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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철 Sep 18. 2023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제 20 권


[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


얼마 전 완독한 신봉승 작가의 작품 [조선왕조 500년]은 실로 대작이었다. 그의 작품은 1392년 조선 창업에서 시작하여 1910년 한일합방까지 다루고 있는데, 재야학자 이이화 선생의 저서 [한국사 이야기]는 1945년 대한민국 독립까지 이어진다.

굳이 두 작품을 비교하자면, [조선왕조 500년]은 소설을 역사처럼 쓴 팩션이고, [한국사 이야기]는 역사를 구전으로 읊듯이 맛깔나게 쓴 작품이다.

1910년으로 마감되는 조선왕조 500년에 이어 이이화 선생의 저서중 마지막 단락인 20~22권을 첨부하면 우리나라 조선 창업에서 1945년까지 망라하게 되어 나름 의미 있는 작업이 되리라 생각된다.

  

동 [한국사 이야기]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연상하게 만드는데, 그 필체가 엇비슷하고 역사를 고리타분한 학문이 아니라 History(역사)를 history(이야기)답게 써 내려간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하겠다.


조선의 근대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일 이후에 조선을 중심으로 대내외적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는가를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 1910년대에 있어 일본이란 나라의 위상이 국제 사회에서 어떻게 달라졌고 탈(脫)아시아를 부르짖던 그네들이 과연 국제 사회에서 얼마만한 입김을 가졌는지 냉정히 고찰할 필요가 있다.

즉 국제 정치 환경과 세계열강이 주도하는 국제 질서는 어떤 변화를 겪고 있었는지 정확히 파악해야만 조선 광복을 위한 선열들의 노력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그리고 피맺힌 독립 운동이 왜 우리의 뜻대로 원활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명쾌하게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10년대 거시적 환경 변화는 무엇보다도 세계 1차 대전(1914~1918)이 그 중심에 있다.

산업혁명이후 급성장한 생산력은 자원과 판매 시장의 확보라는 점에서 세계열강들은 식민지 확보에 주력하게 되었고 후발 주자가 되어버린 세력들이 기존 열강들에 반발하여 발생한 전쟁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3차에 걸친 영일동맹에 의거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참전하게 된다. 이는 세계무대로 진출하고자 했던 일본이 열렬히 바라던 바였고, 연합국의 승리에 따라 일본 또한 승전국의 일원이 된다.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던 결과, 일본은 중국 내에 있던 독일의 조차지(租借地: 특별한 합의에 따라 어떤 나라가 다른 나라에 일시적으로 빌려주는 일부분의 영토)였던 산둥반도를 차지하게 되고 독일령이었던 남태평양의 남양 제도까지 확보하게 된다. 즉 1차 세계대전의 최대 수혜 국은 일본이라는 말이 여기서 비롯된다.

이 뿐만이 아니라 1917년 러시아의 볼셰비키 세력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이 러시아의 공산 세력의 남하를 저지하는 역할을 일본에 의존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만큼 일본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은 지정학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외교를 통하여 일본을 압박하고 그로써 조선의 독립을 얻을 수 있다고 주창했던 이승만의 외교 독립론은 조선 민중의 열망과는 달리 세계정세는 불리하게만 돌아가고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에 승승장구하던 일본의 기세로 볼 때 조선의 독립은 요원한 일이라 충분히 판단될 수도 있었고, 유엔에 의한 조건부 위탁 통치와 일본으로부터의 조선의 자치권 확보를 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무튼 그의 역할과 공과(功過)는 계속 거론될 예정이다.


당시 제국 열강들의 식민지 정책은 크게 영국식 경영과 프랑스식 경영으로 나뉘는데, 영국식 경영이라 함은 이주형과 이민족 지배형으로 구분되며 식민지에서 구성한 의회가 식민지 정부를 스스로 구성하게 한다. 이주형은 호주, 뉴질랜드 등에 시행한 자치령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다른 민족을 지배할 경우 간접 통치 방법으로 기존의 질서를 그대로 두고 식민지 출신의 지배자를 통해 통치하는 것이다. 인도의 경우 인도성(印度省)을 두고 총독과 최소한의 관리만 파견하여 경영하는 식이다.

이와 달리, 프랑스는 직접 통치 방식으로 식민지 경영을 하였는데 비록 식민지라 할지라도 그 주민을 프랑스 공화국의 일원으로 여겨 종교와 언어까지 모든 방면에 있어 동화주의를 추진했다. 엄격한 심사를 통하여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프랑스어를 구사할 줄 알며 프랑스 문화를 익힌 자에게 시민권을 주었으며 시민권 자에게는 프랑스 헌법에 규정된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식민지의 실상은 프랑스의 한 지역으로 통합된 것도 아니고 중앙 정부의 통제를 받으면서도 그와 완전히 다른 정치 원리로 통치되었으며, 그로 인해 영국 식민지보다 분쟁이 자주 발생했고 군사적 충돌도 자주 일어났다. 프랑스는 가톨릭을 전파하며 현지의 전통 문화를 말살하고 프랑스를 숭배하는 의식을 심으려고 했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이든 프랑스이든 공통의 목적은 자원과 노동력 착취를 비롯한 경제적 수탈을 목적으로 하는 식민지 경영이란 점에서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 정책은 프랑스식 모델을 채용하되 자치권도 없고 시민권도 없는 독특한 형태를 취한다. 더불어 역사적으로 잠재된 조선에 대한 열등의식이 역으로 표출되는 경향도 다분해 보인다. 일종의 보복의식이다.

