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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카롱 Aug 03. 2024

은광

이름을 가진 남자 (단편소설)

그의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할 때 여자들은 낄낄대며 웃음을 참았다. 저도 모르게 좋아서 웃는 여자들의 웃음 속에 은광은 돌연간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 팔뚝, 다들 봤어?"

"대단하더만! 그 나이에!" 하다가도 "야야야, 여기서 세워줘"하는 한 여자의 다급한 목소리에 은광은 잠시 사라지기도 하고 한 동안 잊힌 듯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은광은 어느 날 불현듯 여자들에게 소환되곤 했다.

은광이 주기적으로 여자들의 화제에 오르내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은광의 집 옆에 시골집을 마련한 기숙의 모임에 입담 좋기로 유명한 정미가 은광의 실물을 보았기 때문이다. 은광의 이름이 그들 여자들 모임에 구체적으로 등장한 것도 정미가 은광을 보고 난 주말 직후부터였다. 그 이전까지 이웃으로만 표현되던 그 사람은 이제, 은광이 되었다.


이름을 가진 남자는 마침내 그들 모두가 아는 사람처럼 생생하게 살아 움직였다.


싱글인 기숙이 일주일마다 내려가 텃밭을 돌보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에피소드들, 화초를 옮겨 심어 마당을 꾸민 수고와 정성, 텃밭의 김매는 어려움이며 수확이나 이웃과의 나눔, 집 근처 실개천의 물길이 바뀐 장마 이야기에 은광은 반드시 등장했다. 은광이 단지 기숙의 이야기에만 있는 남자였으면 얘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늦은 여름 어느 주말, 정미가 남편이 출장을 간 사이 기숙과 함께 시골집에서 하룻밤을 지낸 이후였다. 기숙의 이웃으로만 그려진 은광은 정미의 입을 통해 걷기 모임 일원 모두에게 유명인이 되고 말았다. 끝내! 늦가을 정미는 모임의 여자 명을 모두 이끌고 기숙의 시골집으로 향했다.

" 우리가 먹을 건 우리가 다 준비해서 내려갈게." 알았노라는 기숙의 인사말 끝에 정미는 "은광 씨가 구워주는 고기, 기대한다."라고 말하며 킬킬거리자 기숙은 제발 그만둬라 정색했지만 싫지만은 않았다. 점심시간을 지나 도착한 정미와 네 명의 친구들이 분주히 차에서 내릴 때 기숙 뒤 멀찍이 밭에서 서성이는 은광이 보이고 여자들은 자신의 차림새를 훑어가며 가벼운 목례를 했다. 방으로 들어선 여자들이 짐은 풀지도 않은 채 눈썰미만큼 보았을 은광의 첫인상을 주고받으며 웃었고 기숙은 말린 꽃 차를 내왔다.

"이런 거 말고, 바로 고기 굽고 저녁먹어야지." 정미가 깔깔거리자 기숙은 눈을 흘겼지만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네 시반을 넘기며 기숙이 마당에 고기를 구울 채비를 하자 정미와 여자들은 입을 꾹 닫고 눈치껏 알아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마당 평상위 상이 얼추 차려질 때 붉은 체크무늬 셔츠에 길고 검은 앞치마를 두른 은광이 여지없이 나타났다. 그들 모두는 말로만 듣던 이웃집 남자 은광을 흘끗 거리며 눈이 마주치기를 기대했다. 듣던 대로 기숙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은광의 얼굴, 붉은색 셔츠 차림, 검은색 긴 앞치마도 모두 눈으로 확인하는 날이었다.


시골동네 보기 드문 젊은 축의 은광이었다. 기숙과 정미가 들려준 대로 고기 굽는 일이라면 반드시 나타나 도와주고 정리까지 살펴준다는 은광이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많은 분들이 오셨네요." 하며 차분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바로 셔츠의 소매를 걷어올리며 고기 굽는 태세를 했다.

"고기는 충분한가요?" 은광이 기숙을 향해 다정하게 묻는 모습을 보던 여자들이 서로 눈짓을 교환하고 삐죽이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주고받았다.


잠시 후 정미가 " 전에도 뵀었죠?" 하며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로 불판에 몰두한 은광을 불렀을 때 불빛에 비친 은광의 그을린 구릿빛 피부는 매우 건강하고 이국적으로 보였다. 은광은 짧게 네라고만 했다.

