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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이 Aug 22. 2024

가위

어떤 수다쟁이

나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단순히 수다쟁이의 문제가 아니라, 무의미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시간을 끄는 사람(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겠다)은 딱 질색이다. 말 많은 택시운전수만큼 피곤한 사람은 없다. 제발 조용히 해주었으면. 나에게 신경을 꺼주었으면. 보통 나와 같은 유형의 사람들은 대게 사람이 많은 곳을 꺼려한다. 몇 년 전 나는 브래지어 후크까지 머리를 길렀고(그게 최대 길이였다) 스웨터 안으로 머리카락이 찌르는 것을 도저히 견디지 못해 숏컷으로 자르기로 마음 먹었다. 그 길로 바로 미용실로 갔다. 나는 실행력이 빠른 유형의 사람이었기에. 


원장은 자꾸 내 머리칼을 한 움큼 잡고 들었다 놨다 하면서 잘라도 괜찮겠느냐고 여러 번 물었다. 이런저런 자신의 수다를 늘어놓으면서. 나는 좀 짜증이 났지만 괜찮으니 잘라달라고 말했다. 싹둑, 하는 소리와 함께 긴 머리카락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나는 내 머리카락이 시원하게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싶었고 서늘한 가위의 감촉과 소리를 누리고 싶었다. 거울 속 원장은 꼭 비명이라도 지르듯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삭발을 하겠다고 하면 기절이라도 할 태세였다. 머리카락이 뭐 어쨌다는 거야. 


“학생이에요?”

“머리카락은 왜 잘라요?”

“아~ 그러셨구나 그래도 아깝지 않아요?”

“남자친구 있어요?”

“어머 그랬구나.” 


나는 점점 무표정이 되어갔다. 제발 그 입 좀 다물어주었으면. 기업인이자 요리연구가인 백종원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단골손님이 오면 제발 아는 척하지 말라고, 챙겨주고 싶으면 테이블에 음료수나 몇 개나 올려놓고 가라고. 제발, 제발 말 걸지 말라고. 그걸 저 원장이 알고 있으면 좋을 텐데,라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옷가게도 마찬가지다. 발꿈치를 물어뜯으려는 강아지처럼 잰걸음으로 따라오는 매장 직원은 정말이지 질색이다. 옷을 고르라는 걸까 말라는 걸까. 그것이 서비스 직종의 기본소양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개인적으로 나는 종합병원 간호사들의 약간 까칠하고 간결한, 불성실해 보이는 어조의 말투를 좋아하는 편이다. 타격이 없을 뿐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훨씬 편하게 느껴졌다. 왜 그럴까라고 생각해 보았는데 그것이 더 진정성 있게 느껴져서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그어놓은 경계를 억지로 비집고 들어오려는 사람을 보면 거부감부터 들었다. 언제부터 이런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을까?


몇 년 전 서울에서 기자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신입이었고 자신을 선배라고 지칭하라고 했던, 줄담배를 연거푸 피우던 수석기자가 자신의 사생활을 늘어놓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고 확신한다. 탕비실에서든 점심시간이든 시간만 났다 하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처음엔 그 사람이 외로운 사람이라서라고 생각했다가 나중에는 나를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그 어쩌지 못하는 시간과 맹해 보이는 나를 적절히 섞어 쓰레기통으로 만들려는 심산이었던 거지. 그 사람은 쓸모없는 종이를 구겨 뭉치듯 자신의 이야기를 나에게 던져댔던 거다. 나는 그것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뒤부터 나는 상대방의 말을 가위처럼 싹둑 자르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그것은 나의 방어이자 스스로를 적절히 지키는 수단 중 하나가 되었다. 자르지 않으면 끈질기게 따라왔기에. 그 장단에 더 이상 놀아줄 마음이 없었다. 그것은 경우가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류의 사람들은 커다란 인형을 앞에 두고 종일 떠들게 만들어놔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신만 외로운 게 아냐, 당신만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아냐, 당신의 이벤트만 중요한 것이 아니야 이 예의 없는 사람아.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기에 나는 가위를 들었다. 그 편이 나았다. 어차피 당신은 내게 관심이 없었잖아.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또 다른 당신이 필요했던 거겠지. 나는 잔뜩 비뚤어졌다. D를 만나기 전까진 말이다. 


D는 말 수가 없었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목소리가 높거나 낮거나 하는 음역대보다는 약간 느리고 여유로운, 느긋한 속도감이 좋았다. 몇 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나는 직감했다. 동류다! 그는 나와 동류임이 확실했다.

