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500년 제 1 권
제 1권 [송도에 부는 바람]
신봉승 작가의 실록대하소설 “조선왕조 500년”
제 1권 [송도에 부는 바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을 소설로 엮은 신봉승 작가의 “조선왕조 500년”이란 작품을 손에 쥐었다.
장장 24권에 이르는 15,000쪽의 분량이다.
올 겨울을 대비한 양식을 비축하는 심정으로 한 질을 구매했는데 배달 기간도 오래 걸렸지만 그 무게가 어마어마해서 택배 아저씨가 현관 입구에 놓고 가겠다고 사정을 한다.
조선에 대한 이해는 마치 건축할 때 쓰는 거푸집 같다는 생각을 가끔씩 해본다.
얼기설기 엮어서 아는 듯 모르는 듯 그런 역사 지식수준에서 지엽적인 역사관에 치우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격동하는 시대 변화 속에서 균형 잡힌 역사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기초 체력이랄까 기본적 지식과 고민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이기에 한 권씩 따박따박 정복해 나가기로 맘먹었다.
제 1권 [송도에 부는 바람]은 1380년~1392년 동안의 고려 말에서 조선 건국까지를 다루고 있다. 즉 우왕에서 창왕, 공양왕 그리고 이성계의 등극까지를 이름이다.
고려는 공민왕 때부터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특히 후사가 없던 공민왕이 환관들에 의해 살해되자 신돈의 비첩인 반야와의 사이에서 출생한 모니노가 우왕이 된다. 많은 후궁들에게서 후사가 없다는 것은 공민왕의 생식 능력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에 따라 우왕은 신돈의 자식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히 떠돌고 그에 따라 후에 우창비왕설(禑昌非王設: 우왕과 창왕은 왕씨가 아니라는 뜻)이 힘을 받게 된다.
우왕은 10세에 왕위에 오르게 되고, 실질적인 권력은 이인임, 염흥방, 임견미 등에 의하여 정사가 좌지우지되었다. 심지어 권문세가의 가노(家奴)들까지도 위세가 대단하여 관료들의 집과 땅을 완력으로 강탈하는 일이 성행하였다고 한다.
우왕은 정사를 돌보는 것을 포기하고, 여색을 탐하여 처녀는 물론 남의 아내, 길가다 눈에 띄는 처자 등을 마구 섭렵하는 등 그 횡포는 극에 달했고, 한 번은 최영 장군의 집에 행차하였다가 최영의 혼외 자식인 딸을 보고 간청하여 입궐을 하게 한다. 그녀가 바로 우왕의 영비(寧妃)로 책봉이 된다. 그리고 최영은 우왕의 빙부가 되고 문하시중의 자리에 오름으로써 일인지상, 만인천하의 권세를 쥐게 된다.
이 때가 최영 장군 인생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고, 수문하시중에 오른 이성계와 함께 이인임, 염흥방, 임견미 등 간신들의 숙청을 감행하여 흉흉한 민심을 잠재우고자 노력한다.
당시 최영과 이성계는 북방 이민족의 침입과 왜구 토벌에 있어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고 백성들로부터 신처럼 떠받들어지는 존재였다.
이 시점에서 [위화도 회군(1388년)]이라는 사건을 두고 그 전후 맥락을 살펴봄으로써 고려 말 정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으리라 본다.
당시 중국은 원나라가 쇠잔하여 주원장이 이끄는 명나라에 의해 북쪽 일부 지역으로 쫓겨나 거의 패망의 수준에 이른 상황이었다. 몽고족에서 한족으로 중국 영토의 주인이 교체되는 시기였다.
그러나 고려 유림 학자들은 원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우고 있었고, 신진사대부 세력들은 친명을 강조하여 조정의 의견이 반분되어 어지러운 상황이었으며, 명나라는 이 같은 고려의 어정쩡한 태도에 대항하여 막대한 조공과 ‘철령 이북의 땅을 명나라에 반환하라’는 요구를 하게 된다(**철령위의 위치는 지금의 원산 지역이라는 설도 있고, 중국 동북부 심양 가까이 있는 지역이라는 설도 있는데 압록강 하류에 있는 위화도를 통한 요동 정벌과 연계를 하면 원산 부근이라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지고, 압록강 넘어 있는 철령을 강원도 지역의 철령으로 해석한 것은 조선총독부가 주입한 반도사관 혹은 식민사관의 잔재로 보여 진다).
고려 조정은 정명(征明)과 친명(親明)을 두고 서로 반목하게 되는데, 이 때 최영은 사위인 우왕을 설득하여 이성계로 하여금 요동 정벌에 나서게 한다. 이성계는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어 마지못해 군사를 위화도까지 이동시키지만, 4대 불가론을 앞세워 최영에게 군사를 물릴 것을 간곡히 호소한다.
