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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문평 Aug 09. 2024

열아홉 여군대령

01. 유년시절 추억

  해운대아파트 주민 당신들은 처음부터 이곳이 아파트단지로 알겠지만 소싯적 것을 말해주겠다.  소싯적에 아빠가 해운대 3 경비중대장을 했다. 청사포에서 장산에 올라 가는 에 있던 <호천목장> 아래는 탄약부대였다. 6.25에 군수물자부산항으로 도착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이후에도 역항굳어졌다. 평택항이  좋은 접안 시설이지만 한번 정한 것을 바꾸기 싫어하는 것이 군대다. 운대탄약부대 철도가 연결되었다. 200만 평 탄약부대 3개 경비중대가 경계를 했다. 광활한 탄약고를 병력으로 경비하는 것이 한계가 있다고 첨단 경보시스템을 도입하기로 했다. 3경비중대에 400터 구간을 설치하고  험평가를 1개월 맡겼다. 일직사령하는 날은 김밥을 찬합에 5-6인분 싸서 일직실에 가지고 갔다. 황병과 일직대기 운전병, 일직사령, 일직부관이 맛있게 김밥을 먹었다. 남이 먹는 것을 보면 왜 그리 먹고 싶은 발차기를 하면 김밥이 엄마 입을 통해 들어왔다. 맛이었다. 먹고 난 빈 찬합을 들군인 아파트에 오면 김밥이 있어도 먹고 싶은 마음이 사라다. 400미터 구간에 설치된 최첨단 경보장치 사람이 지나가도 삑! 개나 고양이가 지나가도 삑! 심지어 바람만 불어도 삑! 울렸다.


  11월 20 일이 출생 예정일이었다하필 독수리 훈련을 그날 개시했다. 탄생의 고고성을 아빠가 없어서 더 슬피 울었다. 출산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으면 엄마는 국어 사전에 나오는 욕이란 욕을  퍼부었다. 뱃속에서 욕을 들으면서 태어나 내 인생은 잘못이 없어도 주변이 시기 질투할 것을 직감했다. 특전사 독수들이 첨단경보장치 설치를 알고 스티로폼으로 앞을 가리고 침투했다. 철조망을 넘어도 경보기가 조용했다. 특전사 독수리가 탄약사령부 참모부와 1, 2, 3 경비 중대 막사와 이글루탄약고만 골리서  붉은 <폭파> 스티커를 부착했다. 이글루탄약고는 에스키모인들 얼음집 모양으로 만든 것이라 창고형 탄약고와는 비교도 안되게 공사비가 많이 들었다. 거기에는 고가의 탄약이 보관되었다. 공사금액은 군사비밀이라 밝힐 수 없지만 비유하자면 푸르지오 1개 단지 공사 비용이 제대로 만든 이글루탄약2공사금액과 맞먹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창이다. 장기전이 되자 러시아가 쏘는 155미리 포탄은 1,000발 쏘면 300발이 불량탄이라고 틴이 열받았다. 우크라이나 155미리 탄은 불량이 33 발이다. 아주 사소한 차이가 엄청난 차이라고 언론이 호들갑스럽게 보도했지만 사소한 차이가 아니다. 러시아가 도입 북한산 155미리  포탄은 탄약고에 항온항습 장치가 없다. 혹시 있다고 해도 전기가 부족해 공급이 안 되니 노력은 했으나 효과는 없음이다.  우크라이나를 돕는 서방의 탄약고가 좋다는 증거다. 서방 탄약고 보다 더 좋은 곳이 우리나라 영동에 있는 17탄약창 이글루탄약고다. 항온항습 장치가 설치된 것은 물론이고 전원이 나가도 0.01초에 전원을 공급하는 UPS가 있다. 그런 장치가 설치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장기보관탄일 수록 차이가 난다. 그런 탄약고에 <폭파> 스티커가 붙으면 탄약사령부 행정병과 대령, 중령 사무실, 경비중대 막사에 부착한 스티커가 10점이라면 이글루탄약에 부착한 것은 50점짜리 스티커였다. 침투 13명 독수리 폭파를 붙이고 도망을 . 귀신 잡는 해병보다 더 신출귀몰한 아빠에게 딱 걸렸다.


  "독수리 동무들, 동작 그만! 소총을 땅바닥에 놓고 두 손 머리 위로! 실시!"

아빠불호령에 독수리들이 손을 들었다. 

  "독수리 대장 동무 앞으로!" 

조윤래 대위가 앞으로 나왔다. 누가 선임인지 모르기에 붙잡힌 독수리 조 팀장이 충성! 했다.

아빠도 충성! 했다. 관등성명을 확인하니 동기생 조윤래 대위였다.  대위 봉화가 고향이다. 대학 3학년 하계병영훈련에 준비물을 사야 한다고 소총 47만 원, 군화 3만 원이 든다고 편지를 보내 부모님께 50만 원을 타냈다. 우편전신환으 받아 조윤래, 제갈상길, 전병구 3명이 꽃다리 순대집에서 병영훈련을 마치고 술을 곤드레만드레로 마셨다. 군번도 조윤래 3700, 제갈상 3727. 전병구 3730이었다. 선배들은 세 놈이 유상 라고 했는데 군번도 3700번대로 전우애를 과시한다 놀렸다.


  <폭파> 스티커를 부착하 탈출했다. 철조망을 벗어났는데 또 철조 이 있었다. 캄캄 밤에 독수리은 철조 망을 넘고 탈출하지 못하고 200만 평 탄약고 안에서 철망을 넘어나 다시 넘어오기를 반복하다 동틀 무렵  잡혔다. 13명을 굴비 엮듯이 병사 식당으로 인솔했다. 

  "독수 동무들 배고프지?"

  "아닙니다!"

  "거짓말 마라.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독수리 팀장 얼굴에 <배고파>라고 쓰여있는데 양심불량하면 정말 굶기갔어! 알간? 훈련은 훈련이고 전쟁 때도 포로에게 밥은 먹여야 한다. 밥을 굶기면 제네바 협약 위반이다.  제네바 협약을 어기는 몰상식한 장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포로들에게 라면을 급식한다."

