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이 나를 돕는 순간, 나를 막는 순간

by 네로

*표지의 사진은 AI를 통해 만들어졌습니다(키워드: 멀리 보이는 바다, 풀내음이 날 것 같은 풀숲, 그리고 그 사이의 오래된 노트와 만년필).


내가 수필 앞에서 가장 자주 멈춘 순간은, 쓸 이야기가 없을 때가 아니라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이야기를 꺼내려할 때였다.


노트북을 켜고 제목을 적어놓은 채, 커서를 깜빡이게 둔 채로 오래 앉아 있던 날들이 있다. 나는 보통 수필 한 편을 적을 때는 제목을 적고 나면 쉬지 않고 적어 내려 간다. 초고를 마칠 때까지. 이야기의 끝도 알고 있었고, 어떤 장면을 써야 할지도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 장면은 이미 여러 번 머릿속에서 정리되어 있었다.


그런데 첫 문장을 쓰지 못한 나날이 있었다. 그때 내 안에서는 이런 말이 먼저 나왔다.

이건 너무 직접적이지 않은가.

이렇게 쓰면 감정에 기대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이건 수필이 아니지 않나.


그래서 나는 더 오래 앉아 있었다. 문장을 고치지도, 버리지도 못한 채.


한 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이미 한 문단을 써놓고, 다시 읽다가 통째로 지웠다. 문장이 나빴던 것도 아니고, 표현이 서툴렀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문단이 너무 바로 들어가 있었다. 독자가 바로 상황을 이해해 버릴 것 같았고, 감정이 곧장 전달될 것 같았다.


나는 그게 두려웠다.

설명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 문장, 비켜갈 수 없는 감정 앞에 독자를 세우는 방식이. 그래서 나는 한 발 물러섰다. 비유를 하나 더 넣고, 장면을 한 겹 더 감싸고, 결론을 조금 늦췄다. 글은 훨씬 안전해졌지만, 처음에 쓰려던 이유는 사라졌다.


내가 책임 때문에 멈춘 게 아니라, 기준 앞에서 멈춰 섰다.


그 기준은 이렇게 속삭였다.

사람들에게 남는 수필은 이렇게 쓰지 않는다.

이 정도는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조금 더 숙성시킨 다음에 써도 늦지 않다.

문제는, 그 ‘다음’이 쉽게 오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월, 수,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