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500년 제 3 권

by 이병철


신봉승 작가의 “조선왕조 500년”을 읽고 . . .


제 3 권 [외척도 공신도]


보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의 앞날은 결코 순탄치가 않았다. 그가 제일 먼저 겪었던 난관은 바로 다름 아닌 아버지 이성계와의 갈등이었다.

신덕왕후(현비 강씨)의 병사는 이성계에게 매우 큰 심적 고통을 안겨 주었고 더불어 1차 왕자의 난을 통하여 강씨의 소생인 이방번, 이방석 그리고 사위 이제가 유명을 달리했으며 2차 왕자의 난에는 이방간이 낙향을 했다. 가장 가슴 아픈 일은 경순공주의 부군인 이제가 제거된 후, 경순공주는 불가에 귀의하게 되는데 이성계가 직접 경순공주의 머리를 잘랐다고 한다.

위화도회군을 통하여 결국 왕위에 올랐으나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자식들 간의 골육상잔,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과의 영원한 이별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성계는 홀연히 궐 밖으로 나와 정처 없는 은둔의 세월을 보낸다. 이성계의 행적을 보면 소요산에서 회암사로 그리고 금강산에서 동북면 함흥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안변부사로 있던 조사의는 신덕왕후의 친척임을 내세우고 이방원의 1차 왕자의 난을 비방하면서 자신의 군사를 양성 중에 있던 차에, 이성계를 등에 업고 이방원에 대한 반란을 시도한다. 태종 이방원은 수차례 신하들을 보내 이성계의 환궁을 요청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하고 조사의에 의하여 죽음을 면치 못한다. 이것이 함흥차사라고 일컫는 것인데 이성계가 아닌 조사의에 의한 암살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조사의의 난이 진압되고 이성계는 환궁을 하게 된다. 그는 태종 이방원이 준비한 영접 행사가 있는 금교역에서 태종을 향해 철궁을 쏜다. 가까스로 이방원은 목숨을 보전하게 되지만, 주연의 자리에서 이성계는 철퇴를 감추고 있다가 이방원을 다시금 노리고 있었다. 이 때 이방원은 꾀를 내어 이성계에게 바치는 헌수(獻壽)를 내관이 대신하도록 지시한다. 이성계는 감춰둔 철퇴로 주연상을 내리치며 이렇게 외친다.

“모두가, 모두가 하늘이 시키는 일. . . 하늘이 돌보지 않고서야 어찌 이럴 수가 있으랴......”

이로써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한 이래 이어져왔던 부자간의 갈등은 10여년 만에 막을 내리고 이성계는 태상왕으로서 태종 이방원의 정책을 적극 지원하게 된다.


태종 이방원은 이제(양녕대군)를 세자로 책봉한 후, 한양 재 천도를 추진한다. 원래 이성계에 의해 1395년 한양 천도를 하였다가 정종 때 1399년 경복궁에 들이닥친 까마귀 떼와 골육상잔 등으로 의한 정국의 어수선함을 피해 개경의 수창궁으로 환도했고, 태종 5년인 1405년 다시 한양으로 천도를 감행한다.

태종 이방원이 한양으로 재천도할 때 별궁을 만들어 기거했는데 이때 만들어진 것이 창덕궁이다. 그리고 태상왕인 이성계가 머무를 수 있도록 만든 것이 창경궁(창경원)이며 당시 명칭은 덕수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현재의 덕수궁은 임진왜란 이후에 만든 것이고, 개경에서 이성계가 태상왕으로 있을 때 거주한 곳이 덕수궁이었는데 그 명칭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임).


태종 이방원은 왕으로서 두 가지에 대한 과업을 충실히 할 것을 스스로에게 다짐을 한다.

첫째는 적장자로서 왕위를 잇게 하겠다는 의지였고, 다른 한 가지는 다음 세대의 태평성대를 위하여 자신이 짊어져야할 모든 악덕과 악업을 사양치 않겠다고 마음먹는다.

이에 따라 양녕대군이 되는 장자 이제를 세자로 책봉하였고, 세자의 품행과 교육에 심혈을 기우린다. 허나, 자식 교육이 부모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던가! 세자 이제의 빗나간 행실로 말미암아 태종 이방원는 결국 이제를 세자위에서 폐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태종 이방원은 형언할 수 없는 실망과 아픔을 겪는다(세자 이제에 관한 내용은 계속 다루어진다).

태종이 모든 악덕의 짊어짐을 사양하지 않겠다는 것은 먼저 외척에 대한 화근을 없애는 과정에서 출발한다.

중전 민씨는 기질과 성향이 괄괄하고 정치적 지배욕이 대단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민씨는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맨 먼저 한 일이 이방원의 애첩이던 칠점선(七點仙)을 궁에서 쫓아낸다. 이는 이방원을 대노하게 만들었고, 그 후에 이어지는 9명에 이르는 후궁들에 대한 민씨의 투기는 둘 사이에 회복할 수 없는 마음의 생채기를 계속 만들어 간다.

중전 민씨는 이방원이 왕으로서 간택한 부인이 아니라, 피비린내 나는 싸움판에서 동고동락을 하며 왕의 자리까지 오르게 한 협력자이자 동지였기에 그 의미는 사뭇 다르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방원이 적자 계승을 명분으로 한 1차 왕자의 난 이후 정종이 보위에 오르게 되자 그는 실의에 차 술독에 빠져 있었는데, 그 때 민씨는 이숙번으로 하여금 비밀리에 무기를 몰래 사서 준비토록 하였고(적발 시에는 역모로 극형에 처할 일이었다), 그 덕에 방간의 난도 진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중전의 자리에 있어서 민씨는 민씨대로 지분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던 것이다.

