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500년 제 2 권

제 2 권 [한양 천도] 1393~1401

by 이병철

신봉승의 “조선왕조 500년”

제 2 권 [한양 천도] 1393~1401


1392년 7월 17일 이성계는 옥새를 들고 보위에 올랐다.

자정 능력을 상실한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운 이성계는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의 신진사대부들의 신사고와 다섯째 이방원의 혈기에 많은 의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성계의 시대는 세자 책봉이라는 첫 단추를 괴상망측하게 꿰는 바람에 초장부터 많은 문제점을 잉태하고 있었다.

본처(향처라고도 부름)인 한씨가 새 왕조 탄생 이전에 타계하였기에 자연스레 중전의 자리는 후처인 강씨 차지가 되었는데 이가 바로 현비 강씨이다.

현비 강씨는 이방원의 부인 민씨와 쌍벽을 이루는 여걸이었다고 한다.

민씨가 여장부다운 대가 쎈 여인이라면 이보다 여성스러우며 간들간들한 느낌을 주는 것이 강씨였다고 한다. 이성계와 이방원의 나이 차이는 32년이 되지만 강씨가 후처인 것을 감안하면 두 여인 간의 나이 차이는 그보다 훨씬 적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현비 강씨는 이성계의 등극 이후 정도전과 남은을 중궁전에 초대하여 직접 술을 따르며 식사를 대접한다. 향처(鄕妻)인 한씨의 맏아들 이방우가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항하여 솔가한 상태에서, 적자가 없는 마당이니 둘째 아들이든 일곱째 아들이든 누가 세자가 되든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니냐며 그들을 설득한다. 즉 자신이 낳은 방석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종용한다.

그리고 현비 강씨는 정도전과 남은에게 세자의 사부 자리를 약속하기로 한다.

“공들도 아실 것이오마는 정안군(이방원)의 성품이 얼마나 과격합니까? 포은(정몽주)을 주살한 사람입니다. 두문동(고려 유림들이 낙향하여 모여 살던 곳)에 불을 지른 사람입니다. 왕씨 종친들을 수장(강화도와 거제도로 격리하는 배를 침몰시킴)시킨 사람입니다. 스승인 운곡(원천석)마저도 붙잡지 못한 위인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에만 능한 사람을 세자의 자리에 앉히다니요. 어차피 장자가 세자 책봉을 받지 못할 일이라면 둘째가 하든 일곱째가 하든 예나 법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질 않소이까?”

현비 강씨는 이성계의 총애를 받고 있는 의안군(이방석)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고, 정도전과 남은은 세자 사부의 자리로 맞교환하는 정치적 거래를 성사한다.

같은 시각 이성계는 이방원을 조상들의 묘를 재정비하라는 지시와 함께 그를 동북면으로 보내고, 중신 회의를 거쳐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기에 이른다.


실은 이방원과 강씨는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씨 소생 아들 중에서 강씨를 어머니라 부르며 정치적 야망에 있어 서로 의기투합하는 사이였으나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자 강씨가 선수를 치고 나온 것이었다.

이방원의 노기는 하늘을 찌르고, 정도전과 남은 역시 발뺌을 하며 세자 책봉은 더 이상 무를 수 없는 일이라 항변한다.

“기르던 강아지에게 발등을 물림이오, 사람들의 마음이 어찌 저들과 같이 간교해질 수가 있다는 말씀이오.”


섬돌 위에 찬 이슬 내려

어느덧 버선도 촉촉이 젖었다.

밤이 깊었음인가.

들어와 발을 드리우면

시름인 양 따라와 비치는 달빛.


이때부터 왕자의 난이 싹트고 있었다.




한편 보위에 오른 이성계는 새로이 창업한 나라의 쇄신 정책과 국호를 정하는 문제, 수도를 천도할 계획을 갖고 국사에 매진한다.