취사병을 불러 독수 13 명이 넉넉하게 먹을 라면을 준비하 라고 했다. 파송송 계란 많이 넣으라고 했다. 체포한 독수리 13명을 라면을 먹인 후에 인솔해 탄약 사령부로 갔다. 정작처장에게 독수리 포로라고 인계했다.  탄약사령부 물에 <폭파> 스티커가 먼저 부착을 하고 포로가 된 것이 수리들의 승리였다. <독수리 훈련> 평에 중대장 3 명은 징계할 거라는 소리를 들었다.

 

   자라서 뱃속이 좁아 밖으로 나간다고 발차기를 했다. 아빠에게 신길동 외가에 있다가 산통이 오면 성애병원에서 출산할 것이니 부대께 보고하고 그리 오라고 했다. 부산역에서 새마을호를 타고 영등 역에서 내려 신길동 외가로 갔다.  요즘 젊은것들은 KTX타지 왜 새마을이냐고 싹수없는 소리 하겠지만 그 시절은  새마을이 최고였고 KTX는 없었다. 대방 전철역 건너편 성애병원에서 몸무게 2.8 날씬 모드로 키는 평균 기럭지 보다 2센티 길게 장신 모드로 태어났다. 발가락도 아빠를 닮아 길쭉하게 태어났다. 신생아실 수간 외가 식구들 다 있는 상태에서  이 아기 이다음에 크면 엄청 예쁠 것입니다라고 했다. 외할머니는 그걸 어떻게 알아요? 물으니 신생실만 20년 동안 일했다 고 했다. 이쁜 것도 이쁜 것이지만 태어난 내 머리 정수리에 쇠똥 같은 것이 없다고 외할머니는 선미야, 네 딸을 보 거라. 정수리가 얼마나 깨끗한 가? 제갈 서방이 고는 정말 착한 남자라고 했다. 는 없는데 외할머니  에 의하아기 아빠가 혼전 성생활이 문란하면 정수쇠똥 같은 것을 많이 묻혀 태어난다고 했다. 외할머니가 감탄할 정도로 내 정수리는 깨끗했다. 성애병원 신생아 실에서 있을 만큼 있고 병원에서 <박금녀 산후조리원>으로  이동했다. 세월이 유수처럼 흘러 첫돌이 되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큰 이모, 작은 이모, 큰외삼촌, 작은 외삼촌이 각자 돌반지 하나씩 준비하여 부산 수영군인아파트로 왔다. 13평 수영 아파트에서 성대한 돌잔치를 했다.

  요새 젊은것들은 천박하게  돈만 알아서'어머! 금값이 마나 비싼데 각자 반지야?' 하겠지만 그 시절은 금 한 돈에 오만 원 이하였다는 거 니들은 모르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손녀에게 말을 가르쳤다.

  "엄마!"

  "엄마!"

  "아빠!"

  "아빠!"까지는 잘 따라 했다.

할아버지 돌쟁이가 따라 할 수 없었다. 도 모르게 그만 오른손이 이마 위로 올라가고 튱성! 다. 

집안은 완전 웃음바다가 되었다. 누가 군인 딸 아니랄까 봐 돌쟁이가 충성! 이야. 크면 여군 보내면 한국 최초 여군 되겠다 하셨다. 아이고 장인 어르신 군인은 저 하나로 족합니다. 딸은 예쁘게 잘 키워 공무원이나 선생  시키겠습니다라고 했다.  힘든 선생이냐고? 그 시절은 여자 직업으로 선생님이나 공무원이 인기였다. 비교적 남자와 차별 없어 일하고 월급도 일반 중소기업 보다 좋았다. 오늘날 학교 선생님이 학부모 갑질에 자살하는 일이 생길 줄은 그때는 상상도 못 했다. 손가락에 이모 두 명, 외삼촌 두 명이 해온 금반 지를 끼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묵직한 팔찌를 해오셨다. 한바탕 군인아파트가 터질 정도로 잔치를 하고 외가 식구들은 다.

  횡성군 강림면에 증조 할아버 지,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셨 다. 소와 개와 닭과 돼지를 여러 마리 키우고 있어서 부산에 갈 가 없으니 돌반지 준비 고 떡과 음식을 준비할 테니 아비는 휴가 내기 우면 손녀만 데리고  다녀가라고 했다. 지금은 사라진 것으로 군용 수송기를 무료로 타는 제도가 있었다. 무상인 대신 탑승 후에 어떤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했다. 수송기가 추락해도 소송하지 말라는 뜻인데 요즘 젊은 사람 생각으로 '말도 안 돼'하겠지만 그 시절은 그런 서약서를 쓰고 김해에서 횡성까지 군용기를 타고 왔다. 서명할 때 머리가 쭈삣거린 것은 엄마지 돌쟁이는 행복했다. 김해공항에서 C-130 수송기에 군수물자를 실은 후에 정조종사 소령과 부조사 대위가 타고 엄마함께 탔다. 시동을 걸고 비행보고를 헤드셋으로 하는데 그만  대변이  뿌지직 나왔다. 엄마부조종사에 게 죄송합니다. 아기 기저귀를 갈게 5분만 늦춰주세요라고 했다.  헤드셋으로 아기 기저귀를 갈게 출발 5분  이륙 건의했다. 소령 계급 정조종사가 오케이 승낙을 했다. 5분 늦게 출발했지만 횡성도착은 정시에 했다. 비행기에서 내려 정조종사에게 죄송 다고 하니까 아닙니다. 조종사 입장에서 감사하 다고 했다. 퇴역비행기 후속으로 신규입해서 처녀비행인데 꼬마 아가씨가 똥을 싸주어 하늘귀신이 똥이 무섭다고 접근 못하므로 비행기 퇴역까지 무사고 비행할 것이라고 했다. 미신이 많은 곳이 군대 처녀비행하는 수송기의 무사비행에 똥으로 기여한 것이 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소령 조종사는 그렇게 감사의 말을 다.


  <횡성비행장>을 철밥통들이 족보도 모르고 <원주비행장>으로 개명했다. 한심한 놈들이지 왜 횡성에 있으면 <횡성비행장>이지 <원주비행장>으로 부르는 지 알 수 없다. 개명을 하려면 왜놈들이 잘못 작명한 것이나 바로잡지 그런 일은 안 하고 멀쩡한 횡성비행장을 원주비행장으로 개명한 것이 잘한 거라는 독자님 손들어 보시오? 하고 싶다. 명태균이 시켜서 여론조사를 한번 하고 싶다. 