"고기 굽는 솜씨가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리로 와서 같이 드세요."라고 정미가 이어갔지만 은광은 고개를 끄덕일 뿐 말을 이어가지도 옮겨 앉지도 않았다. 여자들은 평소 운동이 끝나고 고깃집에서 보이던 왁자지껄한 자신들의 모습을 감추며 눈짓과 젓가락질만 이어갈 뿐이었다.

조금 뒤 그런 적막을 은광이 어색하게 느꼈는지 기숙을 잠깐 쳐다보며 가벼운 신호를 보내더니 두꺼운 목살을 올려놓곤 자신의 집으로 빠르게 뛰어 들어갔다.


모두가 일제히 쌈을 든 채로 은광의 뒷 태를 바라보았다.

"뭐, 뭐야? 왜 갑자기 들어가셔?" 정미가 바로 일어나 기숙에게 귓속말을 했으나 모두가 들었고 은광도 들을만한 크기였다. 기숙이 뭔가 알고 있는 듯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기다려보라고 일렀다.

잠시 후 은광의 집 처마에서 작은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음악소리에 여자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잔을 부딪혔다.

밖으로 나온 은광은 계속 고기를 구울 뿐 먹지 않았다. 채근하는 정미에게 대꾸는 하지 않으면서도 기숙에게는 작은 고갯짓들을 했는데 기숙에겐 익숙한 신호 같았다. 정미는 수시로 은광과 기숙을 훔쳐보았다.


마지막 고기가 다 구워질 때쯤 은광은 모두에게 졈쟎게 인사를 하곤 불을 정리했으며 자신의 집으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처음엔 은광 앞에서 조신한 듯 말이 없던 여자들은 술 서너 잔에 목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으며 행복한 표정으로 음악소리에 맞춰 흥얼거리기도 가까운 이와는 속삭이기도 했다. 선선해진 가을밤 아래 이게 행복이라는 말에 잔을 부딪히며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오전 일찍 정미의 차에 오른 그들은 부스스한 얼굴을 감추며 기숙을 떠났다. 기숙이 그들을 배웅할 때 여자들은 나머지 이야기는 나중에 서울서 해달라며 넌지시 기대감을 보였다. 서울로 향하는 정미의 차에선 기숙의 결단만이 남은 것처럼 모두가 호들갑을 떨었다.


은광은 말수가 적어 태생이 졈쟎아 보이는 데다 자신이 운영하는 펜션의 일거리며 주변 작은 텃밭까지 깔끔히 돌보는 아주 근면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인물이 좋고 다부진 몸에 군살 없이 건장했다. 은광의 펜션은 크지 않은 규모에 늘 방문객이 있는 것이 아니고 텃밭도 혼자 건사할 정도의 크기여서 은광은 전원생활을 멋지게 해내는 오십을 얼마 앞둔 중년사내로만 보였다. 은광의 집은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기도 했고 터가 제법 넓었으며 기숙보다는 3년을 먼저 구입했었고 서울에서 이전한 지는 6개월 빠르다고만 알려져있었다.


정미와 일행이 다녀간 뒤 기숙의 지인들은 하나같이 은광을 더없이 멋지다고 감탄을 하며 소녀들처럼 깔깔거렸다. 기숙이 전하는 은광과의 에피소드는 단지 이웃의 밭일이나 고구마 혹은 가을배추와 함께 등장했지만 한 번 은광을 본 이들은 모두 의자를 끌어 앉으며 기숙에게 귀를 기울여 붉은색 체크무늬 남방과 청바지의 그를 그려냈다.


해가 바뀐 봄, 기숙은 서울살림을 모두 청산하려던 마음을 모두 바꾸었다. 자신의 지인들을 주말마다 불러 여행하는 기분을 내거나 더러는 열쇠를 내주기도 하며 그들의 반응도 살폈었다. 처음엔 자신이 일군 백오십 평의 시골집 풍경에 자랑스러운 마음도 적지 않았으나 날이 갈수록 그 열기는 시들해졌고 노동의 혹독함은 낭만을 잊게 했다. 처분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는 즈음이었다. 주변 사람들도 주말에 하루이틀 지내기엔 딱 좋은 장소라는 말 외엔 다른 말을 못 했지만 은광이 등장할 땐 저마다 보고 겪은 것에 이러저러한 해석을 덧붙이며 목소리를 키웠다.