숭유억불의 정책을 반포함과 동시에 국호를 정하는 문제에 있어 “화령(和寧)”과 “조선(朝鮮)”이 거론되었다. 화령은 이성계가 태어난 지역 이름이고, 조선은 고조선의 이름이다. 결국 명나라 천자에게 사신을 보내 국호를 정하는데 명나라에서는 익숙한 이름인 조선으로 정하여 내려 보낸다. 1393년 2월15일의 일이었다.


1395년 조선은 한양으로 천도를 한다.

애초에 계룡산을 도읍으로 정하여 공사가 많이 진척되었으나 하윤의 상소에 따라 한양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종묘사직을 우선하게 되는데, 종묘(宗廟)라고 하는 대묘는 왕실 어른들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니 궁궐보다 먼저 낙성되는 것이며, 사직단(社稷壇)은 지신(地神)과 농업신(農業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라 이 또한 먼저 완공이 된다. 이 무렵 종묘사직이라는 말을 국가의 개념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종사(宗社)라는 말로 줄여 써도 국가라는 의미가 된다. 종묘는 지금의 종로 3가에 있는 바로 그것이며, 사직단은 지금의 사직공원에 남아 있다.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새 대궐의 이름과 모든 전각과 문루의 이름을 작명할 것을 부탁한다.

그에 따라 정도전은 시경과 춘추 그리고 고금의 명언과 철리(哲理)를 인용하여 경복궁(景福宮)이라 짓고 수많은 전각과 문루의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는 대 작업을 완성한다. 삼봉 정도전의 학문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는 데에는 많은 난관이 있었는데 주된 어려움은 대다수 중신들의 가족과 재물이 개경에 있기 때문에 한양으로 이전하는데 많은 주저함이 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계는 새 왕조의 국면을 쇄신코자 한양 천도를 감행한다.


새 궁궐인 경복궁에 꽃이 피고 봄이 완연해질 때 궐내에는 두 개의 사건이 벌어진다.

하나는 목은 이색의 등장이다.

이색은 이성계와 막역한 사이였으나 조선 왕조의 창업에 협력하지 않은 탓으로 귀양에 처했다가 풀려난다. 경복궁이 완성되자 이성계는 이색을 궁으로 불렀다. 이색은 흰 상복을 입고 나타나 신하로서의 예를 올리지 않았고 신칭(臣稱)도 하지 않았으나 이성계는 용상에서 내려와 친히 그를 맞았다.

이성계는 오히려 이색의 지조를 높이 평가하고 이색이 산천 여행을 가는 길에 주안상을 내리도록 하명한다.

이에 이방원은 지밀상궁인 칠점선을 은밀히 불러 술에 독을 타서 하사할 것을 지시한다. 이색이 여강(여주에 흐르는 강)에 이르러 시를 한 수 읊고 술을 마시게 되는데, 마지막으로 그는 “죽고 사는 이치는 의심할 일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이와 동시에 현비 강씨는 심한 복통으로 배앓이를 하고 병이 위중하여 피접(약을 써도 효험이 없을 때 살던 집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 요양하던 풍습)을 하게 되는데, 이성계의 현비 강씨에 대한 사랑이 극진하여 승려들에게 불공을 드리게 하고, 죄인들을 풀어 주어 그들의 원한을 풀어 주는 등 많은 정성을 기우렸다.

1396년 8월 현비 강씨는 세자 방석에 대한 마무리를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그녀의 존호는 신덕왕후이고, 능호는 정릉이다.

현비 강씨의 병사는 바로 1차 왕자의 난을 촉발하는 계기가 된다. 현비 강씨가 죽자 정도전과 남은 그리고 세자 빈의 아버지 심효생 등은 이방원을 선봉장으로 하는 요동 정벌을 추진한다. 이는 마치 최영이 이성계를 위화도에 보낸 것과 비슷한 맥락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를 알아 챈 이방원은 선수를 쳐서 정도전, 남은, 심효생이 모여 있는 곳을 급습하여 일시에 제거한다. 그리고 궁궐로 진입하여 세자 방석과 그의 형 이방번, 경순공주의 부마 이제 등 모두를 제거한다.