   <강림>이라고 부르는 곳은 아빠의 고향이다. 조선시대까지는 원주 강원도 관찰사가 직접 관리하는 앙곡 창고가 강림에 있었다. 지금도 강림초등학교가 있는 곳을 <창말>이라고 부른다. 강원도 관찰사가 관리하는 양곡과 무기를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 신라시대부터 <각림사>라는 절이 있었다. 그 절이 있는 동네하고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는 원주감영 직속 <각림동>이었다. 왜가 조선을 합병하고 1914년에 토지조사 사업을 했다. 일본인 측량기사와 말단 공무원 주사가 측량을 마치고 측량결과 보고에 <각림동>하는데 <> 발음을 기사도 발음 못하고 주사발음을 못해 <가꾸림>, <강림>하다가 <강림>으로 적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된 지  80년인데 <강림>을 일본 주사가 개명한 것을 <각림>으로 지명찾기 하나 못하는 철밥통들이 횡성비행장을 원주비행장으로 개명하는 헛발질은 잘도 다. 요즘은 불법이지만 증조할아버지는 콩을 껍질만 남기고 속을 파내고 그 안에 <싸이나>라는 독극물을 넣고 구멍을 밥알로 잘 막아 산에 꿩이 잘 내리는 목에 콩을 뿌렸다. 그 콩을 먹고 죽은 꿩을 잡아서 꿩만두를 할머니와 증조 할머 네가 해주셨다. 꿩만두 그것도 사육이 아닌 야생 꿩고기가 들어간 만둣국 먹어 본 사 람 손들어 봐? 돌배기가 맛을 아냐? 할지 모르   분명 엄마가 떠먹여 주는 국물맛이 진국이었다. 엄마가  먹고 그 모유를 먹었으니 난 치악산 꿩만두국을 소싯적에 맛을 다. 증조할아 버지 증조할머니가 팔찌를 해주셨고, 할아버지. 할머 니, 큰고모, 작은 고모, 둘째 작은 아버지, 막내 작은 아버지가 각각 반지를 해왔다. 첫 손녀 돌이라고 떡을 해서 강림마을 웃담 30여 호에 한 접시씩 돌렸다. 돌아올 때는 군용 수송기가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원주까지 와서 중앙선을 타고 12시간 걸려 해운대에 도착했다. 모르는 사람은 빠른 KTX를 타지 무궁화냐 하겠 지만 그 시절은 중앙선은 통일호와 비둘기호와 무궁화뿐이었다. 


  3 경비중대에서 사람이 지나가도 울리고 개나 고양이가 지나가도 울리던 경보기 시험평 가 결과보고에 <군납불가>로 했다가 탄약사령부 정작처장 김 대령에게 군홧발로 차여 아빠 정강이가 멍이 들었다. 멍을 보자 엄마펑펑 울었다. 나도 눈물이 났다.  대령이 아빠가 <군납불가>라고 보고한 이유를 물었다. 순진하게 교훈이 <의에 살고 의에 죽자>라고 수첩 속에 부적처럼 지니고 다닌 교훈이 새겨진 돌탑사진을 보여주었다. 김 대령은 <의>가 밥 먹여주냐고 하면서 또다시 정강이를 다. 3 경비중대는 현역은 40명이라 상황 근무와 고가초소 한 곳만 근무를 섰다. 철조망 경계는 방위병 210명이 70명은 A조로 주간 매일 아침 8시에 출근 18시에 퇴근하는 별정직 공무원이었다. 70명은 홀수야간 B조로 오후 5시 출근 익일 08시 퇴근이었다. 나머지 70명은 야간 짝수일 C조였다. 방위병들 별명이 바퀴 고도 하고 북한 김정일이 남침 못하는 이유 가 방위병이 들고 다니는 가방에 무엇이 들었 늘었는지 몰라서 남침 못한다는 우스개 소리도 첫돌 무렵 들었다.

  방위병 70명이 부대에 있고 퇴근한 140명이 퇴근 후에 잠만 자고 다음 출근을 잘하면 그건 방위병이길 포기한 것이었다. 대위 본봉이 28만 8천 원 시절 맥슨 무선자동응답 전화기 한대 가격이 21만 원 하는 것을 구입했다. 방위병이 퇴근 후 부산시내 서면, 동래. 초량, 영도, 광안리, 해운대 등등 파출소에 잡혔다가 경찰이 군수사령부 헌병대에 이첩을 했다. 일단 헌병대 명단이 이첩되면 사고기록 바를 정 작대기 하나 올라갔다. 매년 12월에 군부대는 최우수부대 우수부대 선발에 목숨 걸었다. 아무리 사격을 잘하고 태권도를 잘해도 사고 건수가 많으면 우수부대 탈락이었다. 방위병들이 부산시내 어느 파출소에 잡혀있든 맥슨무선자동응답전화기에 녹음만 하면 아빠가 녹음을 듣고 찾아가 신병인도를 해왔다.

 맥슨 무선자동응답답전화기가 비싸도 군대생활 21년 동안 유일한 최우수부대 표창을 가져다준 고마운 것이었다. 그해 연말 탄약사령부와 군수사령부 전체 경비중대 중에서 최우수부대가 된 것이다. 군인이 태권도를 잘하고 사격을 잘해서가 아니라  방위병 사고가 중대마다 50건에서 120건이 보통인데  3 경비가 10 명이었다. 최우수부대가 되었다. 비교 상대가 안 되게 최우수 경비중대가 되었다. 탄약사령관 김웅수 장군 표창과 군수사령관 최명근 장군 표창을 연속으로 받았다.


