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응과 소망
연초라면 의당 가슴이 벅차고 몇 가지 소망의 순위를 바꾸어가며 삶의 의욕을 느껴야 하지 않나!
예전 같았다면 말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갖가지 상념들이 이런저런 문장으로 만들어지다가 사그라진다. 나의 행동을 제삼자가 되어 서술해보기도 하고 마음을 표현할 문장들을 찾아보지만 딱히 마음에 끌리는 것이 없다. 일이 손에 안 잡히면 젊은 작가들의 소설만을 읽는다.
뒤숭숭한 연말연초, 이어진 대형 참사들이 원인인가? 마음이 답답하기만 하다. 이전처럼 거리로 나가 목청을 높이지도 않는다. 뉴스는 아예 보지 않으려 애쓴다. 우연하게 맞닥트린 기사제목이나 사진에 화가 치밀어 욕지기를 해대기는 한다.
오래전, 어머니가 마흔을 넘긴 어느 날의 일이었다. 빨래를 개시던 어머니께서 혼잣말을 하셨다.
"새가 돼서 가고 싶은 여기저기 날아다니면 참, 좋겠다."라고 하셨다. 어린 나는 어머니의 그런 표현이 너무 갑작스러워 뭐가 못마땅하신가 당시를 되짚어보기는 했지만 별 다른 사건이 없는 때였다. 어머니께서 아주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분이시라고만 이해하고 넘어갔었다.
새가 되고 싶다는 말씀을 하신 지 삼십여 년이 지났을 때 어머니께서 또 한 번 하신 말씀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꽃보다 더 예쁜 게 있을까? 에버랜드에 그렇게 장미꽃이 많고 이쁘다더구나!' 캐리비언베이를 매년 가던 즈음이었다. 에버랜드의 장미꽃을 익히 알고 있는 나는 흘려들으며 맞다고 응수했을 뿐, 어머니를 모시고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람에 치어 힘들어요. 이 동네 하천가에 핀 꽃으로 충분할 거 같은데요."라고 응수했던 것 같다.
어이가 없다.
그 얼마 후 나는 식구들과 돌로미티에 이은 자연감상을 한다고 캐나다 록키산맥에 자리한 밴프에 갔었다. 그리고 입국 전 밴쿠버에 일주일 머물렀었다. 밴쿠퍼에서 가장 기대한 곳은 빅토리아 아일랜드의 유명한 정원이었다. 페리호를 타고 빅토리아 아일랜드에 있는 유명한 정원, '부챠드 가든에 갔었다. 온갖 꽃들이 만발한 그 정원에서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인 벌새를 보며 탄성을 지르는 순간 어머니가 언급하신 에버랜드와 새가 함께 떠올랐다.
부챠드 가든의 조성에 담긴 역사와 나라별 정원이 다 뭐라고, 나는 이 먼 곳에 와 있는 것인가! 어머니의 바람인 에버랜드를 흘려만 들었었다. 사람많아 가야 고생이라고만 했었다. 비싼 항공료와 자동차 렌트비, 숙박료 등 큰 금액을 당겨 써가며 부챠드 가든이 뭐라고! 한심하다는 생각에 식욕을 잃었고 자는 내내 뒤척였다. 다음 날 밴쿠버 공립도서관에 가서 한국어 책을 뒤적이며 마음을 달랬다.
몇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마음이 정리되었을 때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봄이 오면 간식하고 물을 싸가지고 가고 싶은 곳으로 돌아다닐 거다."아주 의욕적이셨다. 나도 정말 좋은 생각이라고 응수하며 손뼉을 쳤었다. 그러나 이제 어머니의 소망은 어렵게 되었다. 작년 가을부터 다리가 많이 불편하시고 숨이 차셔서 오래 걷기를 힘들어하신다. 새가 되어 날아 다니고 싶었던 어머니, 장미가 제일 이쁘긴 하다는 어머니, 고구마를 삶아 가방에 메고 나들이를 꿈꾸신 어머니!
우리 식구가 드라이브를 자주 모시고 간다고 해도 두 다리로 가고 싶은 곳을 걷는 자유와 비교할 수 없다.
최근에 까닭없이 의욕이 없는 나를 들여다본다. 흔히 남들 말하는 걱정거리가 없는데도 이상하게 젊은 날들에 비해 의욕이 적고 마음이 심란하며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왜일까? 뉴스 탓일까 생각하면 그것도 아니다. 한 때는 전투적인 마음으로 길에 나가 외치기를 매주, 그래서 대상포진이란 병을 얻은 적도 있지만 그런 중에도 삶의 의욕이 없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머리로 이해한 것과 마음으로 이해한 것의 누적은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것 같다.
살아오며 겪은 다양한 일들, 타인의 처지와 입장들이 마음으로 이해되어 다시 기억 속에 자리 잡는다. 살아온 햇수만큼 마음으로 이해하고 누적된 경험과 감정들이 가득 차올라 다른 여지의 공간을 남겨두지 않는 듯하다.
"하나를 보냈는데 셋을 보태 넷이 되어 들어왔다"라고 웃으며 말씀하셨던 어머니. 나 하나 시집보냈는데 쌍둥이를 낳아 친정으로 들어와 살게 되었을 때 어머니께서 친척에게 하셨던 말씀이다. 고작 1년 만에 말이다.
최근에 결혼한 내 아이들이 엄마밥을 빌미로 온다고 해도 손사래 치는 일이 흔한 나는 최근에야 깨닫는다. 얼마나 고단한 일이었는지 말이다. 주어진 삶에 순응한 어머니의 삶을 다시 한번 돌이켜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순응의 삶을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야 하는 요즘이다.
"주어진 대로 살아야지." 불편한 다리를 주무르며 안타까워하는 내게 어머니께서 재차 하시는 말씀은 본인의 다짐인 듯도 하다.
그나저나 글을 쓰기가 쉽지 않은 요즘 나는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읽는 재미만큼은 당분간 지속되기를! 그래서 내 소망에서 아주 멀리 달아나지 않아도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