저자 이이화의 표현에 따르면,

“일본제국은 이미 홋카이도와 오키나와를 자국의 영토로 만들었고, 19세기 유럽 국가의 식민지 경영시기를 틈타 요동지방과 대만마저 식민지로 만들어 버렸다. 대한제국을 삼킨 뒤 예전부터 자신들의 자존심에 걸림돌이 되었던 조센진을 마음대로 짓누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유럽 여러 나라의 식민지 경영과 다른 방식이 없을까 궁리했다. 그 결과 일본식 모델을 만들어 냈다.”

“식민지 조선은 자치권이 부여되는 영국 형 식민지가 아니었다. 일제는 프랑스 형 동화주의를 기본적으로는 따르면서 조선 주민 대표를 일본 의회에 보내지도 않았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선진국의 방식을 참고하여 조선에 일본 형을 새로이 적용시킨 것이다. 일제는 조선의 식민지 경영에서 내지(일본)와 외지(조선)를 구분하면서 간접 지배 방식을 원용한 직접통치를 채택했다.”


이들의 동화주의는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을 바탕으로 대(大) 아시아 건설을 지향 점으로 삼고자 했지만, 실상 조선 주민은 일본 헌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조선총독부에서 제정, 공포한 제령의 규제를 받았다. 이것이 바로 차별의 시발점이었다. 헌법의 보호권 밖에 있는 조선 주민은 일차적으로 비국민으로 전락한 셈이다.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 시행한 교육의 중심은 두 가지로서 수신(修身)과 국어(일본어)였다.

수신은 도덕 교과서와 같은 것으로서 조선인이 숭배해야 할 대상은 천황이며, 일본은 우수한 민족이라고 강조한 내용이 주류였다. 이를 통해 일본의 지배에 순종하는 기본자세를 조선민족에게 강요한 셈이다.

또한, 일본어 교과서로 자신들의 언어만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일본 정신을 주입시키고 일본 문화의 우수성을 가르쳤다. 일본어 보급은 처음에는 효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20여년 뒤인 1934년 조선 인구의 5퍼센트인 85만여 명이 일본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는 통계가 있는데, 관공서의 급사 자리라도 얻기 위해서는 기초 일본어라도 쓸 수 있어야 했으며 일본어에 능숙한 사람이라야 우선 채용 대상이 되거나 헌병, 밀정 등의 경찰 끄나풀로 특채될 수 있었다.


총독부가 펼친 또 다른 공작의 하나는 [반도 조선사]의 편찬이었다.

조선 사람은 단결보다 분열을 일삼고 조선은 썩은 물처럼 고여 발전할 수 없는 정체된 사회이며 자율이 아니라 타율로 역사가 이어져 왔다고 기술했다. 따라서 조선은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이 마땅하며 일본의 지배 아래서만 문명과 개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역사관을 펼쳤다.

소위 말하는 반도사관이다.

오늘날까지 이런 그릇된 역사관으로 한일 관계를 바라보는 위정자가 있음은 개탄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역사가 갈등과 분열로 점철된 바가 없지 않으나 이를 오히려 ‘다이나믹 코리아’로 승화시키고 있음은 현실이 증명하고 있잖은가?


정신문화 교육 분야 외에 그들의 주 목적은 당연히 경제적 수탈에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들은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를 통하여 조선 국토를 잠식해 가기 시작한다.

이에 관한 내용은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에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합법을 가장한 비열한 방식을 모두 동원하여 조선의 자작농들을 조금씩 야금야금 소작인 혹은 도시 부랑자로 전락하게 금 만들어 간다.

1908년 이토 히로부미에 의하여 설립된 동척의 업무는 척식(拓植: 국외의 영토나 미개지를 개척하여 자국민을 이주시켜서 정착하게 한다는 뜻)을 위해 토지를 매매, 대차, 경영, 관리하고 건축물을 축조하여 매매, 임대하는 것이었다.

동척은 한국 정부의 국유지를 헐값에 사들였고, 조선 전체에 대한 전면적 토지조사를 실시한다. 총독부에서 강조하는 토지조사사업의 필요성은 다음과 같다.

“토지조사는 지세의 부담을 공평하게 하고, 지적(地積)을 명확하게 해서 그 소유권을 보호하고, 그 매매와 양도를 간편하고 확실하게 함으로써 토지의 개량과 이용을 자유롭게 하고, 또 그 생산력을 증진토록 하는 것으로서 그것이 조선에 긴요한 일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당시 양반들은 자기 집 종의 이름으로 토지매매문서를 작성해 거래를 했다. 존엄한 양반이 물건을 매매하는 문서에 천박하게 이름을 올려서는 안 된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더불어 토지에 대한 권리증명 같은 것도 부실한 상태였다. 쌍방이 문서를 부실하게 작성하였다든지, 수령 등 관(官)이 확인하지 않았다든지 하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총독부는 3개월이라는 기간을 두고 토지 소유에 관한 신고를 받았다. 조선 농민들의 대다수는 신고에 무지했으며, 공고를 보고도 글을 깨우치지 못한 자들은 어찌 할 줄 몰라 기일을 넘기기 일쑤였다.

옛 벼슬아치나 지방의 유력자는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소유권이 확실하지 않은 토지를 알아내어 자신의 소유라고 신고하거나 마을의 공유지를 자신의 소유라고 신고하기도 했다. 총독부는 이런 불법적 행위를 알면서도 친일파 양성을 위하여 묵인하기도 한다.