  양력 4월 15일은 김일성 생일이고 음력 4월 15일이 아빠 생일인데, 경비중대 현관 직위표에 4월 15일만 보고 방위병 이병 윤상현과 애인과 예비장모가 수영군인아파트로 양력 4월 15일 생일 케이크를 들고 방문했다. 방위병 이병의 예비장모 최금말에 의하면 윤 이병은 서울학교 법학과 3학년을 마치고 방위복무를 하면서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임 3 경비중대장 문형동 대위에게 편지봉투에 10만 원 자기앞수표 10장을 건네고 야간 홀수만 근무하기로 했는데, 중대장이 바뀌고 주간, 야홀, 야짝 규정대로 돌아가다 보니 사법시험공부 리듬이 깨져서 공부가 안 된다고 야간 고정을 시켜 달라고 했다. 수표가 든 편지봉투는 돌려주고 생일 케이크만 받았다. 가져온 선물이니 받습니다만 양력 4월 15일은 북한 김일성 수령 생일이고 저는 음력 4월 15일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음력 4월 15일에 또 선물 가져오면 안 된다고 했다. 상현 이병의 애인 김근희는 그 말에 훌쩍훌쩍 울었다. 훌쩍거리는 그녀에게 한마디 했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이면 가장 좋은 대학이고 사법시험 많이 합격하는 곳이다. 만약에 윤 이병을 야간 홀수로 고정을 자기 앞수표 담긴 봉투 받고 편리를 봐주고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검사가 되어 <정의의 검사>가 아니라 자기앞수표로 편법을 터득한 <불의의 검사>될 것이다. 중대장에게  뇌물을 건네고 18개월 복무할 것을 6개월 근무 달콤함에 길여져 <불의의 길>을 갈 것을 <정의의 길>을 가라고 교육적 차원의 거절이라고 했다.

  윤 이병과 최금 모녀떠나엄마가 말했다. 당신 대위 월급 몇 배를 그렇게 뿌리쳐도 돼? 대위는 월급이 아니고 봉급이다. 국가공무원은 월급이 아니고 국민의 세금으로 주는 녹봉이다. 이순신 장군도 급제 초기는 적은 녹봉을 받았다. 대위 녹봉 이십팔만팔천 원이 사회 기업에서 이백 팔십팔만 팔천 원 받는 월급보다 귀한 봉급이다! 그냥 돈이 아니라 세금에서 보내온 돈이라고? 사회에서는 영업만 잘하거나 마약을 팔아서라도 돈 무한정 벌고 상여금도 있지만 국가녹봉은 전년도 국회승인 사항이고 특히 대위 봉급은 군사 2급 비밀이야라고 했다. 대위 1인 봉급이 얼마이고 총액이 얼마 하는 것을 적이 알면 총액 나누기 개인 봉급을 하면 대위숫자가 나오고 중대수를 알면 대다수 연대 사단까지 다 산출이 가능하다고 했다.  봉투 받아도 살고 안 받아도 살아했다.

  속으로 아빠, 너무너무 멋져요. 파이팅! 했다. 돌쟁이 눈에도 뇌물에 눈독 들이는 엄마 보다 봉급 몇 푼 안 되지만 자기 앞수표를 거절한 아빠가 멋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달라도 너무너무 다른 뇌구조 남녀가  만나서 이 몸이 태어나셨을까? 출생 자체가 미스터리였다. 아빠로 말할 것 같으면 뺑뺑이로 들어간 중학교지만 교훈이 <의에 살고 의에 죽자>였다. 중학졸업을 하고 역시 뺑뺑이로 고등학교에 갔는데 돌탑에 <참에 살고 의에 죽자>가 새겨있었다. 중학교 의에 살고 의에 죽자는 김석원 장군 어록이고 참에 살고 의에 죽자는 임영신 박사 어록이다. 중고등학교 6년 동안 돌탑에 <의(義)><참 진(眞)>만 보고 졸업을 했다.

  일요일에 도마성당에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니 맥슨무선응답전화기 녹음램프가 깜빡거렸다. 방위병이 파출소에 잡혀 녹음한 것으로 생각된 어 신발을 벗자마자 듣기 버튼을 눌렀다. 여자  목소리였다. 애교가 철철 넘치는 코맹맹이 소리였다.

  '선배니~임~, 아니 제갈상길 오빠~~ 오늘 일요일이라 선배님 전화 걸면 통화될 줄 알았는데, 안 받으시네요. 저희 두 명 강원도 국어교사 임용시험에 합격했는데, 발령은 9월 2학기부터래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둘이 해운대 바다 구경하고 선배 불러 청사포에서 회 사달라고 계획했는데 부재중이라 그냥 갑니다. 기장에서 멸치회나 먹고 올라 길게요. 선배 혹시 강원도에 오시면 연락 주세요. 선배 사랑해~'

  녹음을 혼자 들어야 하는데 엄마와 까지 셋이 들었다. 직감적으로 가정 평화에 전운을 부르는 녹음이라는 것을 감지했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 눈빛이 <크산티페 쌍도끼 눈빛>이 되었다.

   "누구야?"

   "당장 불어?"

  "얼마나 학생시절 여자 후배라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었으면 선배님도 아니고 선배라고 반말로 녹음을 다해? 결혼해서 애까지 있는 선배에게 한 년도 아니고 두 년씩이나 해운대 3 경비중대장 하는 것을 알고 왔지? 누구야? 불어?"

  "촛불이야 불게? 녹음을 한 명이 해야 누군지 알지 둘이 합창으로 녹음을 해서 누구인지 알 수 없다고?"

  "당장 춘천 강원교육청에 전화해서 청주사범 대학 국어교육과 출신 합격자 누구냐고 물어봐?"

  "미쳤어?  임용고사 봐서 합격한 것도 아닌데 뭐 하러 전화해? 나중에 동문회 가서 확인하고 여기 부산 근무 마치고 강원도 가면 국어선생님 된 후배 2명과 우리 딸 미정이랑 당신과 나 5명이 식사하면 되지? 그리고 국어교육과 후배 중에는 당신처럼 이쁜 여자 없어. 당신은 다리도 유선형으로 매끈하지 후배들은 다 무다리에 오다리 천지였어. 왜냐하면 무심천 강변에서 구룡봉 청주사범대 학교에 올라가면 여학생 다리가 다 무다리처럼 굵어지더라고. 국어교육과 여학생 중에 당신처럼 다리 이쁜 여자 구경을 못했다."

