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의 이미지는 생성형 AI를 통해 만들었습니다(키워드: 멀리 보이는 바다, 풀내음이 날 것 같은 풀숲, 그리고 그 사이의 오래된 노트와 만년필).
글을 쓰다 자주 막히는 이유는 문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문장이 너무 매끄럽게 나왔을 때, 내 손은 먼저 멈춘다. 그 문장이 다음 문장을 강력하게 요구할 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예감이 들면 나는 차라리 그 문장을 지워버리곤 했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이다.
“그때 나는 옳지 않은 선택을 했다.”
이 문장은 군더더기를 거부한다. 상황 설명도, 비굴한 변명도, 감정의 경과도 필요치 않다. 하지만 이 문장을 쓰는 순간, 글은 ‘이해받는 이야기’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글’로 방향을 튼다. 나는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문장을 고쳐 쓴다.
“그 선택은 당시로서는 최선처럼 보였다.”
문장은 부드러워지고, 독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누구도 불편하지 않고 나 자신도 다치지 않는다. 글은 단정해지지만, 본질에서는 그만큼 멀어진다.
다른 문장도 있다.
“나는 아직도 그 사람을 용서하지 못했다.”
이 문장은 무수한 질문을 불러온다. 왜 용서하지 못했는지, 지금 상태는 어떤지,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지. 나는 그 질문들 앞에 오래 머물 자신이 없다. 그래서 다시 문장을 바꾼다.
“시간이 지나며 감정은 조금씩 다른 형태로 남았다.”
‘남았다’는 말은 편리한 가면이다. 용서인지, 포기인지, 방치인지 교묘하게 가려준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안전한 자리에 글을 놓아두는 것이다.
가족 이야기를 쓸 때면 검열은 더 가혹해진다.
“그날, 나는 아버지가 미웠다.”
분명한 사실이지만 곧바로 지워진다. ‘미움’이라는 단어는 관계를 흔들고 설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이렇게 쓴다.
“그날의 침묵은 오래 남았다.”
침묵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미움은 풍경이 되고 감정은 기후처럼 지나간다. 솔직해질 것 같은 문장들을 덜어낼수록 나는 좋은 사람으로 남는다. 비유는 공교해지고 결론은 유보된다.
가족 이야기가 유난히 힘든 건, 그 이야기가 과거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지나간 일 같지만 지금도 같은 목소리를 듣고 같은 관계 속에 살고 있다. 글을 쓰는 순간 가족은 내 글 속의 ‘등장인물’로 고정되는데, 살아있는 사람을 문장 속에 가두는 일은 늘 주저함을 만든다.
존중으로 끝낼지, 미움으로 남길지, 혹은 침묵할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마다 나는 길을 잃는다. ‘이해’라는 단어에 기대어 나의 분노와 답답함을 지워버리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한다. 독자를 편안하게 만들기 위해 나는 가족을 늘 ‘이해받아야 할 사람’ 혹은 ‘시대의 희생자’로 포장하곤 했다. 그 설명 아래에는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침전물처럼 남았다.
마무리하며: 살아있는 문장으로 돌아가는 길
내가 선택한 안전한 방식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장면 뒤에 숨는 것이 최선이라 믿어왔다. 가족 이야기가 어려운 이유는 감정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감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지금도 문장을 쓰다 멈추고 지웠던 문장들을 다시 읽어본다. 내가 지운 그 날카로운 문장들이야말로 언젠가 내가 다시 돌아가야 할 자리다. 이 막막함과 지체됨은 내 글이 비겁하다는 증거가 아니라, 내 안의 이야기가 여전히 뜨겁게 살아있다는 증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