이 둘의 관계 악화는 세자 이제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제는 어릴 적 이성계가 환궁할 때 아버지 이방원에게 활을 쏘았던 사건과 왕과 왕비가 된 어버이 간의 불화, 세자로서의 감당할 수 없는 무게 등으로 심각한 정서 불안과 현실 도피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세자 이제는 어릴 적 외가인 민씨네에서 성장하였는데 그에 따라 외삼촌들(민씨의 남동생들)의 보살핌으로 컸으며 이들과 매우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이제가 세자로 책봉이 되자 외삼촌인 민씨의 동생들은 수시로 중궁전을 드나들며 외척으로서의 위세와 자신들의 세력을 하나씩 키워나가고 있었다.

태종 이방원은 가뭄으로 농사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지진이 수시로 발생하자 모든 자연 재해는 자신이 저지른 악덕에 기인한 것으로 탓하며 세자에게 왕의 자리를 양위할 것을 표방한다. 이에 백관중신들이 반대를 표명하였으나 중전 민씨의 동생 민무구와 민무질은 경망스럽게도 세자의 시대가 열릴 것처럼 언행을 한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그들은 결국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되고 자진을 하게 된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중전 민씨의 또 다른 동생 민무회와 민무휼 또한 비슷한 경우로 외방에 부쳐지고 자진을 하게 명한다.

중전 민씨는 멸문지화와 다름없는 고통을 당하게 되지만, 이방원은 이처럼 매정하게 외척에 의한 왕권 도전의 싹수를 모조리 잘라 버리고 만다. 중전 민씨의 분노는 극에 달해 자진하겠다는 소동과 함께 이방원과 돌이킬 수 없는 갈등으로 접어든다. 이에 태종 이방원은 중전 민씨에 대한 폐비를 심각히 고민하게 되고 길례색(吉禮色:왕실의 혼인을 주관하는 관청)의 설치까지 고려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태종 이방원은 창업 공신들에 대한 예우와 별개로, 공신들의 과도한 권세에 제동을 걸고 다음 세대까지 이어질 왕위의 보존을 최대의 사명으로 생각한다. 그 예로 최측근인 이숙번에 대한 처벌은 일벌백계의 사례가 된다.

이숙번은 이방원이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란 지위만 있을 뿐, 두각을 나타내기 전부터 그의 행동 대원으로서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해온 최측근이었다.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후, 문관 시험에 통과했고, 차후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이방원은 이숙번에게 ‘사람을 해치는 일 말고는 모든 것에 사면을 해주겠다’는 약조를 해줄 정도로 태종의 신뢰가 절대적이었고 그에 따른 위세도 대단했다고 한다. 그의 별명은 “궐밖정승”이었고, 심지어 그가 살던 집 근처 돈의문에 시정잡배들이 시끄럽다고 돈의문(현재 서대문)을 임의로 막아 백성의 통행을 단절시켜버리기도 했으나 태종 이방원은 이를 묵인하기까지 한다. 이숙번의 안하무인의 행위와 불경스런 일이 누적되자 결국 이숙번을 귀양 보내고, 후에도 세자 이제에게 줄을 대는 등 권력의 연장을 꾀하는 일들이 반복되자 태종 이방원은 그와 대면을 하지 않는 것으로 관계를 정리한다.


전언한 바와 같이 이 같은 일련의 사태들은 세자 이제에게 심각한 갈등을 일으키는데, 그가 보아 온 왕실의 행태는 다음과 같았다.

-아버지와 싸우자고 임금의 자리에 올라야 하는가?

-거느리고 있던 심복들에게 사약을 내리고 가랑이를 찢어 죽이자고 임금이 될 것인가?

-처남들을 죽이자고 임금을 해야 하는가?

-조강지처를 내동댕이치자고 임금이 되어야 하는가?....


태종 이방원은 다음 시대의 태평성대를 위하여 외척과 공신을 비롯한 정적 제거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성계의 타계 후에 처음으로 그의 공적을 기리는 편전을 집필하게 하여 조선왕조실록의 탄생에 절대적으로 기여하였으며, 그 이전에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여 활자를 개비하고 많은 서책을 인출 간행토록 했다. 주자소의 설치는 조선 활자 문화 발전의 단초가 되었으며 후에 세종, 세조대에 이르러 교서관으로, 정조 대에는 규장각으로 이속되는 변천을 겪게 되는데, 이런 흐름 속에서 계미자, 경자자, 갑인자, 병진자, 경오자, 을해자, 갑진자, 계축자, 병자자, 개주갑인자 등에 이르는 아름다운 활자가 태어나게 된다.

더불어 경회루를 건축하여 외국 사절단을 맞이함에 있어 조선의 위신을 지키고자 하였으며, 호패법을 실시하여 국가에서 동원 가능한 병력과 인력에 대한 과학적인 파악에 주력하였다.

태종의 이 같은 의욕적인 활동은 조정 중신들에 화합의 기치를 들게 하였고 그들로 하여금 대소 정무에 몰두하도록 유도하였다.

태종은 고려의 멸망에서 조선의 창업에 이르기까지 과연 구국의 화신인가? 소영웅주의에 빠진 권력 지향의 냉혈한인가?


*P/S

- 경회루의 편액은 어릴 적부터 서체에 뛰어난 세자 이제(양녕대군)가 썼다고 전해지 는데 지금은 사라져 감상할 길이 없다.

- 1408년 태종 8년에 이성계는 74세의 나이로 승하한다. 위화도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했을 때가 54세. 그로부터 20년 세월 동안 그는 보위에 올라 조선 국호를 정하고, 한양 천도를 했으며, 두 차례 왕자의 난, 함흥차사 등 파란만장한 사연 속에서 살다 갔다. 그의 묘소는 양주 검암산에 있고 능호는 건원릉(健元陵)이다.


--- - 제 3 권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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