게다가 국유지 혹은 공유지이면서 경작 농민에게도 권리가 있는 애매한 성격의 토지들, 역둔토(驛屯土), 서원전, 향교전, 능원전(陵園田)도 상당 부분 총독부 소유로 넘어갔다.

그리고 관혼상제나 병 치료 등으로 급전이 필요한 농민들에게 토지를 담보로 돈을 빌려 주고 제 때에 갚지 못할 경우 여차 없이 소유권을 앗아 버렸다. 당시 전당포는 서울을 비롯하여 개항장과 지방도시 곳곳에 들어섰고, 일본의 영세한 돈놀이꾼들이 조선땅으로 몰려들었고 불법적인 토지매수가 횡행했다. 그들은 권총으로 무장하고선 맘에 드는 땅에 말뚝을 박아 두고 일정 기간이 지나도 소유주가 나타나지 않거나 관청에 제출된 사류가 없으면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을 한다.

그들은 이렇게 확보한 토지를 내지에서 이민 온 일본인들에게 싼 값에 불하를 하고 원래 소유주였던 조선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된다. 소작료 등의 시비로 쫓겨난 농민들은 도시의 부랑자가 되기도 하고 무작정 만주를 향해 삶의 터전을 마련코자 했다. 비참한 삶의 행로가 아닐 수 없다.


비단 토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임야는 농지보다도 그 소유권이 더욱 분명하지 않았다. 게다가 관행적으로도 개인 소유의 산이라도 땔나무 정도를 구해가는 것은 묵인하기도 했다.

1911년 총독부는 ‘삼림령’을 공포하여 삼림을 국유림과 사유림으로 구분했고, 삼림령에 따른 신고도 3개월에 한정했다. 이 제도 또한 일본인에게 산림을 양여하기 위한 편법이었다. 그 결과 삼림경영자로 동척을 비롯하여 스미토모(住友), 미쓰이(三井) 등의 대회사가 등장했으며, 이들은 설악산, 남해의 섬, 안면도 등지에서 수 백 년 된 나무를 베어내 일본으로 실어 나르거나 철도의 침목으로 공급했다.


삼림령과 함께 ‘어업령’도 공포되었다.

이에 따라 모든 어업 행위는 허가를 받아야 했으므로 종전의 어민들은 다시 허가를 받았고, 일본 어민들도 조선으로 진출하여 어로행위를 했다. 일본 어민들은 우수한 기술과 장비로 고기를 잡았지만 조선 어민들은 영세성을 면치 못하여 많은 어민이 생업을 포기해야만 했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부족한 수산 자원을 조선에서 확보했는데 특히 좋아하는 어종인 도미와 조기를 황해에서 잡아 갔으며 김과 해삼 등을 남해에서 채취해 갔다. 조선 어민은 열악한 재래식 장비로 근해업에 치중했으며 갯벌에서 굴과 조개 등을 캐거나 소형 선박으로 낚시 또는 그물질을 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식민지 경제를 예속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 1910년 ‘회사령’이 공포되었다.

회사의 설립은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되 허가의 조건에 위배된다든가, 공공 질서와 선량의 풍속에 위반되는 행위를 했을 때 조선총독은 사업의 정지, 금지, 지점의 폐쇄 또는 회사의 해산을 명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에 일본 자본이 침투해 들어오게 되고, 영세한 민족 자본이 성장할 토양은 형성되지 못했다. 예를 들면, 전남 영산포 일대에는 정미소가 많았는데 20여 개의 정미소 중 4분의 3 이상을 일본이 경영했다.

광산업 또한 예외가 아니라서 1915년 ‘광업령’이 공포된 뒤 총독부는 미쓰이, 미쓰비시 등 재벌회사가 조선 광산에 투자하도록 유도하였으며, 진남포제철소와 겸이제철소 등을 운영하였고, 기존에 있던 미국 등 외국인이 경영하는 광산업은 차츰 영세해지면서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다.


1911년 총독부는 ‘조선은행법’을 공포한 뒤 금융업을 전면 개편했다.

조선은행을 설립하여 일본 대장성의 감독을 받도록 했고, 사설은행도 설립되었는데 대한천일은행(후에 조선상업은행)과 한성은행(후에 조흥은행)등이 그것이고, 주로 친일파 자본가와 지주들이 참여하였다.

조선 통화를 처음에는 일본 내지와 같은 제도로 묶어 엔화를 통용시켜 동화(銅貨: 엽전)를 몰아내거나 정리해 왔다. 서울 상점에서도 엽전을 잘 받지 않고 대신 일본 돈을 선호했다. 사정이 이렇게 되니 생활이 고단한 사람을 ‘엽전 신세’로 표현하는 등 엽전이 천덕꾸러기가 되어 버렸다(*엽전이란 비속어가 여기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후에 조선은행이 중앙은행으로서 조선은행권인 원(圓)으로 표시된 조선 돈을 따로 발행하였는데, 이는 만일에 발생할지도 모를 식민지 경제 혼란이 일본 내지로 파급되는 사태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조선은행권은 일본군이 시베리아, 만주, 중국 등지로 진출하면서 군비를 조달하거나 물건을 사고 팔 때, 조선인에게 임금 또는 물품 값을 지불할 때 사용되었는데 이 또한 조선은행권으로 일본은행권의 방패막이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이었다.


