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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이 Sep 12. 2024

꽈당

밤송이

나는 자전거 타는 것이 취미다. 등을 펴고 페달을 밟아 나갈 때마다 풍경이 양옆으로 흐트러지며 지나가는 것이 좋았다. 가끔 맞바람이 칠 땐 곤란했지만 대체적으로 자전거를 타면 능동적으로 바람을 가르고 나아간다는 감각을 지울 수 없다. 오르막을 오를 땐 수영하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기도 한다.

어제는 시도 에세이도 도통 쓸 수가 없어서 책을 펼쳐 들었는데 한 글자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걸 깨닫고 가방에 노트북을 구겨 넣고 일어섰다. 안 되겠다 나가자!


가을볕은 어마무시했다. 죽어가는 여름이라 그런가 독이 잔뜩 올라 정수리부터 보이지 않는 곳까지 말라 죽일 작정으로 내리쬐고 있었다. 나는 500m도 채 가지 못하고 지친 느낌이었다. 카페까지 가려면 아직 한참 멀었는데…. 배낭에 든 건 노트북 하나뿐인데도 천근만근이었다. 이럴수록 더 힘을 내야지 여름, 네가 더워 봤 진짜 독 오른 여름은 9월 말에 태어난 나란 말이야. 나는 이상한 명언 같은 걸 곱씹으면서 잔뜩 독이 올라 있는 힘껏 페달을 밟아 나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아도취를 했는지 뭐에 씌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나는 코 앞의 밤송이 무더기를 보지 못하고 나아가고 있었다.

 

자전거가 밤송이 몇 개를 타고 넘어가면서 뭔가 어그러졌는지 속도를 입은 채 순식간에 비틀거리면서 방향을 잃고 쓰러졌다. 나는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넘어졌다. 어안이 벙벙했다. 어떤 자세로 넘어졌는지조차 기억이 안 난다. 바로 어제 일인데! 짐작해 보건대 왼쪽 허벅지가 밤송이 가시에 짓눌려 박혀있던 걸로 보아 앞으로 고꾸라지듯 넘어진 것 같다. 꼭 엎드려서 책을 읽는 자세처럼. 왼쪽 무릎과 오른쪽 팔꿈치도 긁혀 있었다. 삼십 대 후반을 달려가는 이 마당에 이런 꼴로 넘어지다니. 웃겼다. 꽤 아팠지만 사실 당시엔 속으로 웃고 있었다. 미쳤다 정말 몇 년 만에 넘어져보는 거야 이게.

 

나는 자전거 타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초등학교 3학년 즈음에 동네 언니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고 언니와 동생이 자전거를 타다가 다리나 도로 가변에 굴러 떨어질 때도 오직 나만이 숙련된 자세로 실수 없는 성공적인 기록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중엔 두 손을 놓고 탈 수도 있게 됐다. 그랬던 내가 7년이 지나 보도블록 위에서 밤송이와 뭉그러져있는 꼴이란. 너무 웃기고 황당하고 재밌기까지 했다. 그래, 인생은 진짜 알 수가 없다.

    

 딸 셋 중에서 내가 제일 공부를 잘했고 인기가 많았다. 학창 시절엔 잘 나갔다. 대학 시절도 나쁘지 않았다. 유일하게 장학금을 타 왔던 것도 나였으니. 하지만 지금은 완전 역전이 됐다. 나는 셋 중 가장 빌빌거리는 아무것도 없는 개털 신세가 됐다. 엄만 아직도 나를 보면서 어쩌다 네가 이렇게 됐느냐고 한다.

저라고 이렇게 되고 싶었겠어요. 이제는 누구나 그럴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잘 나가던 당신도 오늘의 나처럼 이렇게 꽝, 하고 넘어지게 될 것이라고. 악담도 저주도 아니다. 그냥 자연스러운 일일 거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은 홀로 아이를 키우고 우울증 약을 먹으면서 하루하루를 버티듯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이 계절도 곧 끝이 난다고 그렇게 스스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운다. 오늘도 내일도 울 것이다. 우는 게 뭐 나쁜가.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글을 쓴다. 쓰고 있다. 쓸 수 있는 건 다 쓴다. 악다구니를 쓰고 발버둥을 치고 멱따는 소리를 하고 몸을 걸레처럼 쥐어짜면서 쓴다. 할 수 있는 건 해야지.


넘어졌던 당일날은 아무렇지 않더니 다음날인 오늘이 돼서야 온몸이 쑤셔 온다. 다친 곳을 살펴보니 시퍼렇게 멍자국이 번져가고 있다. 넘어지면서 정신이 번쩍 뜨인 모양인지 오늘은 그나마 좀 글이 써지는 것 같다. 이렇게 한 자 한 자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으니. 넘어지는 것이 꼭 나쁘지만은 않구나. 이런 생각은 억지로 쥐어짜듯 생각해 내는 긍정이 아니라서 마음에 든다. 나는 솔직한 것이 좋으니까. 나는 내일도 자전거를 탈거고 글을 쓸 것이다. 그것이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에. 남들이 보든 안 보든 쓴다. 막 쓴다. 그러다 또 무언갈 밟고 넘어질 수도 있겠지. 괜찮다. 이미 겪어봤다. 넘어지면서 박히는 밤송이 가시는 주삿바늘보다 더 예리했다는 것. 정말 아프다는 것.


그런데 밤송이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카페가 휴무였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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