처분해야 한다는 생각에 골몰하던 겨울 동안 기숙은 시골집을 내버려 폐허 같은 냉골집으로 만들었다.


을씨년스럽게 바뀐 시골집에 두 달 만에 내려간 기숙이 마당에 주차를 하자마자 은광이 집에서 뛰어나왔다. 반가이 맞이하는 은광의 급한 걸음에 마음이 설레었다. 기숙도 정말 반가운 마음이 들었고 그동안 보고 싶었었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밀려왔다. 거의 손을 잡을 뻔하던 은광이 처음으로 기숙의 집안으로 발을 디뎠다. 냉골에 이것저것 손을 봐야 할 집의 여기저기를 보던 은광이 구서구석 관심을 보이며 마치 집을 보러 온 사람처럼 꼼꼼히 집을 살폈다.


"손 볼 게 참 많네요." 은광의 말이 독백처럼 들렸다. 은광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갸웃했고 기숙은 자신의 살림이 훤히 다 보인 것이 부끄러워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금 뒤 추운 곳에 계속 계실 수는 없지 않냐며 자신의 집으로 옮겨가자고 하는 은광이 한껏 염려하는 표정으로 기숙의 어깨를 돌려 안으려는 몸짓을 할 때 기숙은 소녀처럼 부끄러웠다. 시골집 처분을 망설이는 이유가 이것 때문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는 찰나 은광이 처음으로 기숙을 자신의 식탁으로 초대한 것이다. 마당의 평상에서 마주한 식사는 서너 번 있었지만 신발을 벗고 그의 집에 들어섰던 것은 처음이었다.

"일단 냉기가 사라지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니 저희 집에서 식사하시면서 기다리시지요."


주방은 정갈했으며 8인용 식탁은 우아했다. 펜션이라고 찾는 사람들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가 보다 짐작했다. 평소 기숙이 좋아하는 소고기와 다양한 야채가 섞인 샐러드는 고급스러웠지만 단 둘이 있는 긴장감에 평소처럼 입에 들어가지 않았다. 먹지 못하는 기숙을 살핀 눈치 빠른 은광이 일어나 음악의 볼륨을 키웠다. 은광의 따뜻한 배려에 기숙은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젓가락을 움직였다.


기숙은 고개 숙여 음식을 입에 넣는 은광을 살펴보며 세월을 가늠했다. 은광을 30대에 알았더라면! 아니 40대에만 만났어도!라는 생각은 이미 해 본 기숙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오십대로 보이는 얼굴의 흔적들을 떠올리며 천천히 음식을 씹었다.


은광은 기숙에게 더없이 은혜로운 남자였다. 기숙의 시골집이 갖추지 못한 펜션의 물건들을 은광은 눈치껏 내주기도 하고 필요한 것 있으면 부르라는 말을 건넨 뒤 사라지기도 했다. 그동안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그의 호의는 기숙에게 주말의 활력이 되었다.


기숙이 방치한 시골집 관리에 어려움을 이야기하자 은광은 여러 차례, 그러시죠! 를 덧붙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처분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자 은광이 붉은색 셔츠의 팔을 걷어올리며 심각한 얼굴로 관심을 보였다. "요즘 시세는 그분이 잘 아시지요."라며 자신이 땅을 거래한 지역의 부동산 업자를 들먹이며 연락처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길게 말을 이어가지는 않았다. 뭔가 모르게 달라진 은광의 얼굴색을 감지한 기숙이 잘 먹었노라고 인사를 하며 일어설 채비를 해서였다. 은광이 대화에 활기를 보였으나 단 둘이 있는 공간이 어색해 빨리 벗어나고 싶은 기숙이 화제를 바꾸며 집으로 건너가 보겠다고 말하자 처분에 대한 이야기는 일단락되었다.


이번 주 기숙은 직장에서 딴생각을 하기 일쑤였다. 자신이 여주 시골집을 손볼 일이나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보다 은광과의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골몰했다. 정미와 주변의 부추김 탓도 있지만 지난주 은광이 느닷없이 건넨 말에 기숙은 며칠 째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은광의 솜씨로 겨우 냉골을 면한 시골집에서 하룻밤을 지낸 지난주 일요일 서울로 향하려는 기숙을 발견한 은광이 자신의 텃밭을 가로질러 기숙에게 성급하게 다가왔다.