그 말에 엄마입이 헤헤 벌어졌다. 하여튼 나도 여자지만 이쁘다고 하면 여자는 넘어간다니까. 그러니 혼인빙자 간음행위자들의 공통점은 만나는 여자에게 이쁘다는 말을 잘한다. 자동응답전화기 녹음 음성이 두 명이 합창으로 했지만 한 명은 <육정심>이고 한 명은 <이유나>인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는 것을 세월이 흘러 이 몸이 중학생이 되어 <이유나> 선생이 나의 선생님이 되어 눈치를 깠다. 강림중 시절 중학국어 선생님이 이유나였고 나를 불러 아빠 이름과 군대생활 해운대도 근무하셨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돌을 해운대에서 보냈다고 했다.

  외가에서 한번 다녀가라고 연락이 와서 엄마 품에 안겨 신길5동 감나무가 있는 집으로 갔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영등포역 백화점으로 데리고 갔다. 유모차매장에서 <프리카> 유모차를 샀다. 요즘은 우리나라도 소재산업 강국이지만 그 시절은 가볍고 튼튼한 탄소소재를 수입하던 시절이라 유모차가 철제가 대부분인데 수입 탄소강 유모차는 튼튼하면서 가벼웠다. 수영군인아파트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집을 유모차를 들고 오르내릴 것을 생각해 구입해 주신 것이었다. 제갈미정이라는 엄연한 이름이 있는데 <수입유모차>가 별명이 되었다. 군인아파트라 어린이 놀이터가 없어 <도마성당>이 어린이 놀이터 대용이었다. 옛날에 누가 도마성당을 설계했는지 도마성당은 계단도 있지만 휠체어길을 아주 넉넉하게 만들었다. 엄마는 유모차에 나를 태우고 성당의 뜰과 성모님 석고상 앞과 장미동산을 지나 성당에 진입하는 휠체어길을 유모차를 밀고 성당에 올라갔다. 성당 출입문에 유모차 발톱을 고정모드에 놓았다. 성당에 들어가 기도와 묵상을 하고 나왔다.

  보통 경비중대장은 18개월이면 보직이 만료되어 타부대로 전출을 갔다. 후임자가 없다는 이유로 25개월을 했다. 26개월 차에 후임 3 경비중대장이 왔다. 그 무렵 군수사령부 의장대장이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이 되어 소령직위로 간다고 후임 의장대장을 선발했다.

  군수사령부 전체 경비중대장 중에서 보직을 그달에 끝나는 3명이 후보자였다.

심사위원은 참모장 준장 안광수, 인사처장 대령 문상옥, 인사장교 소령 조하영, 근무과장 중령 김진문이었다. 대연동 군수사령부 잔디연병장에 군악대 연주와 의장대병력을 집결시키고 군악이 울리는 상태에서

<앞에 총>,

<앞으로 갓>,

<받들어 총>,

<제자리에 서>,

 <세워총>등의 구령을 하는 것이 테스트였다.

 역대 의장대장 평균키가 178인데 아빠 키가 172였다. 한 명의 대위는 키는 180인데 다리가 O다리였다. 후보생시절 S3로 불리는 조상군 선배가 아빠네 기수들을 무심천 강변이나  구룡봉 정상 또는 상당산성에 집합을 시키고 차렷! 자세로 5분을 시켰다. 조금이라도 두 다리가 떨어지면 오다리 봐라! 다리 사이로 탱크 지나간다라고 야단을 쳤다. 여기 180이나 되는 큰 키의 대위가 다리 사이로 탱크 한대는 지나갈 오다리였다. 다른 대위는 키가 178로 의장대장 평균키인데 목소리가 힘이 없었다.

군악대 연주에 소리가 묻혀서 앞으로 갓! 했으나 의장대가 제자리에 서 있었다. 마지막 아빠는 172라는 난쟁이 똥자루보다 조금 큰 키가 약점이지만 구룡봉에서 조상군 선배가 차렷자세로 5분을 버티게 한 효과로 두 다리가 일직선으로 딱 붙었다. 군악대의 군가가 울리는 속에 앞에 총, 어깨총, 앞으로 갓! 하는 구령에 의장대원이 왼발을 동시에 앞으로 뻗었다. 잔디 연병장 끝이 보이자 <좌향 앞으로 갓> 연병장 남단에 다다르자 또 <좌향 앞으로 갓>해서 처음 군악대 옆 20미터에 오자 <제자리 서> <세워총>, <열중쉬어>, <쉬어> 일련의 과정을 마쳤다. 참모장님이 인사처장과 근무과장 채점표를 받아 합산을 했다. 사람 보는 눈은 비슷하고 심사위원 3인이 모두 제갈상길 대위다 하시면서 군복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십만 원 자기 앞수표 2장을 주면서 <멜본제화>에 부탁해서 행사화 백색, 흑색 한 켤레씩 맞추라고 했다. 굽은 뒷굽만 높이면 앞으로 넘어지니까 뒷굽 17센티 앞굽 12센티로 뒤에서 앞이 완만한 경사가 되도록 특수주문을 했다. 혹시라도 최영근 군수사령관이 키를 물으시면 174라고 대답하라고 했다. 인생에 가장 행복한 시기는 아빠가 의장대장 시절이었다. 아직 유치원 입학 전이라 숙제의 괴로움도 없었고 아빠가 의장대장이라 여러 종류 멋있는 의장시범 구경했다. 하의 백색 바지에 상의 초록색 행사복을 입고 치렁치렁 수술이 달린 옷을 입고 긴 칼을 뽑아 오른손에 들고 제병지휘하는 순간은 국군의 날 대통령 앞에 제병지휘하는 제병지휘관 장군보다 더 멋있었다. 

  군수사령부 연병장에서 국기강하식이나 장군들 전역행사를 주로 했다. 부가적으로 UN묘지 행사, 프로야구 <롯데자 이언트> 개막식에도 의장대가 초청되었다. 부가적으로 개막전 입장티켓이 4장이 아빠 앞으로 배정되었다. 엄마는 수영군인 트에서 친하게 지내는 3명 사모님들에게 인심을 썼다. 미정이 아빠가 의장대장이라 프로야구 개막전에 의장시범을 간다고 해요. 티켓 4장이 와서 3장을 사모님들께 드릴게요. 어머~고마워 3 경비! 아니, 의장대장 고마워했다. 군인들 아내의 이름 대신 남편 직책이 여자들의 호칭이었다. 25개월을 3 경비로 호칭을 했으니 의장대장이 된 지  6개월이 되어서도 3 경비로 불렸다. 3 경비중대장에서 의장대장이 직책이 변경되었다는 소식에 외할아버지가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제갈 서방 의장대장 복장에 칼을 찬 모습을 사진 찍을 수 있게 토요일 퇴근 때 복장을 수영군인 아파트로 가져오라고 했다.

