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500년 제 5 권

by 이병철

신봉승의 실록대하소설 조선왕조 500년

제 5 권 [성군 세종 1422~1430]


1422년 태종은 원경왕후가 죽은 지 2년 뒤 대모산 기슭에 묻히게 되며 그 묘를 헌릉이라 부른다. 태종의 말처럼 왕조의 기틀을 잡는데 정확히 30년이 걸렸다.

처음 10년은 창업 과정의 불합리함을 정비하고, 다음 10년은 새 제도를 정착시키며, 마지막 10년은 다음 세대의 태평성대를 여는 기반 조성에 쓴다고 공언해 왔었다. 공교롭게도 1422년(세종 4)는 창업 이후 만 30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태종 이방원

장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서 조선왕조 창업의 핵심적인 주동 인물로 활약했다. 그는 총명하며 강직했고, 때로는 너그러웠다. 그의 상벌은 철저하여 친소(親疎)마저도 차등을 두지 아니했다.

태조 이성계가 자신이 세운 나라의 임금 자리를 내던지며 친자식인 태종을 경원하여 함흥차사와 같은 불화를 자아냈고, 정종 이방과는 성품이 우유부단하여 자신의 뜻을 세우지 못했다. 이들 두 사람에 비한다면 태종 이방원은 어떠한 만난을 무릅쓰고라도 천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집요함을 보였다. 정세가 격동하면 언제나 그 자리에는 이방원이 있었고, 그는 몸소 창칼을 들고서라도 그것을 수습했다.

“이 세상의 모든 악업은 내가 가지고 갑니다. 주상은 성군의 이름을 만세에... 성군의 이름을 남기도록 하세요.”

태종의 마지막 말이었다. 파란으로 점철된 그의 삶을 조용히 매듭지었다.

임금의 자리에 있은 지가 18년이며, 상왕의 자리에 있은 지가 4년, 춘추 56세였다.

태종의 죽음으로 명실상부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창업의 주역이랄 수 있는 1세대가 지나고 2세대가 영위하는 조선이 된 것이다.


성군의 기질을 타고난 세종의 시대는 지난 4권에서 얘기한 바처럼 순탄한 시간만 지속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꾸준한 성실함과 낮은 자세로 경청하는 마음으로 사회 곳곳에서 왕권이 필요한 시기와 장소에 시의적절하게 구사함으로써 사회적 체계를 하나씩 잡아가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 나라를 운영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인재의 발굴과 양성에 있었다.

신분과 계급을 초월한 인재 양성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어린 나이의 세종은 차분한 조리와 설득력으로 유교사상에 얽매어 있는 중신들을 논리적으로 감화시키고 오히려 그들로부터 성군이란 찬사를 받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장영실의 등용이었다.

장영실은 아산을 본향으로 하는 양반가문이었으나 조상들의 처벌에 따른 연좌제로 인해 동래 관노살이를 하며 지내고 있었다. 당시 관노라 함은, 세종의 부인 공비 심씨의 경우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아버지 심온이 정치적 암수에 빠져 숙청을 당하자 심씨 전 가족이 몰살당하거나 관노로 전락하는 그런 예가 부지기수였던 것이었다.

세종은 장영실이 재주 있음을 알고, 과거 제도를 파기하면서까지 천민을 등용코자 했으며 이를 반대하는 중신들을 아래와 같이 설득한다.

“과거에 등과를 한 사람이 학문에는 능할지 모르나 산법(算法)에 능하지 않을 수가 있고, 경사(經史)에 밝은 사람이 어찌 역법(曆法)까지 밝겠습니까? 꿩을 잡는 일은 해동청(海東靑 매)이 으뜸이며, 새벽을 알리는 것은 수탉이 으뜸입니다. 설사 그렇기로 해동청이나 수탉이 도둑을 지키지는 못해요. 도둑을 지키는 일은 견공(犬公)을 따르지 못해요. 아니 그렇습니까. 허나 재주만으로 정승이 될 수는 없음일 테지요. 다만 재주의 쓰임이 있음을 경들은 아셔야 합니다.”

공조참판 이천이 관할하는 주자소에 입소한 장영실이 소소한 일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고 천부적 발명가의 기질이 있음을 간파한 세종은 그의 재주와 창의성을 높이 사서 상의원 별좌(정5품)로 등용한다. 이에 황희를 비롯하여 맹사성, 변계량, 유정현, 하연 등은 웃음거리가 되는 일이라며 한사코 반대를 한다.