상기와 같이 일본의 치밀하고도 조직적인 경제적 지배는 당시 세상 물정을 모르던 조선 민중들을 견디기 힘들 정도의 고단한 삶으로 밀어 넣기 시작한다.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이들의 토지를 불하받은 일본인, 민씨 척족 출신의 지주인 민영휘 등 세도가와 지방에 똬리를 틀고 있는 지주들이 총독부의 보호 아래 계속 토지를 늘려 가고, 서울의 이완용, 공주의 김갑순, 광주의 현준호 등 신흥 지주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잉여 생산물을 재투입하고 고리대금업을 겸하여 토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지주에서 소작인으로 전락한 농민들은 갈수록 높아가는 소작료에 신음을 하고 그나마도 소작권을 계속 얻어내기 위해 딸을 지주의 첩으로 들여보내기도 하고, 소작지를 마음대로 빼앗거나 소작료 책정을 결정하는 중간 관리자인 마름(지주로부터 소작지의 관리를 위임받은 관리인)에게 닭을 잡아 주며 융숭한 대접을 하기도 했다.

식민지가 된 뒤 일본으로의 식량 유출은 더욱 심해져서 쌀과 콩이 주류였는데, 쌀의 경우 총 생산량의 15% 정도가 일본으로 빠져 나갔고, 콩은 1919년 생산량의 40%를 실어갔다.

원활한 수출을 위하여 곡창지대인 군산과 목포에 항구 시설을 건설했으며, 남해에는 마산의 항만 시설을 확충했다. 이로 인해 마산, 군산, 목포가 번창해졌으며, 춘궁기 동안 조선에는 아사자가 늘어가고, 콩이 모자라 된장, 간장을 담기도 힘들었던 반면에, 일본 본토는 조선에서 가져간 덕분에 식량난을 완전히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치솟는 소작료를 당해낼 재간이 없는 농민들은 도시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고, 공장 혹은 광산, 철도, 운수, 토목 등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며 근근이 연명하였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 진 것이 조선 철도(경인선, 경부선, 경의선, 경원선 등)이고 만주와 연결되는 압록강철교인 것이다.

일제는 철도의 개설과 함께 도로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는데, 그 목적은 조선에서 생산되는 물품의 원활한 운수를 위한 것이었다. 1906년 7개년 계획을 수립한 후, 1911년 광화문에 전국 도로의 기점을 표시한 원표(元標: 도로의 기점을 표시하고 거리를 적은 표지판)를 만들었다.

1917년 총 연장 2,690km의 도로가 완성되었고, 그 과정에서 지역 주민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마을이나 면 단위로 구간을 할당하고 그 지역 사람을 가구에 따라 동원하는 것이었다. 부역에 나가는 사람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임금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감독관청은 물론 십장의 호된 회초리에 시달려야 했고 정해진 기일 내에 자기 몫을 해내지 못 하면 무거운 벌금을 물어야 했다.


도로망의 구축과 동시에 전기, 전보, 전화 등과 같은 문명의 이기도 급속도로 보급 이용되었다. 일본 기업들은 전기 사업에서 대한제국 시절의 한미주식회사를 인수하여 한일와사주식회사로 개편했고, 전기 시설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전화 또한 보급되었지만 전화 가입자의 80프로가 일본인이었으며, 조선 사람으로는 부호나 세력 있는 친일파, 사업가만이 전화를 설치했고, 전화가 주요 재산목록 1호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09년 안중근의 거사(이토 히로부미 제거)이후 1910년 조선총독부에는 육군 대장 출신의 테라우치 마사타케가 통감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합병 직후 민심을 자극하지 않기 위하여 군대는 물론 일본 관료들에게 자중할 것을 강조한다.

그는 이씨(李氏) 왕가에 대한 정리를 해 나가는데, 순종에 대한 호칭을 한국 황제에서 창덕궁 이왕전하(李王殿下: 이씨 성을 가진 전하, 전하는 폐하보다 낮은 것임)로, 태황제 고종을 덕수궁 이태왕전하로 부르도록 하며, 대 사면령을 내리고 조세를 경감하는 것과 한국의 국호를 조선이라 부를 것을 지시한다. 대한제국은 물론 조선의 흔적을 조금씩 지워 가는데 주안점을 두는 것이다.

또한 일제는 왕자와 옹주를 볼모로 일본으로 데려가 일본 황실이나 귀족과 정략결혼을 시켜 혈연으로 일본과 조선을 연결시키려는 공작을 꾸몄다. 그 희생양이 바로 영친왕과 덕혜옹주이다. 영친왕 이은은 고종과 귀비 엄씨의 소생으로 순종의 이복동생이다. 순종이 아들을 두지 못하자 황태자로 책봉되어 마지막 황태자가 되었다.

일제는 영친왕을 11살 때 일본으로 데려가 군인으로 봉직하도록 했고 1920년 일본 왕족 나시모토의 맏딸인 마사코(方子)와 혼인했다. 그는 과묵했으며 소심한 성격으로 불면에 시달리며 일생을 보냈다. 사람들은 그를 비극의 황태자라 부른다.