  외가 식구들이 총출동하여 서울서 내려왔다. 도마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집에서 점심을 먹고 아빠는 의장대장 복장에 번쩍이는 지휘용 큰 칼을 오른손으로 잡았다. 물론 손은 행사용 백색장갑을 끼고 거울 앞에 섰다. 정말 아빠가 아니라 내가 숙녀라면 데이트해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정도로 멋있었다. 아빠가 들려준 말이 군인은 복장이 멋있고 휘장이 많을수록 힘들다고 했다. 그 시절 현역병은 얼룩무늬 복장이고 방위병은 민무늬 복장이었다. 방위병 보다 현역이 힘들고 보통 현역복장보다 헌병복장이 멋있으니 헌병이 힘들다. 헌병보다 군악대나 의장대 복장이 멋있으니 헌병보다 힘든 것이 군악대와 의장대라고 했다.

  도마성당을 배경으로 가족사진을 찍었다. 의장대장 복장을 입은 아빠가 모델이 되어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찍고, 진선, 미선이 이모와 선우선미 여사와 나 여자 4명과 아빠가 찍고 외삼촌 두 명 외할아버지와 아빠 남자들만 찍었다. 가족사진은 커다랗게 2장을 만들어 액자에 넣어 신길동 외가 거실에 걸고 수영군인아파트에 걸었다. 사진이 너무 커서 코딱지만 한 군인아파트 말고 돈 부지런히 모아 일반아파트로 이사 가야 가족사진이 빛날 거 같다고 외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진선과 미선 이모는 형부 의장대에서 곧 제대하는 남자 중에서 애인 없는 사람 소개 좀 해달라고 했다. 그 말에 외할머니가 안된다고 했다. 남자고 여자고 키 크고 인물 잘생기면 인물 꼴값을 한다고 제갈서방 절대 두 명에게 의장대 남자 소개하지 마라고 하셨다. 예.라고 짧게 대답한 것으로 두 이모의 야무진 꿈은 사라지고 산산조각 난 사기그릇이 되었 다.

  롯데자이언츠 개막식에 투수 <최동원>이 선발로 나왔고 상대팀은 삼성이었다. 장내 아나운서가 방송을 했다. 사직구장을 찾아주신 관중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 개막식을 축하해 주기 위해 부산 군수사령부 의장대와 군악대의 축하공연이 있겠습니다. 관중 여러분 남문으로 입장하는 의장대와 군악대를 힘찬 박수로 환영해 주시기 바랍니다. 남문에 흰색 바지에 초록색 상의 지휘용 긴 칼을 찬 아빠를 선두로 아빠가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고 대형을 넓히라면 넓히고 다시 좁히라면 좁히면서 의장대와 군악대가 사직야구장 그 넓은 잔디구장을 휘저었다. 한복판으로 이동한 후  야구장 본부석을 향해 칼로 경례를 했다. 긴 칼을 뽑아 수직으로 하늘로 향했다가 오른 손목을 입 근처에 붙이는 척하면서 45도로 비껴 손을 오른쪽으로 뻗어내려 부동자세를 취하는 것은 예술이었다. 본부석의 부산시장과 롯데자이언츠 구단주가 박수를 치는 것으로 답례를 하자 아빠는 칼을 거두었다. 이후 아빠 구령으로 군악대는 흥겨운 <군가><돌아와요 부산항>에 등 가요를 섞은 메들리 연주를 했다. 의장대원은 총에 행사용 대검을 꽂아 멀리서도 은빛이 태양에 반사되어 번쩍이는  총이 돌아가면서 은빛을 반짝거렸다. 다이아몬드 신호를 하면 의장대는 다이아몬드를 만들었다.  신호를 보내면 원을 만들었다. 정사각형 신호를 보내면 정사각형을 타원 신호를 보내면 타원을 만들었다.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1자 신호를 보내니까 아빠  후방 10미터에 아빠가 중심이 되게 정렬했다. 큰소리로 구령을 붙였다. <돌려 총!> 의장대원이 일사불란하게 총을 돌렸다. 관중석에서 우레 같은 박수가 터졌다. 총 돌리기 시범을 하고 힘들었으니까 힘을 비축하게 총을 거두었다. 제자리에서 열중쉬어, 부대 차렷, 좌로 2보 우로 2보 결국 제자리다. 관중들은 눈을 그리 돌리고 가장 고난도이고 사고가 많은 던져 총을 하기 위한 힘비축이 끝나자  긴 칼을 뽑아 휘두르면서 <던져 총!>을 외쳤다. 의장대원 전원이 동시에 칼이 햇빛에 번쩍이는 총을 하늘로 던져 떨어지는 총을 칼에 다치지 않게 똑같이 잡았다. 그런 고난도의 시범을 사직야구장 5만 관중 앞에서 실수 없이 한 의장대원들은 얼마나 연습을 많이 했을까? 아빠가 외할아버지께 저 정도 하기 위해 연습으로는 눈감고 총을 하늘로 던져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연습합니다라고 했다.


  뽀빠이 이상용이 진행하는 <우정의 무대>가 군수사령부를 녹화다. TV프로그램 60분을 만들기 위해 촬영은 180분 분량을 한다. 촬영이 실수 없이 잘 가면 60분이지 다시 또다시 엔지 나서 반복 촬영하다 보면 실제 촬영은 5-6시간이 된다. 모든 예행연습을 마치고 뽀빠이 이상용이 마이크를 잡고 녹화를 시작했다.

  뽀빠이 이상용이 ROTC라는 것을 알고 있던 아빠는 녹색반지를 빼고 출근했다. 뽀빠이는 군부대 방문해서 장교가 ROTC인 거 알면 기수 불문 조선시대 노비 부리듯 한다는 것으로 알고 있어 반지를 뺀 것이다.

