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퉁퉁 부은 얼굴을 보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무당의 말도 안 되는 점괘를 내 입으로 말할 자신이 없었다. 나의 눈높이에 맞춰 남편이 고개를 숙인 채 한 번 더 물었다. 남편과 눈 이 마주치자 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올라왔다.
힘겹게 한 자 한 자 말을 이어 나갔다. 점집을 다녀왔다고. 가족 중에서 세 명이 죽는다고 했다고. 눈물범벅으로 겨우겨우 말하는 나와 다르게 남편은 듣는 내내 덤덤한 표정이었다.
“난 또 뭐라고.”
“아무렇지도 않아? 우리가 죽을 수도 있어.”
“그 사람이 굿하라는 얘기는 안 해?”
“안 그래도 했어… 3000만 원 달래….”
남편은 상술이라며 돈만 날릴 뻔했다고 했다. 가볍게 썩소를 짓는 남편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듣고 보니 다 맞는 말이었 다. 믿을 사람이 아니란 걸 알면서 무엇을 믿고 싶었던 걸까? 이직하기 전이나 미래에 대한 고민이 생겼을 때, 임신이 되지 않았을 때 답답하면 당시 유명하다는 무당을 수소문해 찾아갔었다. 돌이켜보면 무당들은 내 고민을 해결해 주지 않았다.
육아가 전부인 줄 알았다 마음을 알아주기만 하고, 입에 발린 말만 해주었다. 나도 모르 게 무당들이 해주는 말 하나에 의지했던 것 같다. 남편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도 나의 감정에 동조하긴커녕,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며 안심시켰다.
남편은 아이 젖병에 우유를 몇 ml 넣어야 하는지 깐깐하게 계산하는 내 옆에서, 조금 싱겁게 먹는다고 큰일 나지 않는다며 한마디 거들던 사람이었다. 아이가 이앓이 하느라 밤새 울던 날, ‘아이 야, 울지 마.’ 하며 아이를 쳐다보기만 했던 나에게 냉동실에 넣 어 두었던 공갈젖꼭지를 준 사람이었다. 아이가 넘어져서 입에 피가 났을 때 비명을 지르며 발을 동동 굴리던 나의 옆에서, 급 한 대로 찬물로 적신 수건을 아이의 입에 갖다 댄 사람이었다.
남편은 내가 본격적으로 시험관 시술을 시작할 무렵, 조용히 육아휴직을 내고 온 사람이었다. 남편은 감정에 쉽게 동요되고 이입하는 나의 옆에 언제나 묵묵히 서 있었다. 나는 한동안 남편에게서 육아를 방어했다. 동시에 육아하는 내 마음을 몰라준다고 남편을 원망한 적도 많았다.
토네이도 같은 감정이 남편과의 사이를 멀어지게 했을까? 무당의 말 한마디에는 벌벌 떨고, 남편에게는 ‘육아’에 대해 알지도 못한다 고 소리만 질렀나? 이렇게 감정적으로 살다가는 아이 앞에서도 남편 앞에서도 떳떳한 엄마, 아내가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마 냥 고개 숙여 울고 있을 게 아니었다.
죽음이 진정 사실이든 아 니든 상관없다. 죽음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옆으로 빗나갈 수 있도록 몸을 움직이면 된다. 그래, 무엇이든 일단 하자. 남편의 덤덤한 위로를 받은 이후, 나는 무당에 대한 이야기를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