 

“넌 나랑 비슷한 것이 참 많네.” 


나는 그 말에 가슴이 뛰었다. 흥분했다. 누군가에게 잔뜩 기대를 하기 시작한 건 D를 만난 이래 처음이었다. 엉덩이에 코를 들이박고 냄새를 맡는 강아지처럼 나는 그에게 그렇게 굴었다. 어쩌면 당황했을 법했을 텐데도 그는 침착하고 느긋했다.(그런 척을 한 건지는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여러 곳을 다녔다. 공터, 카페, 전시관, 서점, 백화점, 도서관, 병원, 분식점, 꽃집, 절, 공사장, 팬시점, 바닷가, 성당 등 생각해 보니 꽤 많았다. 그곳에서 우리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고 나는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시립도서관에서 월간 낚시집을 꺼내보며 소리 죽여 웃는 것은 우리밖에 없을 거라고 D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D가 사는 집에 갔을 때 우리는 섹스를 했다. 삐죽 튀어나온 발을 보고 그가 말했다.


“넌 발도 예쁘네”


다정한 그의 말이 좋았다. 그 말이 꼭 내게 길거리에 난 들꽃을 다발로 꺾어 건네주는 것 같아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D의 발은 못났다.(미안) 특히 발등은 특이했다. 꼭 벌에 쏘인 것처럼 발등이 둥그스름하게 부풀어 올라있었다. D는 자신의 발등을 몹시 싫어했지만 나는 그에게 세상에서 그런 발등을 가진 사람은 너밖에 없을 테니 유니크하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겠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누군가와 연애하면서 단 한 번도 사귀기 전에 섹스를 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나만의 룰이었다. 이제부터 너와 나는 사귀는 사이야. 그러니 앞으로 섹스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 나는 D와 아무런 약속을 한 적이 없다.(뒤늦게 그것을 깨닫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이런 모호한 관계가 있나? D와 나는 친구처럼 지냈지만 섹스를 했고 그렇다고 파트너도 아니었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대화를 나누었기에. 일을 치르고 옷만 입고 서로 배웅도 없이 잘가,라고 했다면 그런 관계로 규정지을 수 있겠지만 D와 나는 그런 관계는 아니었다. 우리는 월간 낚시집을 보며 종일 킬킬거렸고 그걸 보고서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돌아와 섹스를 했다. 우리는 그런 약속 없는 즐거운 관계였다고 나는 결정짓기로 했다.


나는 삼십몇 년을 산 이래로 누군가에게 먼저 내 이야기를 털어놓은 적이 없다. 늘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역할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최초로 깨졌다. 언젠가부터 나는 D에게 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D는 늘 그렇듯 여유롭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대화가 즐거워서 나는 신이 났고 신나게 움직이는 내 비틀린 입술을 보면서 어쩐지 불안해졌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다. D가 불편해하면 어쩌지? 나는 꼭 말 많은 택시운전수가 된 것 같았다. 그 수다쟁이 미용사가, 줄담배 피우던 선배 기자가 생각났다. 혹시 그 사람들도 나처럼 그랬던 걸까? 그래서 나는 이따금씩 묻곤 했다.


“나랑 얘기하는 것 말이야. 어때?”

“어떻냐니?”

“그러니까...”

“즐겁냐고?”

“응”

“즐거워.” 


D는 내가 설명하기도 전에 내 질문을 알아채고 대답하는, 나와 죽이 잘 맞는 동류임이 틀림이 없었다. 그는 사려 깊고 다정했다. 하지만 싸우고 나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그가 “네 이야기를 들어줬잖아”라고 말해버렸을 때 나는 주저앉아버렸다. 나는 그에게 내 이야기를 종이처럼 구겨 던진 것이 아니었는데... 그는 순식간에 나의 쓰레기통이 돼 버렸던 것이다. 나는 소리 내어 울었다. 내가 속으로 무시하고 경멸해 왔던 그 수많은 수다쟁이 속에 내가 속해버렸으니. 나는 그의 발등을 물어뜯고 싶었다. 


“잘 지내”


나는 D에게 마지막 문자를 했다. 

너는 나를 특별하다고 말해줬지만 그게 아니라 실은 당신이라는 사람이 사려 깊은 사람이어서, 적절한 때에 가위를 들지 못해서 그랬다고 생각해. 그것을 사랑이라고 포장했지만 그것은 사랑도 그 무엇도 아님을 나는 알아. 너는 나와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는 걸. 나는 그의 빌라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내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녹슬어 있던 가위날이 여름볕에 반짝였다. 나는 슬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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