얼굴을 붉힌 세종의 일침은 그가 얼마나 탁월한 예지력의 소유자이며 미래 비젼을 꿈꾸는 리더인지 한 눈에 깨닫게 한다.

“모르긴 해도 이 나라에는 경들의 학문을 따를 사람이 없을 것이나, 경들은 어느 누구도 과인에게 햇빛으로 생겨나는 그림자로 시각을 잴 수 있다는 주청을 하지 않았어요. 또 강우량을 알아서 강물의 범람을 막아야겠다고 주청한 사람도 없었어요. 과인은 장영실의 그와 같은 착상과 재주를 길러서 천문기구를 만들어보고자 함이오!”

“천문기구를 만들자면 장구한 세월이 있어야 할 것이며, 그 기간 동안 의식의 걱정이 없어야 할 것이며, 그 일을 추진할 만한 관직이 있어야 하지 않겠소. 이 같은 연유로 장영실을 소임이 없는 관직에 등용하고자 함인데 무슨 하자가 있다는 말씀이오. 과인은 믿고 있어요. 두고 보시면 압니다. 장영실은 이 나라 종사에 큰 발자국을 남길 것입니다.”

세종의 말과 생각은 600년이 지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더 깊은 전율과 감동을 전해 준다.


세종의 탁월함은 음악에서도 그 빛을 발하는데, 당시로는 지음(知音)이라 했으며 현대 용어로는 절대음감을 타고 난 것으로 보인다. 맹사성 역시 피리를 항시 갖고 다니며 연주를 즐겼다고 하는데 세종은 가야금으로 맹사성과 함께 즉흥곡을 연주한 장면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음악에 대한 조예가 남달랐다고 보여 진다. 이에 박연을 불러 악학별좌에 임명하여, 당시 불완전한 악기의 조율과 악보 찬집을 하게끔 한다. 당시 중국 음악에만 치우쳐 있는 현실에서 벗어나 조선 조정만의 음악인 아악(雅樂)을 사용하도록 정비하여 우리나라 고유의 정악(正樂)인 아악이 자리 잡을 수 있었고, 종묘제향약, 회례아악 등이 완성되기에 이른다.

박연이 조율에 필요한 경석(磬石: 안산암[安山岩]의 하나로 정으로 치면 맑은 음향이 남)을 찾아 방방곡곡을 헤매고 있음을 알고, 춘추관 당상들에게 전국 지리에 대한 책을 편찬하도록 하는데 이는 후에 신찬팔도지리지의 완성으로 이어진다.

국토를 사랑하고 국토를 알아 이용할 줄 알아야 부강해진다는 생각은 후에 최윤덕과 김종서를 통한 4군6진 개척으로 이어지는데, 국토의 척지촌토(尺地寸土)를 아끼려는 세종의 정신은 그의 위대한 소산 중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세종의 애민애족 정신은 백성들에게 있어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이 기본 중에 기본이라는 데서 출발한다. 기후가 궂어 흉작이 들면 모든 백성이 굶주리고 힘들어지며 범죄가 잦아져 민심이 흉흉해지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늘의 기후야 어쩔 수 없지만, 농사짓는 방법을 제대로 알면 소출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이에 주자소를 통하여 농상집요, 사시찬요, 교맥경종고 등을 발간하여 전국에 보급하지만 이에는 2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상기 책자들은 모두가 중국에서 도입된 내용이라 조선의 현실 즉 토질이나 기후 등이 상이하여 실효성이 부족하다는 점이었고, 또 한 가지는 백성들 중 대다수가 글을 깨치지 못한 상황에서 책자의 보급은 허공의 메아리처럼 공허한 경우가 허다하였다.

이에 세종은 조선의 농토와 기후에 알맞은 농서를 편찬하여 영농 방법을 개선하고자 착안한다. 이에 각 도에 파견된 경차관들이 노농들에게서 들은 농사짓는 법을 적어서 조정에 올리도록 하고, 변효문과 정초에게 이를 편찬하도록 한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하여 만들어진 책이 바로 <<농사직설>>이다.

농사직설의 서문은 아래와 같다.

“농사는 천하의 대본이요, 예로부터 성왕이 이에 힘쓰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중략).... 그 중복된 것을 버리고 절요(切要 )한 것만 뽑아서 찬집하여 한 편을 만들었으니, 제목을 <<농사직설>>이라고 하였다. 농사 외에는 다른 것을 섞지 아니하고 간략하고 바른 것에 힘써서, 산야의 백성들도 쉽사리 알게 하였다....”