덕혜옹주는 한일병합 뒤인 1912년에 귀인 양씨에게서 태어났다. 13살이 되던 해 일제는 덕혜옹주를 일본으로 데려가 도쿄의 여자 학습원에 넣었다. 고독과 자폐증에 시달리던 그녀는 17살 때 어머니가 죽자 정신분열증에 시달렸다. 그런데도 일제는 그녀를 쓰시마 번주(藩主)의 후예인 소 다케시 백작과 혼인시켰다. 흔히 그녀를 비극의 공주라 부르며, 쓰시마에는 지금도 그녀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이강은 귀인 장씨의 소생이다. 나라 잃은 고종의 또 다른 씨앗이다. 그는 한 때 일제에 협력하면서 적십자 총재 등을 지냈으나 왕족으로서는 유일하게 만주로 망명하려다가 잡혀 돌아온 인물이다. 일제에 심복하거나 동조하지 않는 삶을 살았으며 때로는 독립운동 세력과 연계를 모색하기도 했다.

한편 곁붙이인 이준용도 왕손의 대우를 받았다. 이준용은 흥선 대원군의 손자이며 고종의 조카다. 그의 친일 행각은 널리 알려져 있으며, 한일병합 후 일제는 누구보다도 먼저 그에게 은사금(恩賜金: 은혜롭게 베푼 돈이라는 뜻으로, 임금이나 상전이 내려 준 돈을 이르던 말)을 주었다. 중추원의 고문직을 받았고 그의 첩이자 3번째 아내인 이옥경은 총독부 간부나 고위 장성과 어울려 친일행각을 벌였다. 이준용은 직계왕손이 아니었으나 왕족 대우를 받은 것은 그의 빛나는 친일적 성향 때문이었다고 한다. 내가 기억하는 바, 이준용은 흥선 대원군의 적장자 이재면의 아들로서 대원군이 무척 총애하여 한 때 고종을 밀어내고 보위에 앉히려 했던 인물이었었는데, 이준용의 친일 행적은 애잔하고도 씁쓸한 느낌이 들게 한다.

아무튼 일제의 의도는 이씨왕가(李氏王家)를 이용물로 삼으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일부 왕족은 일제의 우대정책에 넘어갔고, 그들에게서 항일의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익히 알고 있는 을사5적에 대한 처우는 어떠하였을까?

일제는 한일합병을 발표하던 날 ‘조선귀족령’도 함께 공포하여 한일병합에 공헌한 자에게 작위와 훈장, 은사금을 주어 귀족대우를 했다. 공, 후, 백, 자, 남(公侯伯子男)의 순서로 작위를 수여했는데, 왕자는 공작에 해당한다.

을사5적 중 이지용과 이완용에게는 백작, 이근택, 권중현, 박제순에게는 자작의 작위를 수여했다. 그 외 7적을 포함해 76명의 조선인을 작위 수여 대상으로 삼았고, 전주 이씨 종친,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동래 정씨, 반남 박씨, 경주 이씨, 여흥 민씨의 후예가 작위 수여 대상이 된다. 이 중에는 김석진처럼 을사5적의 처단을 주장하며 작위 수여를 거절하고 약을 먹고 자결한 사람도 있으며, 유길준, 윤용구처럼 작위 거절과 함께 은거 생활에 들어간 자들도 있었다.

적극적 친일파인 이완용이 백작에서 후작으로, 송병준이 자작에서 백작으로 승작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총독부 당국에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었다.

은사금 국채는 50년 이내에 상환하겠다고 했으나 일제가 35년 만에 물러난 탓에 원금은 한 푼도 지불하지 않은 꼴이 되었다. 그래도 귀족들은 그동안 부정 축재한 재산에 은사금 이자를 보태 품위를 유지하고 살았다.


다음으로 살펴 볼 사안은 바로 독립을 위한 우리 선조들의 눈물겨운 항거의 발자취들이다.

일제 치하에 있어 독립 운동의 큰 가닥은 무장 항쟁주의, 외교론, 조선의 자치주의, 계몽주의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무장 항쟁(김구, 김원봉, 박용만 등)은 해방이 되는 시점까지 피와 땀으로 점철된 역사를 이루어냈고, 외교(이승만)와 자치론(이광수)은 일제와 현실적인 타협을 찾고자 했으며, 계몽주의(안창호)는 구습을 타파하고 교육과 실업을 장려하여 실력을 배양해야 한다는 사상이었다.

이런 다양한 형태로 각기 서로 다른 생각으로 독립운동이 전개되는 것은 은둔의 나라 조선이 외세(일본)에 의하여 망국의 길로 들어서자 급기야 정신을 차리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왕좌왕했던 당시의 딱한 실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립운동의 전개 과정은 35년간 내내 지속되었던 것이고, 그 과정 속에서 민족주의 노선과 사회주의 노선 상에 있어 지향 점의 차이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왕정 시대에서 새로운 물결에 맞닥트린 조선 민중으로서는 정치적 노선의 차이가 중요했다기보다 나라도 없는 상태에서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의 적은 우리 편이라는 생각이 지배했던 시절이었고 실제로 찬 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음을 충분히 감안해서 그들의 행적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1910년 경술국치일 이후부터 1919년 삼일운동까지 조선 한반도에서는 어떤 식의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는지, 그리고 삼일운동을 전환점으로 대한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수많은 독립단체들의 결성과 연합 단체 등을 거론함에 있어 일일이 그들을 나열하는 것보다 나에게 인상적인 활동으로 다가온 주요 인사들의 행적과 단체들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전개를 개괄적으로 요약해보는 것이 더욱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먼저, 국제정세에 있어 1911년 손문(孫文 쑨원)이 주도한 신해혁명과 1917년 러시아 혁명에 대하여 파악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신해혁명은 손문이 내세운 삼민주의(민권, 민생, 민족)를 바탕으로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중국의 전통적 제왕질서를 부정하고 공화주의를 표방한 세력이 단행한 사건이다. 멸청흥한(滅淸興漢)의 기치 아래 청 왕조를 타도하여 중화민국을 건설한다는 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조선의 전통적 모화사상(慕華思想 : 중국의 문물과 문화를 흠모하여 따르려는 사상)이 완전히 빛을 잃었으며 복벽주의자들의 의식기반도 뿌리째 흔들렸다. 새로운 정치체제인 공화주의가 강력한 힘을 얻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손문은 한국의 독립 운동 지원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창립에 커다란 일조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8년 12월 1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등급을 추서 받았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1917년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로마노프 왕조를 몰아내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진행한다.

