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의 이미지는 생성형 AI를 통해 만들었습니다(키워드: 멀리 보이는 바다, 풀내음이 날 것 같은 풀숲, 그리고 그 사이의 오래된 노트와 만년필).
제목과 첫 문장은 단순한 시작이 아니다. 그 문장은 이 글이 무엇에 대해 말할 것인지뿐 아니라, 어디까지 들어갈 것인지를 함께 선언하는 자리다. 그래서 첫 문장을 쓰는 순간, 우리는 이미 이 글의 책임을 떠안게 된다. 이 이야기를 끝까지 끌고 갈 것인지, 중간에 물러서지 않을 것인지, 독자를 어느 지점까지 데려갈 것인지까지.
그래서 나는 제목과 첫 문장 앞에서 꽤 오래 망설인다. 이 문장을 쓰는 순간,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아서다.
예를 들어, 가족 이야기를 쓸 때 그랬다.
나는 20대 중반에 위암을 앓았고, 30대 초반에 뇌종양을 앓게 되었다. 특히 뇌종양은 현재 탁구공만 한 크기에, 조금씩 커지고 있어서 두통과 어지럼증, 구토 등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있다. 하지만 아내를 제외하고는 가족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이미 우리는 무면허 운전자의 과실로 교통사고를 당해서 3년의 간병생활을 했고, 심신이 고단해져 있었으며, 얼마 전엔 감염으로 인해 결국 가족을 잃었다. 그 상황에 부모님께 투병을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지만, 아버지는 어떻게 알게 되신 모양이었다. 나는 이것을 수필로 적어내려 했다.
“그날,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문장은 사실 아무 문제도 없다. 차분하고, 과하지 않고, 흔히 볼 수 있는 시작이다. 그런데 이 문장을 쓰는 순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이 글이 결국 어디로 가게 될지를. 침묵의 이유, 말하지 않은 감정, 그 말하지 않음이 남긴 책임까지.
그래서 나는 이렇게 고친다.
“아침, 공기 속에는 밤새 머금은 이슬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
문장은 더 아름다워지고, 시작은 부드러워진다. 그러나 동시에, 글의 핵심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나는 늘 이렇게 시작을 늦춘다. 아니, 시작을 늦추는 것이 아니라, 결정을 늦춘다.
첫 문장은 수필의 방향을 정한다. 그리고 방향이 정해지면, 도중에 멈추기 어렵다. 나는 그 확정이 두렵다. 그래서일까. 노트북 앞에서 나는 자주, 첫 문장을 쓰지 않은 채 두 번째 문장을 상상한다. 혹은 마지막 문장을 먼저 떠올린다. 시작을 피해 다니는 셈이다. 글을 쓰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글이 나를 어디까지 데려갈지 알고 싶지 않은 상태에 가깝다.
잘 쓴 수필들을 읽고 나면 이 공포는 더 커진다. 당선작들의 첫 문장은 대체로 조용하지만 단단하다. 설명하지 않고, 예고하지 않으면서도 이미 깊숙이 들어가 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독자는 그 글이 어디까지 갈지를 어렴풋이 감지한다.
나는 더 조심스러워진다. 아직 다녀오지 않은 곳을, 문장으로 먼저 열어버릴까 봐.
첫 문장을 쓰지 못한다는 건, 아직 그 이야기를 쓰지 말아야 한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 이르게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책임과 기준이 뒤섞이는 지점이다. 이 이야기를 내가 해도 되는지 묻는 순간과, 이 이야기가 이미 잘 쓰인 이야기인지 비교하는 순간이 동시에 찾아온다.
제목(혹은 가제)을 적어놓고, 날짜를 쓰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노트북을 닫는다. 글은 시작되지 않았지만, 실패하지도 않았다. 아직은 가능성이 남아 있으니까.
첫 문장을 쓰지 않는 한, 그 가능성은 계속 가능성으로만 남는다.
글은 시작되지 않으면, 끝내 틀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발전 또한 없다.
그리고 나는 그 무오류의 상태에 오래 머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