세종 11년(1429)에 편찬된 농사직설의 의미는 매우 심중한데, 농민들을 깨우쳐 풍족한 삶의 기틀을 닦아주는 한편, 국가 재정의 확립을 도모하는 측면도 매우 강하였다. 이뿐만이 아니라, 향후에는 내버려지고 방치된 평안도와 함경도 땅의 개척을 위한 미래 포석으로서, 세종은 김종서를 통한 4군 6진의 개척에 주력하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세종의 총명함과 탁월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세종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상기 언급한 백성들의 안목과 교양을 함께 도모할 수 있는 문자의 필요성을 간간이 신하들에게 피력하곤 했다.

세종이 사람을 바로 살펴서 적절하게 쓰는 것은 타고난 성품인지도 모른다. 22살 된 나이로 두 달 남짓 세자의 자리에 있다가 임금의 자리에 올랐으면서도 성군의 자질을 보이는 것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음이다. 관노의 신분이었던 장영실을 상의원 별좌에 제수하여 천문기기를 만들려는 생각, 후에 언급되지만 정인지를 중심으로 하는 집현전의 육성, 김종서로 하여금 국토의 개척과 국경의 정비에 쓰려는 생각 등, 예사 임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을 서른 안팎에 구상한다는 것이 세종의 성군됨이다.


어느 왕실에나 항시 불거지는 문제는 크게 보면 두 가지이다.

하나는 가족을 비롯한 친인척이 얽혀 있는 사안 그리고 왕위 계승의 작업이다.

오죽하면 家和萬事成이란 말이 있겠는가? 그만큼 어려운 일이란 의미이리라.

조선 창업 이후 적자의 왕위 계승이 큰 숙제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세종은 장자인 이향(후에 문종)을 세자로 책봉한다.

그리고 세자빈을 맞아 휘빈 김씨라 칭한다.

세자 향은 휘빈 김씨를 맞아 도통 가까이 하려 하지 않고 공부를 핑계 삼아 겉돌기만 한다. 휘빈 김씨는 세자가 침전 궁녀인 효동, 덕금을 가까이 하는 것으로 오해하여 자신의 시녀 호초의 간언에 빠져 요술적 비방을 쓴다.

그 비방이란 다름 아닌 압승술(壓勝術)이라 일컫는 것인데, 이는 사랑을 빼앗아간 여인의 신발을 훔쳐서 태운 다음 그 재를 술에 타서 지아비에게 마시게 하면, 계집들이 떨어져 나가고 본인은 지아비의 정을 흠뻑 받는다는 술법이었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호초는 휘빈 김씨에게 민가에서 사용하는 비방이라며 ‘두 마리의 뱀이 교접할 때 흘린 정기를 수건으로 닦아서 그 수건을 차고 있으면 지아비가 정을 듬뿍 준다’는 해괴망측한 간언을 하고 이를 휘빈은 서슴지 않고 받아들인다.

결국 이 비방책은 들통이 나고 호초는 참형, 그리고 휘빈 김씨는 폐빈이 된다.

원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왕실에서 세자 향은 중신들이 외모에 주안점을 두고 선발한 다른 여인을 맞아들이는데 그가 순빈 봉씨가 된다. 더불어 왕실에서는 세자 향에게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여인 셋을 한꺼번에 잉첩으로 맞이하도록 하여 왕실의 손을 얻고자 한다. 세자 향은 그 중에 승휘 권씨의 청초함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정염과 질투에 휩싸인 순빈 봉씨의 기행은 동궁을 또 다른 소용돌이로 몰아간다.


*P/S

- 장영실의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로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이순지이다. 이순지는 뒤늦게 과거 시험을 통해 관직에 올랐으나, 아라비아인들이 쓰는 회회력(양력)을 일찍 깨우쳤고 정인지의 수시력(음력)과 함께 쌍벽을 이루었다. 세종의 지시 하에 그는 칠정산내편(七政算內編)과 칠정산외편(七政算外編)을 편찬해 냈다. 내편은 중국 역법, 외편은 아랍 역법을 참조해 만든 것으로서 조선 천체의 운행을 한반도의 땅과 하늘에 맞게 계산한 것이었다.


- 당시 평안도 땅은 척박한 관계로 거주하는 사람이 없다시피 방치되어 있었고 올량합(兀良哈)이라는 야인들이 두목 이만주를 중심으로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 이에 김종서는 이 지역 주민 이주를 권장하기 위하여 죄인들의 석방, 노비들의 신분 상승, 세금 면제 등의 유인책으로 이주 정책을 시행할 것을 건의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세종에게 농사직설의 편찬은 농지 개발을 위한 유용한 대안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 제 5 권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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