하게 된다.
수빈 한씨 외에 또 다른 청주 한씨가 등장하는데 바로 한명회의 딸이다.
세조는 새로이 책봉된 세자(후에 예종)의 배필을 한명회의 셋째 딸과 맺고자 한다.
여자로 태어나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가 아닌가! 남자는 아무리 기상이 빼어나도 왕실의 소생이 아닌 이상 영상의 자리 이상은 오를 수가 없다. 그러나 여자는 중전이 될 수 있으니 영상이 되는 것보다 더한 광영이 아닐 수 없다.
“세상 일이 이 손바닥 안에 있소이다”라고 했던 한명회의 말처럼,
역사의 시계 바늘은 그를 향하고 있었다.
*P/S
- 1453년 계유정난이전 조정에서 고명 사은사를 보내고자 할 때 13세 단종은 자신과 동갑내기 매형 영양위 정종을 명으로 보내고자 한다. 정종이 명나라를 구경하고 싶어 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단종은 수양에게 청을 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혜빈 양씨에게 떼를 쓰고 김종서와 황보인에게 까지 부탁을 한다. 조선이 아무리 속국이지만 한 나라의 외교사절단장을 13세 소년을 중심으로 공식 방문한다는 것이 어디 말이나 되는 것인가? 철없는 어린아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느낌이다. 이를 품에 끼고 둘러싼 사람들은 무슨 상상의 나래를 폈을까?
- 또한 금성대군에 관한 내용을 제한된 지면에서 제법 많이 나열한 것은 당시 왕실의 종친이라는 자들의 면면을 들여다보기 위함이었다. 그는 세종대왕의 6번째 아들이었고, 세 번의 역모를 모의하다가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것도 거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매번 사전에 발각되었다. 수양대군만큼이나 기상이 뛰어나다고 기록되었지만 이는 예의상의 서술인 것 같다는 느낌이다. 또한 3째 아들 안평대군은 여색과 시문, 서예만 즐기면서 김종서의 농간에 놀아나다가 친형 수양대군의 손에 죽임을 당한 꼴이다.
- 문종이 죽고 왜 나흘 동안이나 세자(단종)에게 보위가 승계되지 않았을까? 이 나흘이란 시간은 기록으로 남았기에 후세가 조작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김종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보다 면밀한 김종서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조선왕조실록 제 8 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