"혹시 다음 주에도 내려오시나요?"은광이 기숙의 걸음을 확인하기는 처음이었다.

주말에 다른 집안일을 보려던 기숙이 머뭇거리자 은광이 바로 물었다.

"시간 되시면 서울 시내에서 한 번 뵙고 싶은데요."

기숙이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을 받으며 주저하자 은광은 바로 말을 이어갔다.

"종로나 광화문에서 두시 정도면 어떨까요?"

기숙은 일정을 체크하려는 양 핸드폰을 켰지만 광이 바로 이어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 종로에 제가 잘 아는 찻집이 있습니다. 두 시에 그곳에서 뵙지요. 주소는 바로 전송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조심해서 올라가세요."

은광이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까딱이는 인사를 하고는 다시 자신의 밭으로 성큼성큼 돌아갔다.


기숙이 은광의 집을 지나쳐 대로로 빠져나왔을 때 옆좌석에 올려놓은 핸드폰의 벨소리가 울렸다. 빠르게 달아나던 은광을 보며 기숙이 핸드폰의 진동모드를 소리로 바꿔 놓았었다. 신호등 앞에 섰을 때 기숙은 메시지를 확인했다. 은광에게서 찻집 주소가 날아왔다. 잘 알만한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동네였다.

작년 장마 후 동네 사람들이 여럿 모였다가 흩어질 때 서로 급박한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 전화번호를 주고받아 둔 것은 잘한 일이라 생각이 되었다. 가끔 그의 프사를 살펴본 기숙이었다. 단 하나의 사진에는 멋스러운 한옥과 현대가 어우러진 멋진 찻집이 올려져 있었다.

사진 속의 찻집의 이름은 예그리나로 보였다. 그가 보내온 주소에 '예그리나'가 찍혀 있었다. 기숙이 프사에서 사진으로만 보고 느꼈던 낯선 이름, 예그리나라의 뜻이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며칠 뒤 그녀의 운동모임에는 일찍 개화한 남쪽의 벚꽃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가 되며 다시 한번 기숙의 집 이야기가 잠깐 거론되었지만 기숙은 아무 말도 이어가지 않았다. 기숙의 적어진 말수에 눈치가 빠른 친구 정미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툭 치며 은광의 안부를 물었다.

"그 양반 요즘 잘 있냐?"

"그렇지 뭐."갈무리한 대답에 의아한 정미가 짖꿎은 표정을 지으며 재차 물었다.

"아직 펜션엔 손님도 없을 거고, 밭도 바쁘기 전인데, 요즘 뭐 하며 지내시나? 은광 씨는."

"너는 말끝마다 은광 씨! 은광 씨! 그만해라."

머쓱해진 정미가 이상기류를 모를 리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뜨며 의미 심장한 표정으로 기숙을 노려봤지만 기숙은 더 길게 이어가지 않고 다른 이에게 화제를 돌려 이어나갔고 정미는 뭔가 모를 일이라는 듯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주말이 다가올수록 기숙은 집안일에 마음이 가지 않았다. 이웃한 은광과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고기를 구우며 술도 한 잔 한 적이 있지만 그렇다고 은광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혼자 사는 남자의 사정에 대해서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일 것이라는 것 외엔 자식이나 처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들은 바 없고 묻지조차 않았었다.


토요일, 종로로 나서는 기숙은 옷장을 열고 한참을 서성였다. 매번 일복에 가까운 차림이 다였던 기숙이 원피스나 블라우스 차림으로 은광을 만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벌써 일주일 전부터 입을 옷을 염두에 두고 옷장을 서너 번도 더 열어젖혔던 기숙이다. 마음을 정했지만 아쉬워 다시 이것저것에 손을 댔다가는 다시 들여놓곤 했다.


기숙은 공들여 화장을 했다. 대체 무슨 말로 시작을 할지, 그를 어떤 눈으로 올려다봐야 하는지 이런저런 상상에 은광은 그녀의 화장대 앞에 서있기도 거실에 마주하기도 했다.


"기숙 씨, 아주 여주에 내려와 사시면 안 되실까요?"

"기숙 씨, 우리 두 집에 나누어 살 필요가 있을까요?"