러시아 혁명은 세계사적으로 매우 큰 의미를 갖는데 장밋빛으로 가득 채운 공산주의 이론은 마치 인류의 이상향이 실현된 것 같은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평등과 균등을 내세운 공산주의의 기치는 그 동안 엄격한 신분질서에 억눌려 지내왔던 조선민중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아무튼 중국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러시아는 더 나아가 왕정에서 공산주의 국가로 탈바꿈하게 됨에 따라, 조선의 식자들, 선지자들 심지어 민중들까지 심한 사상적 동요를 겪게 되고 제대로 된 이념 교육도 없이 독립이라는 궁극적 목적과 자신의 기질에 따라, 민족주의적 공화주의와 계급투쟁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양대 세력에 편입되기 시작한다(중국 또한 마오쩌둥에 의한 공산주의 세력이 힘을 얻기 시작하여 장개석의 국민당과 국공합작 등을 통하여 일본에 대항하는 것과 함께 공산주의 실현의 꿈을 키워나간다).


1905년 을사늑약이후부터 의병에 의한 항쟁이 시작되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신돌석과 김정환, 채응언 등이 끈질기게 투쟁하였고, 1908년부터 일제는 ‘남조선 대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의병에 가담한 마을이나 의병을 지원하는 마을에 불을 지르거나 주민을 학살하는 등 근거지를 초토화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민중적 지향을 보인 의병과 달리 유림 주도의 복벽주의(復辟主義 : 왕에 의한 정치체제를 다시 회복할 것을 주장한 사상)는 고종의 비밀지령을 받은 임병찬 등이 대한독립의군부라는 조직을 구성하여 조선총독부에 축출각서를 보내고 일본정부와 외국에 항의각서를 보냄으로써 대한제국을 다시 일으킨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당시 유림 계급이 얼마나 세상물정을 몰랐는지 참으로 순진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 하겠다.


대한독립의군부와 달리 대구에서는 박상진과 김좌진에 의한 조선국권회복단이 결성되었으며 이는 후에 대한광복회로 발전하게 된다. 대한광복회는 근대 공화정치를 지향하며 부호들에게 돈을 받아내고 일본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하여 무기를 준비하며 남북 만주에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독립전사를 양성한다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행동으로 옮긴 조직이다. 국내와 만주에 연락 기관을 두고 일본인 고관과 친일파를 처단하며 무장 항쟁을 통해 독립국을 건설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칠곡의 악덕지주 장승원이 20만 원의 군자금을 약속하였으나 지키지 않자 그를 살해하고 그의 죄를 성토하는 선고장을 광복회의 이름으로 남겨두었으며, 아산의 친일파 자산가인 박용하 또한 군자금을 거절하자 즉각 처단하기도 했다. 친일자산가들은 군자금을 거절했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하고, 그렇다고해서 자금을 지원한 사실이 일제에 발각되면 모진 고초를 당하는 이중의 고충을 겪게 된다. 조정래의 아리랑에 보면, 한 자산가가 땅 판 돈 5,000원을 야밤에 침입한 무장 강도들에게 몽땅 털리는 자작극(?)을 연출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대한광복회는 총독부 당국의 수사에 덜미를 잡혀 조직이 와해되지만 이들은 만주로 피신하여 항일 투쟁을 이어간다(*박상진은 1910년 판사 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으로 발령받았으나 식민지 관리가 되지 않겠다하여 사퇴한다.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여 노백린, 김좌진 등을 가입시키고,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일경에 체포되어 1921년 순국하였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의병 출신 인사들은 차츰 독립 운동 기지를 만주 일대와 연해주 지방으로 옮겨 갔고, 중심거점을 북간도와 서간도로 정해 놓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나들며 무력 항쟁을 지속했다[* 간도(間島)는 청나라가 발흥한 지역이라 봉금지대로 정한 바 있으며, 그 모양이 섬처럼 생겨서 그렇다고 하기도 하고 두만강과 해란강(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강 이름) 사이에 있어서 사잇섬의 뜻으로 간도란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한다. 즉 두만강 북쪽 지역을 북간도 혹은 동간도라 하고, 압록강 북쪽 지역을 서간도라고 하는데 이는 조선 사람들이 붙인 지명으로 중국의 행정 구역과는 관련이 없다].


북간도에서는 이상설의 주도로 서전서숙(瑞甸書塾)이란 학교를 설립한다. 후에 이름을 명동학교로 개칭하는데, 명동학교 출신으로 영화 아리랑을 만든 나운규와 저항 시인 윤동주가 배출된다. 서전서숙은 군사 양성의 목적을 함께 하는데 후에 청산리 대첩을 이룬 북로군정서(김좌진)와 봉오동 전투를 이끈 대한독립군(홍범도)의 기반이 되는 인재를 키워나간다.