4대 불가론이란,
1.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2.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옳지 않다.
3. 요동 정벌 동안 왜구가 창궐할 가능성이 크다.
4. 더위에 활의 아교가 녹고, 군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공산이 크다.
실제 무더위와 장마로 인해 군사들이 위화도에 당도하기까지 많은 수가 강물에 익사를 하고 무더기로 탈영하는 등 기강이 실로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최영은 위화도에서 요동 지역으로 진격할 것을 거듭 명령하는데, 이에 이성계는 명나라와 척을 지게 되는 우려, 그리고 계절과 물자 수급에 대한 악조건 등을 고려하여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게 된다. 서경에서 주색에 빠져 있던 우왕은 최영과 함께 급히 송도로 귀환하지만, 이성계는 최영과 우왕을 폐하고 우왕의 아들 창왕을 등극시킨다.
최영은 참수를 당하고, 폐위된 우왕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중신들의 요청으로 여흥(현재의 여주)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지만, 그곳에서 김저와 정득후를 통하여 이성계를 척살하려했으나 실패로 끝나 강릉으로 유배되었다가 창왕과 함께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우창비왕설을 근거로 왕씨의 7대손인 정창군을 옹립하게 되는데 이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다.
혹자는 위화도 회군을 로마의 시이저가 루비콘 강을 건넜던 사건과 비교하기도 하는데, 시이저는 현재의 프랑스인 갈리아 지역과 스페인 지역으로 영토를 넓히고자 무진 애를 쓰는 와중에 원로원의 시기로 인하여 그의 집정관 연임이 거부되자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하여 황제가 된 것이고,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요동 정벌을 강요받았지만 국가의 안위와 승산 없는 전쟁의 무모함에 반발하여 회군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위화도 회군은 1388년 5월에 일어난 일이고 이성계의 조선 창업은 1392년 7월에 이루어지는데 약 4년간 고려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성계는 동 소설에 따르면 구국의 열사이지 새로운 국가 창건의 의지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역성혁명이라는 대(大) 사건을 의도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충효를 근간으로 하는 유교 사상에 있어 역성혁명은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가 새겨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국가 창업의 야심은 다섯째 아들 이방원에 의하여 기획된 바가 다분하다.
이성계는 권문세족의 폐단을 제거하기 위하여 정도전, 조준 등에게 전제(田制 : 토지개혁)를 위한 준비를 당부하고 토지 개혁을 통한 부의 재분배로써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생활고를 해결하고자 고민하는 흔적이 역력하다. 그리고 1388년 위화도 회군 이후 4년간 권문세족의 대표 주자인 이색과는 물론 전제 개혁에 대하여 중도적 입장이지만 신진사대부와는 의견이 다른 정몽주 등과 원활한 교우 관계를 유지한다.
공양왕을 옹립한 후에도 문하시중의 자리는 정몽주에게 내어 주고 자신은 정몽주의 아래인 수문하시중의 직위에 머무른다. 그리고 주위 측근들의 요청과 탄원에도 새 왕국의 건업에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심지어 위화도 회군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핵심 인물인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은 정몽주에 의하여 탄핵되어 유배되었고, 심덕부와 설장수는 세자를 따라 명경(明京)으로 보내졌으며, 다른 측근들도 삭탈관직한 상태였다.
1392년 3월 이성계는 세자가 명나라로부터 귀국하는 출영 행사를 위해 해주로 간다. 그리고 해주에서 사냥에 나갔다가 낙마하여 목숨이 위태로운 중상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위기를 감지한 이방원은 이때부터 전면에 나서고자 한다. 이방원은 이성계로부터 정몽주의 제거를 승낙 받을 수 없음을 알고 선참후계(먼저 처형하고 후에 아뢴다는 뜻)를 결심한다.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를 병문안하고 돌아가는 정몽주를 만나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의 유배를 풀어줄 것을 요청하지만, 정몽주는 이를 거절한다. 이때 이방원이 마지막으로 건넨 시조가 [하여가(何如歌)]이고,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에 대한 정몽주의 화답이 [단심가(丹心歌)]이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1392년 4월 고려의 마지막 기둥인 정몽주가 사라짐으로써 고려(918~1392)는 500년 왕조의 막을 내린다.
병석에서 정몽주의 죽음을 알게 된 이성계는 진노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이방원의 간청과 배극렴을 비롯한 만조백관들의 주청으로 보위를 허락한다.
