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준이 생긴 순간, 글은 멈춘다(천강문학상 도전기)
*표지의 사진은 AI를 통해 만들어졌습니다(키워드: 멀리 보이는 바다, 풀내음이 날 것 같은 풀숲, 그리고 그 사이의 오래된 노트와 만년필).
등단 이후, 나는 어떤 글을 써야 할지 고민했다.
이제 막 문 앞에 섰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그다음 발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한동안 공모전 사이트를 돌아다니다가 천강문학상을 발견했다. 수필 부문이 포함된 공모전은 비교적 많지 않지만, 천강문학상은 이미 여러 해 동안 당선작들이 쌓여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 당선작들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감탄했다. 문장은 단정했고, 감정은 절제되어 있었으며, 삶을 다루는 태도는 조심스러웠다. 과장도 없고, 억지스러운 교훈도 없었다. 무엇보다 글마다 중심이 분명했다. 읽는 동안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고, 다 읽고 나면 “아, 정말 남는 수필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다음부터 문제가 생겼다.
글을 쓰려고 노트북을 열었는데, 문장이 잘 나오지 않았다. 쓸 이야기가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무엇을 쓰면 안 되는지가 너무 또렷해졌기 때문이다. 당선작들의 글에 나를 비춰보면, 내 이야기는 어딘가 덜 정리된 것처럼 보였고, 아직 수필의 자격을 얻지 못한 감정처럼 느껴졌다.
잘 쓴 수필을 읽고 나면, 글이 잘 써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어려워진다.
이유는 단순하다. 기준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전까지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쓰고 있었다. 일기를 들쳐보고, 기억을 더듬고, 감정을 적당한 거리에서 꺼내 놓았다. 그런데 천강문학상 수필들을 읽고 나서는 문장 하나를 쓰기 전에 질문이 먼저 생겼다. 이 문장은 너무 과하지 않은가. 이 감정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게 아닌가. 이 결론은 이미 누군가가 더 잘 써놓지 않았는가.
천강문학상의 당선작들은 감정이 많아서 좋은 것이 아니라, 감정이 어디까지 허락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글이었다. 삶을 많이 살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꺼낼 수 있는 이야기의 경계를 이미 여러 번 넘나들어 본 글들이라는 것도.
문제는 그 경계를 독자가 아니라, 쓰는 사람이 먼저 알게 되었을 때 생긴다. 아직 자기만의 언어가 충분히 나오지 않았는데, 이미 기준부터 몸에 들어와 버린다. 그러면 글은 자연스럽게 위축된다.
나는 지금의 시기를 이렇게 기록한다. 써야 할 것보다, 쓰지 말아야 할 것이 훨씬 많아졌던 시기라고.
천강문학상 수필들과 내 수필들을 나란히 놓고 보았을 때, 그 차이는 분명했다.
「은행나무 한 그루」, 「딸기꽃」, 「귀리」 세편의 수필을 적었다.
이 글들은 장면이 선명했고, 비유는 생활에서 길어 올린 것이었으며, 감정은 과하지 않았다. 독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글이 서 있는 위치는 달랐다.
천강문학상 수필들은 대체로 한 발 더 들어가 있었다. 존중을 선택하기 전에 먼저 흔들렸고, 이해에 도달하기 전에 불편해지는 지점을 통과하고 있었다. 삶을 예쁘게 정리하지 않았고, 말끔하게 봉합하지도 않았다. 독자가 고개를 끄덕이기 전에, 잠시 멈추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 차이는 추상적이지 않았다.
나는 몇몇 수필의 장면 앞에서 오래 멈춰 있었다.
예를 들어, 오래 돌보던 가족을 요양원에 맡기고 돌아오는 길을 다룬 글이 있었다. 그 글은 선택의 불가피함을 설명하면서도, 그 결정이 가져온 안도감을 숨기지 않았다. 돌볼 수 없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버티기 싫어서였다는 마음을 조용히 드러냈다. 효율과 합리라는 말 뒤에 가려진 편안함을, 작가는 끝내 지워주지 않았다.
또 다른 글에서는 장례를 치르고 난 뒤, 남은 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식탁에 앉아 반찬을 집는 장면이 나온다. 글은 슬픔을 강조하지 않는다. 대신, 생전에 하지 못했던 연락을 끝내 미뤄두었던 자신을 바라본다. 바빴다는 말로 덮을 수 있었지만, 그 바쁨이 사실은 책임을 미루는 방식이었음을 조용히 인정한다.
이 장면들의 공통점은 분명했다. 누군가를 고발하지도, 스스로를 과하게 자책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자신에게 유리한 해석을 끝까지 허락하지도 않았다.
그 지점에서 나는 멈췄다. 나였다면, 아마 그 문장 하나를 덜 썼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설명 대신 비유를 넣고, 판단 대신 여백을 남겼을 것 같았다.
「은행나무 한 그루」에서 나는 시간을 떠올리지만, 그 시간을 만든 선택의 책임까지는 들어가지 않는다. 「딸기꽃」에서는 감정을 다스리는 태도를 말하지만, 왜 그렇게까지 잘라내야 했는지는 묻지 않는다.
「귀리」에서는 존중과 버팀을 말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가 느꼈던 분노와 의심은 끝내 드러나지 않는다.
글은 단정했지만, 판단은 유보되어 있었다.
내가 못 쓰게 된 이유는 천강문학상 수필들이 너무 잘 써서가 아니라, 그 글들이 이미 ‘한 번 더 들어간 자리’에서 쓰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지 않았다는 것도.
잘 쓴 수필은 감정을 절제한다. 설명을 아끼고, 판단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절제는 처음부터 가능한 태도가 아니다. 수많은 과잉과 실패, 서투른 고백과 잘못된 판단을 지나온 뒤에야 가능한 위치다. 우리는 그 과정을 보지 못한 채, 결과만 먼저 만난다.
그래서 잘 쓴 수필을 읽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흉내부터 낸다. 문장을 짧게 자르고, 결론을 부드럽게 만들고, 감정을 한 발 뒤로 물린다. 그러다 보면 글은 그럴듯해지지만, 정작 써야 할 자신의 이야기는 더 멀어진다.
나는 한동안 글을 쓰기 전에 이미 스스로 탈락 판정을 내리고 있었다. 이건 아직 수필이 아니고, 이건 너무 날것이고, 이건 기준에 못 미친다고. 그 기준은 내 안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방금 읽은, 아주 잘 쓰인 수필들에서 가져온 기준이었다.
이처럼 잘 쓴 수필이 글을 막는 이유는, 그 글들이 틀려서가 아니라 너무 완성되어 보이기 때문이다. 독자는 그 완성도를 읽지만, 쓰는 사람은 그 완성도 앞에서 자기 삶을 비교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아직 쓰지 않은 이야기들이 하나둘 뒤로 밀린다.
그래서 여기에서 말하고 싶다. 잘 쓴 수필을 읽고 더 못 쓰게 되는 건, 당신이 뒤처져서가 아니다. 오히려 당신이 적은 글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진지하게 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준이 생겼고, 그 기준을 함부로 넘지 않으려는 태도가 생겼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기준을 너무 빨리 자기 것으로 삼았다는 데 있다.
기준이 언제는 나를 돕고, 언제 나를 막는지, 그리고 흉내를 멈추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오는 시간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완성도를 내려놓자는 말은 아니다. 다만, 완성보다 먼저 지나가야 할 구간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