서간도에서는 이회영을 중심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게 되는데 이는 서로군정서의 주축이 되는 무관을 양성하게 된다. 신흥무관학교는 이시영, 이회영 등의 형제들이 가산을 털어 설립한 학교이고 30년대까지 3,000명의 무관을 배출하게 된다. 현재의 경희대학교 전신이기도 하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는 신한촌(新韓村)이라 명명한 한인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었으며, 일찍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큰 재산을 모은 최재형의 전폭적인 도움으로 권업회라는 조직이 결성되었고 권업신문을 발행하기도 한다. 최재형은 안중근이 연해주에서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준비하는 동안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후원자였다. 이상설의 주도로 대한광복군 정부가 설립되는데, 이는 상해임시정부보다 먼저 세워진 정부 조직이라고도 할 수 있다. 후에 대한국민의회로 이어져 대일 투쟁을 지속하게 된다.


중국 상하이에서는 여운형을 당수로 하는 신한청년당을 결성하여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을 앞두고 한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적 활동을 활발히 하며 1919년 파리강화회의때 김규식 등을 파견하기도 한다.


바다 건너 미국에는 두 개의 단체가 결성되는데, 하나는 미국 본토에 안창호의 주도로 대한인국민회가 만들어지고, 또 하나는 하와이에 대조선국민군단이 박용만의 노력으로 결성이 된다.

특히 대조선국민군단은 의미가 깊어 백과 사전에 나오는 설명을 옮겨 본다.  

“1914년 하와이 오아후 섬 아후이마누 농장에서 박용만의 주도로 창설되었다. 이 단체는 대한인국민회의 연무부를 확대·개편한 것이자, 1909년 네브래스카 주 헤스팅스에서 시작한 한인소년병학교의 군사운동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즉, 최종 목적은 항일무력투쟁에 대비한 군대를 양성하기 위함이었다. 운영은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고 훈련·전시에는 전투병으로 동원하는 둔전병제(屯田兵制)로 이루어졌다. 정식 군대와 같은 훈련을 받았으며 직제는 미국 군제에 따랐는데, 창설 당시 103명이었던 것이 4년 후인 1916년에는 311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국민군단은 1917년 경 해체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미일 간의 우호관계가 지속되면서 조선국민군단이 하와이 내에서 존속이 어려워졌고, 또 박용만이 극동지역으로 떠나면서 운영난이 가중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해외 독립 기지들이 결성되어 활동이 활발해질 즈음, 하늘이 일본을 도왔음일까?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이 연합국이 되는 관계로 상기의 독립운동 조직들의 활동은 일본의 항의로 해당국으로부터 제재를 받는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거나 심히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예를 들면 1918년 일본군함 출운호가 호놀루루에 도착하는 것을 알고 이를 파괴하고자 조선국민군단이 계획하였으나 미수에 그쳐 박용만 등 4인이 살인 미수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다. 이때 무력항쟁에 반대하던 이승만이 증인으로 나와 박용만의 행위는 미국과 일본 사이에 중대사건을 일으켜 평화를 반대하는 짓이라고 증언한다. 이로써 박용만과 이승만의 수 십년 우정은 절단이 나고 둘은 죽을 때까지 정적이 되며 후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시에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자 박용만은 내각 각료로 임명되었음에도 참여하지 않게 된다.


1919년 3.1운동은 우리나라 역사에 가장 큰 사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고, 이후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의 분수령이 된다.

3.1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월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으로 일어난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상기 언급한 1910년대 세계 전역으로 결성된 독립운동 조직과 그 활동으로 인해 응집된 에너지의 분출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3.1운동하면 생각나는 33인, 유관순, 탑골공원 등은 생략하고 이 책에서 눈길을 끄는 3개의 독립선언서를 조망할까 한다. 바로 길림의 대한독립선언서, 도쿄의  2.8독립선언서, 서울의 기미독립선언서가 그것이다.

작성된 시기는 길림-2.8-서울선언서 순서이며, 작성자는 각각 조소앙, 이광수, 최남선이다.

길림과 2.8선언서는 혈전(血戰)을 강조하며 투쟁의 길을 촉구하는 한편 서울선언서는 동양 평화를 위해 동양 평화의 지지자인 일본의 각성을 희망한다는 것이다.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 아닌 일본의 각성에 따라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는 형태를 취한 것이다. 이는 작성자 최남선의 우유부단하고 회색분자였던 성향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서울선언서에 대한 비난은 끝이 없는데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조선(我朝鮮)"으로 시작하여 어려운 용어로 가득하다. 왠만한 훈장들도 이해하기 힘든 한자어로 선언서를 써댄 것은 당시 문맹률이 80프로 달했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넌센스가 아니겠는가? 최남선은 자신의 고답적인 문장실력을 뽐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조소앙이 자신의 삼균주의에 입각하여 차분히 써 내려간 길림선언서가 메세지가 가져야하는 행위의 당위성 그리고 행동의 촉구 등에 있어 더욱 선언서다운 문장이라 하겠다(*삼균주의: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반으로 개인간에는 물론 국제적 민족 국가 간의 균등을 주장한 이론임).