1392년 7월 17일 이성계는 백관들의 인도를 받으며 옥새를 앞세우고 수창궁으로 향한다.
고려의 쇠망을 알게 된 선비들은 불사이군을 외치며 하나씩 산 속으로 떠나가기 시작한다. 이를 본 이방원은 이렇게 외친다.
“논밭을 뺏기 위해서는 힘없는 백성들의 고혈을 뽑아낸 무리들이 아닌가! 요승 신돈에게 아양을 떨던 자들! 저들이 옳은 일을 옳다고 말한 적이 있었느냐 이 말일세. 틀린 말까지도 옳다고 하면서 일신의 영달만을 취한 무리들이 아닌가. 이제 와서 저들이 충절 소릴 입에 올리면서 도성을 떠나다니, 난 저들을 사람으로 아니 보고 있음일세. 저들이 사람이 아닌 바에야 중벌로 다스린다 하여 어느 누구의 노여움을 사리!”
**P/S
상기 위화도 회군에 나오는 철령위의 위치는 문헌을 통한 고증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이는 다른 학자들의 영역이고, 내가 코멘트할 수 있는 바로는 김영민교수의 중국정치사상사에 나오는 명나라의 통치 사상을 통하여 첨언할 수 있다고 본다. 즉 명나라는 폐쇄적인 대외 정책을 근간으로 삼았기 때문에 원산 지역 근처인 철령까지 진출할 의사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중국 심양 근처의 철령이라야 만리장성의 위치하고도 문맥이 이어진다. 아래는 김영민 교수의 중국정치사상사에 나오는 내용을 첨부한 것이다.
“주원장(朱元璋1328~1398)은 원래 반란군의 일개 병사에 불과하였으나 점차 신분이 상승하여 1368년 명나라를 창건하는데 이른다. 북송이 망한 뒤 240년 만에 다시 중국을 통일한 통치자였다.
민족 구성, 영토 크기, 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명나라는 앞선 원나라와 상당히 달랐다.
명나라는 여러 민족 간의 정치적 구별에 기초했던 원나라의 다민족 정책을 명시적으로 포기하였다. 명나라 통치자들은 민족적 동일성의 기초 위에 명나라 정치 체를 수립하고 싶어 했고, 적어도 통치 엘리트의 민족성에 관한 한 명나라는 전체 중국 역사에서 마지막 한족 왕조였다.
첫째, 영토에 있어 명나라는 당나라, 원나라의 영토보다 훨씬 작았다. 다양한 몽골 연합체가 국경을 끊임없이 위협했고, 토목보(土木堡, 지금의 허베이성 화이라이현)에서의 대패 이후 명나라는 점차 방어적인 대외 관계 정책으로 전환했고 해외 접촉은 줄어들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만리장성은 진나라때 완공된 것이 아니라 명나라 통치자들이 외부 세력의 침입을 두려워하여 요새를 추가로 축조하면서 확장된 것이다. 만리장성은 명나라 정치체가 천명한 자족적이고 폐쇄적인 대외 정책의 산물이다.
둘째, 명나라 통치자들은 외국과 교류를 금지함으로써 바다를 통한 위협을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명나라 스스로 시행한 해금(海禁)정책은 세계 각국과 중국을 격리하고, 국가가 독점하는 조공 무역을 무역의 유일한 경로로 만들고자 한 것이었다.
셋째, 명나라 통치자들은 한족 중국문화와 유목민 문화의 차이를 강조해온 도학을 자신들의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삼았다.
이러한 사례들은 민족, 공간, 문화의 세 측면에서 모두 협소하게 정의되었음을 보여준다. 상대적으로 폐쇄적인 정치 환경에서 명나라 창건자 주원장은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하였고, 그 권력을 피치자들을 통치하는 데 여지없이 휘둘렀다“.
**P/S
최영은 왜 위화도를 통한 요동 정벌을 감행했을까? 원명 시대에 있어 원나라에 대한 집착도 있었겠지만, 계란으로 바위치기와도 같은 전쟁을 왜 감행했을까?
당시 최영의 나이는 72세에 이른다. 14세기에 있어 70대라면 현재로 보면 최소한 80세 이상의 연령 수준으로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세계 외교 무대에 대한 감각이 떨어져 있었다고 볼 수 있고,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마음도 있었으리라. 아니면 이성계로 하여금 요동 정벌이 실패로 돌아가게 하여 이성계를 견제하고 막후에는 명나라에 이성계를 넘기는 것으로 그를 제거하려는 정치적 야망이 작용하였을까?
실제로 황금보기를 돌같이 했던 명장은 결국 참수형으로 삶을 마친다.
-제 1 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