 근무과장 16기 선배가 뽀빠이에게 저기 행사 총괄지휘자 의장대장이 24기 후배입니다라고 말했다. 뽀빠이는 마이크가 켜지고 카메라에 빨간불이 들어오면 의장대장님 다음 진행부탁드립니다라고 방송멘트를 했고 카메라 불이 꺼지면 야! 의장대장 본부석으로 와! 반말이었다. 지구가 깨지지 않는 한 의장대와 군악대는 행사복 입은 상태서는 행사 이외 잡무는 안 하는 것이 수십 년 불문율이었다. 뽀빠이에게 ROTC가 후배로 밝혀지면 장군도 대령도 다 야~이리 와봐인데 20년 후배  아빠는 그날 머슴도 그런 머슴이 없었다. 한 장면 촬영이 끝나면 다음 촬영 위해 책상 의자 등을 이동하는데 근무중대와 본부중대 병사들이 전투복으로 100명이 대기 중인데도 꼭 의장대장을 호출해 의장대에게 시켰다.

   녹화 중에 의장대 순서가 되어 촬영했다.

군악대의 흥겨운 노래에 아빠를 선두로 의장대와 군악대가 입장했다. 단상에는 장군단과 참모부장교와 군인가족이 앉아 있었다. 엄마는 나에게 예쁜 벌꿀그림 원피스와 곰돌이 가방을 메어주었다. 군악대 연주에 다리를 까딱거렸다. 장군 사모님들이 어머! 이 꼬마 아가씨 봐 춤을 잘 추네? 뉘 집 딸이야? 군수사령관 사모님 말에 인사참모 사모님이 저기 행사지휘하는 의장대장 딸입니다라고 했다. 정말 피는 못 속여 아빠가 의장대장이니 딸도 흥이 많다고 하셨다.

  부산에서 경비중대장 25개월 의장대장 18개월을 하는 동안 나도 자라서 유치원 입학할 나이가 되었다. 부산에서 다른 보직을 하였으면 도마유치원생이 되었을 텐데, 의장대장을 마치고 포천군단 정보처 인간정보 장교가 되었다. 포천군단 아파트는 낡았지만 기다림 없이 바로 입주했다. 이사를 하고 신읍초등학교 병설유치원 신입생을 뽑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요즘은 추첨을 스마트폰으로 당첨 결과를 아는 세상이 되었지만 그 시절은 교문밖에서 한 줄로 줄을 서서 대기했다. 진선과 미선 이모가 교대로 라면박스를 두 개 펼쳐서 깔판을 만들고 밤을 새웠다. 다음날 아침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나는 선우선미 여사 손을 잡고 신읍초등학교에 두 이모가 밤새 자리를 지키고 받은 대기 번호 17번으로 당당하게 병설유치원 합격생이 되었다. 병설유치원은 25명 두 학급에 50명 어린이가 있었다.

  A반은 배순선 선생이 B반은 권현주 선생님이 가르쳤다. 나는 권 선생님반이었다. 안내문을 받았다. 제갈미정 어린이 신읍초등학교 병설유치원 입학을 환영합니다라는 문구가 인쇄된 안내장 받은 기념으로 진군아파트에서 회식을 했다.

  외할아버지는 밤새 조카를 위해 교문 앞에서 대기한 진선, 미선 이모에게 고생했다고 하고 선우선미 여사도 고맙다고 말했다.

삼겹살에 소주와 맥주, 사이다를 취향대로 부어라 마셔라를 했다. 병설유치원 1 년은 금세 지나갔다. 신읍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신읍초등학교 병설유치원에서 신읍초로 올라온 학생들이 각반 반장과 부반장 각 모둠의 장이 되었다.

  병설유치원 출신들 엄마들은 친목계까지 조직되었다. 서울의 명문초등학교 출신들 엄마들 친목계가 하나회보다 더 끈끈하다고 한다면 신읍초등학교 병설유치원 엄마들의 친목계는 해병전우회를 넘어 고대교우회 수준이었다. 친구들 생일이라고 연락이 가면 친구와 엄마들이 총출동했다. 그 시절 포천 최고의 맛집 <풍뎅이 통나무집>은 유치원 엄마들 친목계 아지트였다. 그렇게 포천에서 병설유치원과 초등학교 입학을 하고 2학년이 되었다.

  여기서 대위에서 소령 진급을 했고 소령 직위 한 개를 마쳤다. 소령들의 교육기관인 육군대학에 입교하라는 육군본부 명령이 하달되었다. 제갈상길 소령은 대전시 유성구 추목동 육군대학 학생장교가 되고, 나는 신봉초등학교 2학년 3반에 전학생이 되었다. 제갈상길 소령은 모든 군복에 포천군단 마크를 떠고 육군대학 마크와 교번을 부착했다. 나는 모든 공책에 신읍초등학교를 지우고 신봉초등학교 2학년 3반 제갈미정이라고 써붙였다. 아빠는 교관이 내준 숙제를 나는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하느라 밤 12시까지 정신이 없었다. 선우선미는 부녀 공부에 동생 제갈종호가 울면 안 된다고 업고 어린이 놀이터에서 놀다가 밤 12시에 집으로 들어왔다.

  신읍초등학교에서는 우등상도 받았는데 신봉초등학교에서는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많아서 우등상은 바라지도 않았다. 공부보다 더 힘든 것이 여기 텃새와의 싸움이 더 힘들었다. 또한 요즘도 문제 되는 왕따가 그 시절도 있었다. 싸우기 싫어서 신봉초등학교 1 짱에게 엄마가 남대문 우리나라 최고 문구점에서 대량구입한 캐릭터 노트를 주었다. 시달림이 없었다. 이놈의 나라는 애들이나 어른이나 뇌물공화국이다. 김영란 법이 있으면 뭐 하냐고요. 디올 백을 뇌물로 받은 것을 디올이라 말 못 하고 파우치라고 말하는 나라인데?

  육군대학 옆 신봉초등학교 영악한 애들에 비하면 신읍초등학교 친구들은 천사들이었다. 예전에 신읍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을 마치고 신읍초등학교 학생이 된 것이 행운이었다. 그런 면에서 내 인생 귀인은 선우진선, 선우미선 두 이모였다. 만약 이모가 신읍초등학교 교문에서 밤을 새워 17번을 받지 못하고 51번 이후였다면 내 인생은 초반부터 꼬였을 것이다.

