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수필”에 대하여

- 아직 벗어나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

by 네로

*표지의 사진은 AI를 통해 만들어졌습니다(키워드: 멀리 보이는 바다, 풀내음이 날 것 같은 풀숲, 그리고 그 사이의 오래된 노트와 만년필).


나는 아직 단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다.

“착한 수필이네요”라는 말을 들으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음 한쪽이 서늘해진다. 부정하고 싶지는 않은데, 기뻐할 수도 없다. 그 말이 내 글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다는 걸,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착한 수필이라는 평가는 대개 악의가 없다. 무례하지 않고, 불편하지 않고, 누군가를 상처 입히지 않는 글이라는 뜻일 것이다. 읽는 사람을 힘들게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분명 장점이다. 그러나 그 말은 동시에, 그 글이 어디까지 나아갔는지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저 이쯤이면 괜찮다는 선에서 글을 멈추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수필을 쓰면서 자주, 스스로에게 브레이크를 건다. 감정이 고조되는 순간 문장을 한 번 더 고치고, 판단이 드러날 것 같은 대목에서는 비유 뒤로 숨는다. 그렇게 쓰면 글은 매끈해진다. 읽히고, 이해되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래 남지는 않는다. 나 자신에게도 그렇다.


내가 말하는 ‘착한 수필’은 도덕적으로 옳은 글이나 마음씨가 고운 글을 뜻하지 않는다. 위로가 되는 글, 공감이 잘 되는 글이라는 의미도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착한 수필이란, 쓰는 사람이 스스로에게 가장 불리한 문장을 끝내 쓰지 않은 글을 말한다.


조금 더 쉽게 말하면 이렇다.

착한 수필은 아픈 이야기를 하되, 아프지 않게 끝나는 글이다.

갈등을 보여주지만, 누가 틀렸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슬픔을 말하지만, 그 슬픔이 분노로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때문에 독자는 편안하다. 그러나 동시에, 깊이 흔들리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26년도 매일신춘문예 수필 부문 당선작이었던 「–80℃의 기억들」을 떠올려본다. 그 글에서 나는 기억을 냉동 보관에 비유하며, 상처를 너무 차갑지도, 너무 뜨겁지도 않게 다룬다. 기억은 보관되고, 언젠가 해동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결론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너무 안전하다. 기억이 끝내 해동되지 못할 가능성, 평생 꺼내지 못한 채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의도적으로 비켜나 있다.


질투에 대해 쓴 다른 수필에서도 마찬가지다. 결핍에서 비롯된 질투는 결국 이해와 사랑으로 변형되고, 아내의 말 한마디로 감정은 봉합된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이야기이고, 실제로 내가 겪은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이전의 모습, 질투가 나를 얼마나 비겁하게 만들었는지, 타인에게 추한 사람이 되었던 순간은 조심스럽게 지워져 있다.


나는 늘 삶의 한쪽 면만을 꺼낸다. 농부의 이야기, 귀리와 딸기꽃, 오래된 은행나무를 쓰면서도 분노보다는 존중을 선택한다. 틀린 선택을 한 사람을 고발하지 않고, 구조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렇게 쓰는 것이 옳다고 믿어왔고, 실제로 그 덕분에 글은 단정해졌다.


그래서 나는, 내 글들이 왜 “착하다”는 말을 듣는지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감정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감정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수필에서 가장 어려운 지점은 무엇을 쓸 수 있는지가 아니라, 무엇까지 써도 되는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나는 그 선을 늘 조금 앞당겨 긋는다. 나 자신에게조차 허락하지 않은 문장들이 있다. 그 문장들은 대개 이런 것들이다.


「그때 나는 옳지 않은 선택을 했다.」

「나는 아직도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했다.」

「나는 그 일을 통해 좋은 사람이 되지 못했다.」


이 문장들을 쓰지 않는 대신, 나는 비유를 더 공들여 다듬고, 장면을 더 오래 바라보고, 결론을 조금 더 온화하게 만드려고 애를 쓴다. 그렇게 완성된 글은 내 기준에서는 흠잡을 데 없지만, 결정적인 한 걸음 앞에서 멈춘다.


“착한 수필”이라는 말은, 그 말이 내가 멈춘 지점을 정확히 가리킨다. 아직 건너지 않은 선이자 아직 쓰지 않은 문장, 그리고 아직 감당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나 자신을.


이 장을 쓰는 지금도 나는 완전히 벗어나 있지 않다. 다만 이제는, 내가 어디에서 멈추고 있는지는 알고 있다. 수필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은 더 많은 감정이 아니라, 더 많은 책임이다.


다음에는 책임이 왜 이렇게 무거운지, 그리고 잘 쓴 수필을 읽고 나서 오히려 더 쓰기 어려워지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대신, 멈추게 되는 순간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고 싶다.


월,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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