이이화에 의하면,

"결론적으로 조선의 민중들은 그 동안 일제의 학정에 시달려 극도의 반일감정을 갖게 되었다는 점,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풍설에 의분을 지니게 되었다는 점, 등등 때문에 민족독립의 열망을 만세 시위로 표출했던 것이지 민족 대표를 흠모하고 선언서에 감동을 받아 궐기한 것은 아니었다." 라고 평가한다.


아무튼 독립선언서는 종교계 인사들과 학생들을 통하여 전국 각지로 비밀리에 배포되었고 농민, 노동자, 어민, 서기, 순사, 심지어 기생 등 모든 계층이 망라되어 시위에 참여했다.

1919년 3월부터 5월까지 집중된 만세시위는 동학농민전쟁과 함께 가장 많은 수의 군중이 동원된 민족운동이었다.

조선독립운동사에 따르면 5월까지 시위 참가자 수는 202만 명이었고, 다음 해 3월까지 일년 사이의 피해는 사망 7,645명, 부상 4만 5,562명, 체포 4만 9,811명에 이른다.


나라밖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 북간도의 모든 지역으로 퍼져나갔고, 서간도는 물론 연해주 신한촌에도 불길이 올랐으나 당시 일본과의 외교적 관계로 옴스크 정부(러시아 제국 잔존자들이 세운 반사회주의 독립정부)는 대한국민의회에 폐쇄령을 내린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3월 17일 러시아어, 중국어, 한글로 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며 일본에 대한 혈전을 선포한다.

대한국민의회는 소비에트제를 채택했으므로 의회 기능뿐 아니라 행정, 사법의 기능도 있던 조직이었는데 의장에는 문창범, 선전부는 이동휘가 부장이 되어 집행을 맡았다(*소비에트는 평의회, 대표자 회의를 뜻하는 러시아어였지만, 러시아 혁명때 노동자 농민 군대 대의원 소비에트가 형성된 뒤부터 특수한 의미의 국가제도로 확대되어 간다).

이들의 목표는 연해주를 비롯하여 북간도, 서간도에 산재한 군사조직을 하나로 통합하여 1만 명의 부대를 만드는 것이었다. 국내 진공작전을 펴 조선을 병란지(兵亂地)로 만들고 파리강화회의를 통해 연합국의 교전단체로 승인을 받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 영사관의 강력한 항의를 받은 옴스크 정부는 무력 진압을 강행한다. 실로 안타깝고 애처로운 일이었다.

우둔한 왕조의 어리석음에 따른 피해를 민중이 고스란히 떠맡아 원상복구를 위해 어리석을 정도로 치열하게 노력하는 장면이다.


미주 지역에서도 만세시위는 대단한 호응을 불러 일으키는데, 3월 9일 안창호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소집하고

1.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선정된 이승만, 정한경이 여권을 얻지 못할 경우 서재필(미시민권자)을 파견할 것,

2. 미국 각계와 교섭하여 대한독립에 대한 동정을 얻을 것,

3. 태극기를 만들어 필요할 때 들고 나오게 할 것 등을 결의한다.

3월 13일에 다시 총회를 열어 미국의 여론을 환기시키고 모든 동포에게 수입의 20분의 1을 납부할 것을 당부했다.

하와이에 있던 박용만 또한 대한인국민회  총회의 결정사항에 따르기로 한다. 이는 계몽독립사상과 무력항쟁을 각기 주장하던 두 거두가 힘을 합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대한인국민회는 대한공화국을 선포하고 지방의 대한인국민회에서 경축식을 열라고 지시한다.

대한공화국은 실체가 없는 기구였지만 이로써 조선을 단합하고 충동하는 효과가 있었다.

재미 지도자들과 학생들은 가두시위와 함께 독립지원 호소문과 청원서를 미국 대통령과 정부기관을 비롯하여 각계에 보내고 여론을 환기시킴으로써 미국의 교수, 목사, 신부, 시민들이 동조하는 현상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독립기금은 심지어 멕시코 한인들까지 참여하여 3월부터 12월까지 8만 8,013달러가 모였는데, 이는 대한인국민회의 1년 운영비의 10배에 달하는 액수라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미국 여론의 영향으로 일본  조선총독부가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전환하는데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도 한다.

더불어 미주 독립단체의 활동은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고, 이에 따라 미주에서 활동하던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 노백린 등이 임시정부의 요직을 맡았던 것이다.


독립을 향한 3.1운동의 파도는 일제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강압적 무단정치로는 더 이상 조선의 민심을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국면전환을 시도한다.

헌병경찰제를 폐지하여 보통경찰제로 전환했으며 자치라는 이름을 내걸고 지방에 협의회를 운영했다. 또 농민생활의 개선을 위해 농촌진흥과 쌀의 증산을 도모했으며 보통교육을 확대하고 조선어 신문과 잡지의 발행을 허가했다. 그러나 이 같은 유화국면은 단지 허울이었을 뿐, 식민지 통치가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독립을 향한 본격적인 투쟁의 역사는 제21권에서 계속된다.


*P/S

1. 1910년대 결성된 독립운동 조직을 조망하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당시 독립 지성인들은 시대적 흐름을 파악하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분투하였음을 상기해야 한다.


2. 그들은 시대에 편승하여 호의호식했던 이완용을 비롯한 앞으로 무수히 쏟아져 나올 친일 지성인들과 그 결이 다르다는 점에서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온다.

너라면 나라면 그리 할 수 있었겠는가?



                                           ---이이화의 한국사이야기 제20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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