"기숙 씨, 그동안 저, 하지 못한 말이 많습니다."


이런저런 상상에 은광이 그와 같은 말을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가 친구들을 데리고 내려와 저녁 늦게까지 왁자지껄 웃어가며 고기를 구울 때 언제나 거들던 그였으니 말이다.

"좀 같이 드시죠? 어서 이리로 오세요." 하며 지인들이 거들 때마다 은광은 모두에게 "아닙니다."를 쟎게 말하고 기숙만을 향해 "더 필요한 것 있으면 부르세요." 하며 미소를 띄웠었다.

며칠 전 퉁을 준 정미가 헤어지는 길에 "넌 애가 왜 그리 둔하냐?"라고 내지른 말이 밤새 귓가에 맴돌았다.


오랜만에 신은 구두에 발이 편치 않았고 상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수도 없이 확인하며 찻집에 당도했다. 외관의 모습을 살핀 뒤 시계를 보았다. 정확히 십 분 전이었다. 찻집의 외관은 프사 속 사진과 같았다. 한옥과 유리와 철골의 현대가 어우러진 매우 색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1층의 한옥집 돌담 위에 2층의 통유리 찻집이 얹힌 개성있는 건물에 감탄하며 계단을 올라서니 창가에 가까이 앉은 은광이 보였다.

기숙이 차분한 걸음으로 은광에게 다가갔다.

은광이 반색을 하며 팔을 뻗어 앉으라는 인사를 대신했다. 기숙이 베이지색 원피스의 주름을 조심해 가며 자리에 앉았다.

"요즘 젊음 사람들도 우리 한방차를 좋아하나 봐요." 주문대에 차를 고르느라 서성이는 젊은 커플들을 바라보며 기숙이 말했다.

"맞아요. 요즘 사람들 인스타그램 덕에 광고가 필요 없어요." 은광의 대답에 기숙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주문대 안쪽으로는 머리를 올린 갸름한 여자가 주문을 받다 말고 기숙의 테이블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찻집의 주인이나 할 법한 은광의 말에서 느낀 기묘함과 주문대 안에 서있던 젊은 여자가 기숙의 테이블 가까이 다가온 것은 모두 한 순간에 일어났다.

여자는 옆으로 흘러내린 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젊은 남자아이를 불러 주문을 맡기곤 다소 들뜬 얼굴 기숙을 향해 입을 열었다.


" 말씀으로만 많이 듣고 이제야 뵙네요."

기숙은 침을 꼴깍 삼켰다. 어리둥절하던 기숙이 정신을 차린 것은 이어진 은광의 말덕이었다.

" 이분이 옆집 아줌마. 인사 제대로 드려."

기숙은 머릿속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가온 여자에게 은광이 자신의 옆자리 의자를 꺼내주며 다시 한번 말을 이어갔다.

" 제 처입니다. 이제야 서로 보게 되네요. 여기가 주말엔 워낙 바빠서 여주는 내려 올 엄두를 못 내요." 조금 전 주문을 받던 검은 앞치마를 두른 젊은이가 진한 갈색의 대추차를 내왔다.


그들은 기숙을 기다린 듯했다. 모두가 일제히 기숙을 바라보는 것 같았고 동시에 움직이는 것도 같았다.

은광의 처란 여자가 젊은이에게 작은 턱짓을 하자마자 젊은이는 바로 짧은 대답을 하며 주방 쪽으로 들어가 멋진 접시에 처음 보는 고운 색의 과자들을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이어서 카운터에 서있던 젊은이는 카운터 옆에서 고급스럽게 포장된 선물상자를 들고 와 은광의 처에게 내밀었다.

기숙은 이 모든 움직임을 연극같이 느꼈다. 마주한 테이블 다른 편,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마치 퍼포먼스를 하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기숙은 정신을 붙잡았다.


" 이 대추차 정말 맛있다고들 합니다. 어서 드셔 보세요." 은광의 처가 말했다. 새삼 다시 올려다보니 아름답고 교양 있어 보이는 그녀가 기숙을 바라보며 손짓으로 거들고 있었다. 연극도 관중을 향해 뭔가를 내밀고 대답도 요구하는 것처럼 기숙은 공연장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 이 과자는 저와 처가 오랫동안 연구하여 만든, 우리 과자의 현대적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맛있다고들 하니 집으로 가져가셔서 더 즐기시라고 좀 준비했어요." 그녀가 은광의 말에 이어 쇼핑백과 포장된 상자에 대해 설명했다.