정실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강씨의 소생을 모두 처단한 후, 방원은 그의 둘째 형 방과에게 세자 자리에 오를 것을 권하는데, 이가 바로 정종이 된다.

방원이 방과에게 세자 자리를 양보한 것은 적자 계승이라는 명분에 따른 것이지만, 방과에게는 후손이 없는 까닭에 때를 기다리면 자신이 왕세제(형제간의 계승)가 되어 보위에 오를 것이란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이성계가 상왕으로 물러나고 방과가 보위에 앉게 되자 방원의 계산에 착오가 생겼다.

실상은 방과(정종)와 유씨라는 여인과의 사이에 불노라 불리는 아들이 하나 있었고, 방과는 왕위에 오르자 그들을 입궐시키고 칭호도 부여하는 등, 방원이 미처 몰랐던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왕좌에 오른 방과는 예전의 겁 많고 소심한 인물이 아니었고, 그의 부인 또한 중전으로서의 위세를 떨치고자 함에 방원과 그의 부인 민씨는 적잖이 당혹해 한다.

결국 방원은 정종에게 세자 자리에 불노를 책봉할 경우 모두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직접적인 협박을 가하게 되고, 이에 정종은 방원의 눈치를 살피며 지내게 된다.

왕위에 오른 방과는 한동안 세자 책봉을 하지 못하고, 바늘방석에 앉은 꼴로 지내게 된다. 위로는 상왕 이성계가 있고, 실질적인 군사력은 방원의 손에 있으며 조정의 정무는 모두 방원의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4째 아들 이방간은 적자 순으로 따지면 자신이 방원보다 서열이 우선이라는 명분하에 방과를 이어 왕위에 오를 욕심을 드러낸다. 그리고 사냥을 구실로 방원을 제거할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방간의 음모를 미리 간파한 방원 또한 군사를 출병시켜 방간과 유혈 충돌을 한다. 결국 방간은 “내가 남의 말을 들어 이 지경이 되었다”라는 말을 남기고 낙향을 한다.

이방원이 4째 형 이방간을 제압하는 과정을 ‘2차 왕자의 난’ 혹은 ‘방간의 난’이라고 한다.

‘방간의 난’은 오히려 방원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굳혀 주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이에 정종은 방원을 세자로 책봉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재위 2년 2개월 만에 세자 방원(태종)에게 양위를 하게 된다.

1400년 11월 13일 34세의 나이로 방원이 보위에 오르자 정종은 상왕이 되고, 이성계는 태상왕이 되었다. 이성계의 창업 8년 만이다.

방원은 후에 태종이 되는데, 그는 제 2의 창업의 심정으로 관제를 개혁하고 송나라의 제도였던 등문고(후에 신문고)를 설치하는 등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하고자 노력한다.

또한 새로운 기풍을 진작하고자 내관들을 중신들에게 재배치함과 동시에 새로운 내관을 뽑아 적소에 배치하도록 한다. 당시 내관들은 왕조의 비밀을 속속들이 알고 있어 갖가지 유언비어를 만들어내는 장본인들로 타락되어 있었고 웃전과 아랫전의 눈치를 살피면서 무사안일의 표본이 되어 있었다. 내관은 물론이요 상궁 나인들까지 새로운 긴장으로 궁궐의 분위기는 바뀌어 가고 있었다.



*P/S

지밀상궁으로 등장하는 칠점선(七點仙)은 실제 존재했던 인물인데 우왕의 후궁이었다가 이성계의 후궁이 된 여인으로 알려지기도 하고, 동 소설에서는 우왕의 후궁이자 이방원의 애첩으로서 중전궁의 기밀을 방원에게 전해주고 목은 이색의 하사주에 독을 타는 등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로 나온다. 심지어 방원의 부인 민씨가 가장 질투를 느낀 대상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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