대추차는 진하고 맛있었다. 뜨거우니 천천히 드시라는 두 사람의 말이 동시에 터져 나올 때 기숙은 그 둘을 올려다볼 자신이 없었다. 입안의 대추조각을 우물거리며 잠깐 올려다보니 은광은 처와 눈짓을 주고받으며 이어갈 말을 찾는 듯했다.


"과자도 한 번 드셔보셔야 해요."

" 네, 그래야 저희가 왜 연구를 계속 이어가야 할지 공감해 주실 테니까요."

기숙은 굳은 얼굴을 펴며 이제 은광과 그의 처가 무슨 말을 할지, 모든 게 선명하고 후련해질 몇 분 뒤를 생각하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정말 맛은 있었다. 들어서는 젊은이들 모두가 실내의 이곳저곳에 사진을 찍기에 바빴고 은광은 뿌듯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 이제 말씀드려도 될 것 같아서요. 진작에 그러고도 싶었는데 주말마다 친구분들도 잘 내려오시고 농사일도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기숙이 멀뚱히 은광을 올려다보자 은광이 자기 옆의 여자손을 잡아 힘을 주며 말을 이어갔다.

" 지난번 여주집 파실 생각 있으시다고 하셨는데 그거 저희가 매입하고 싶습니다."

" 저희가 여주에도 이 찻집 분점이랑 한과 연구소를 만들 생각이 있거든요."

"맞아요, 요즘 우리나라 이미지 덕인지 우리 과자에 호기심이 많아요. 한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고 저희에게 어느 정도 성공 가능성이 보이거든요."

그 둘은 서로가 번갈아가며 자신들이 만든 색 고운 과자가 해외에서도 반응이 있고 조만간 설계팀과 함께 여주를 방문할 생각이라며 장황한 말을 이어갔다. 기숙은 고개를 끄덕이며 과자와 대추차를 목으로 넘겼다.

고개가 한없이 반사적으로 끄덕여졌는데 그건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고갯짓이었다. 재차 반복하는 고갯짓을 본 은광의 처가 반색을 하며 두 손을 모아 작은 손뼉소리를 냈다.

"그렇죠. 아주머니도 이해하실 거라고 이 사람이 이전부터 엄청! 여러 번 얘기했어요."

" 재작년 가을 신작로 만들 때 동네일이 아니라 내일이라고 팔 걷어붙인 것도 그래서예요."

기숙은 대추조각이 목에 걸린 건지 갑작스러운 기침이 났고 그 둘은 동시에 일어나 주방 쪽으로 물 마시는 시늉을 하며 앞치마 두른 젊은이를 불렀다.


집으로 돌아온 기숙은 마치 수면 내시경을 하고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한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마침 찻집 예그리나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정류장에 집으로 오는 버스가 있었다. 기숙은 자신의 감정을 뭐라 말하기가 힘들다는 생각에 상가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혼식에나 입고가던 베이지색 드레스는 버스 엔진위 자리에서 주름이 온전하지 못했고 구두속 발은 아파오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온 기숙이 원피스를 벗어던진 채 속옷차림으로 한 시간 이상 침대에 누워 천장만을 응시했고 누군가 걸어온 전화는 받지 않았다. 그제야 자신의 시골집 앞뒤로 찬찬히 돌아보던 은광의 모습이 떠올랐다. 두 집 살림이 벅차다는 말을 할 때마다 그러시죠!로 응수한 은광의 얼굴이 떠올랐으며 그의 길고 검은 앞치마는 예그리나의 모든 점원들이 두르고 있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기숙은 벗어버린 원피스를 방바닥에 내쳐둔 채 핸드폰을 들어 예그리나를 검색했다. 그의 찻집이 첫줄에 떠올랐다. 그 밑에 기숙의 눈길을 끄는 블로그 이 이어졌다. 블로그 글의 제목은 '가짜 순우리말, 예그리나의 진짜 뜻!(사랑하는 우리사이)'이었다.


기숙은 이마에 손을 얹으며 블로그를 열었다.


-오늘의 집, 한옥풍 카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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