  육군대학을 마치고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 부대 철책선 연대의 정보과장이 되었다. 전방이라 온천지 지뢰지대였다. 민간인통제선 북방의 경작지에 대해서 영농 민 출입증을 정보과장이 필요한 서류를 접수받아 사단으로 보내면 사단에서 영농 민에 대한 신원조회를 마치고 이상이 없으면 영농 민 출입증을 발급했다. 전년도에 민간인 통제구역에서 지뢰가 터져 영농인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지뢰지대 표시가 있어도 더덕과 신나물을 채취하느라 들어가 지뢰가 터지면 해당 구역을 담당하는 정보과장만 문책을 당했다. 사단장이 정보참모에게 지시하여 민간인이 지뢰지대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문구를 공모하고 우수작으로 현수막을 만들라고 했다. 관사로 퇴근한 제갈상길 소령이 보통은 엄마나 나에게 오늘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보고 대화를 하였는데, 오늘은 말없이 방에 들어가 책상에서 무엇인가 글을 쓰고 있었다.

   저녁 준비를 마친 엄마가 아빠 나와서 식사하라고 해서 조심스레 방문을 빼꼼 열고 아빠 밥 먹으러 나와했다. 응, 우리 딸 오늘 학교생활 어땠어? 촌 들이 너는 옷을 어디서 사느냐고 물어서 명동 백화점이라고 했더니 비싸지? 하길래 몰라 사는 건 엄마가 사고 나는 입기만 해 했어.

밥을 먹으면서 엄마가 물었다. 오늘은 퇴근하자마자 착상에 앉을 일이 있어요? 군인이 총만 달 쏘면 되지 뭐 석사, 박사 연구 논문 쓰는 것도 아니면서 책상서 고민해요? 차라리 연구 논문이면 이 책 저책 참고해서 쉽지 이건 없는 것을 창작을 하는 것이라 힘들어. 했다.

  "아빠, 뭔데?"

  "응, 지뢰지대에 민간인이 산나물 채취하러 들어가지 못하게 홍보하는 문구를 만들라는 거야. 사단 전장병에게 공모해서 최우수작 100만 원 우수작 3편 30만 원 상금을 준다고 하는데 각 연대 정보과장은 의무적으로 한편 씩 정보참모에게 내일 아침에 보고하라는 것이야. 그래서 퇴근하자마자 고민했지."

  "아빠 지은 문구 있어?"

  "아니."

  "그럼, 이거 어때요?"

  "무슨 아이디어 있어?"

  "산더덕이 당신 목숨보다 귀한가요? 아니면 산나물이 당신 목숨보다 귀한가요?"

  "오호~ 우리 딸 고맙다. 산나물이 당신 목숨보다 귀한가요? 이걸로 정보참모에게 보고해야겠다. 상금을 타면 딸에게 반 줄게."

 엄마가" 나는?" 했다.

  "그럼, 딸 50, 내가 30 당신 20 비율로 할게."

<산나물이 당신 목숨보다 귀한가요?>가 지뢰지대 출입 금지를 위한 열쇠부대 문구 공모에 최우수작으로 선정되어 아빠는 사단에 들어가 상장과 상금 100만 원을 받았다. 이 기쁜 소식을 바로 외가에 전했다. 상금 100만 원에서 반딩 한 50만 원으로 외가 식구를 초대하여 열쇠회관에서 한우 등심 회식을 했다. 참석인원은 총 10명이었다. 기분 좋게 회식을 하였다. 외가 식구들은 서울로 돌아갔다. 군대전화로 아빠가 엄마에게 퇴근 늦거나 못할지도 모른다는 전화가 왔다. 열쇠부대는 철책선을 2개 연대가 좌우로 맡았다. 제갈상길 소령이 근무하는 연대는 우측연대였다. 좌측연대 정보과장 백 소령이 전화가 왔다. 통신보안 27 정보과장입니다. 수고 많습니다. 나 36 정보과장 백 소령입니다. 소식 들었습니다. 오토바이 일몰 시간이 지났는데 민통선 안에 남아 있는 것 발견되면 즉시 보고하라고 했습니다. 그래. 순찰을 좀 잘 돌아 빨리 발견하면 좋겠습니다. 예. 발견 즉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충성! 충성!

36 연대 구역으로 들어와서 해가 졌는데도 민통선 밖으로 철수하지 않은 오토바이가 27 연대 용강 물골 뒤에서 발견되었다. 제갈상길 소령은 여대장에게 보고했다. 충성! 정보과장 제갈 소령입니다. 37로 들어와 일몰 시간까지 안 나간 오토바이가 우리 지역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용강 물골 뒤에서 오토바이가 발견되었는데 바로 옆이 지뢰지대입니다. 전방 GP의 열상감시장비를 북쪽이 아닌 아군지역으로 2시간만 방향전환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서 특이징후 잡히면 바로 보고해. 알겠습니다. 충성! 같은 내용을 부연대장에게도 보고했다. 바로 용강 물골 옆 오토바이 발견지점으로 갔다. 오토바이 전후좌우 발견 시 사진을 찍었다. 초소 전화기로 전방대대 상황장교에게 지시했다. 통신보안 작전장교 최 대위입니다. 수고한다. 연대정보과장이 연대장 지시를 대신 전파한다. 전방 지피 열상장비를 방향을 남으로 돌려 용강 물골 뒤 지뢰지대를 감시한다. 열상장비에 점이 뜨면 바로 연대상 황실로 보고하라. 예 알겠습니다. 충성!

  전방에서 북한을 감시하던 열상장비를 남으로 방향을 돌려 감시하자마자 점 두 개가 깜빡거렸다. 한 개는 큰 점이 하나는 작은 점이 깜빡거리다가 작은 점은 10분 후에 사라지고 지금은 큰 점만 깜빡거린다는 보고가 연대상 황실로 보고되었다.

 연대장과 부연대장에게 보고했다. 이어 36 연대 정보과장에게도 알렸다.

  "통신보안 36 정보과장입니다."

  "충성! 27 정보과장입니다. 우리 지역 용강물골 옆에서 오토바이가 발견되어 전방 열상장비를 남으로 돌려 감시했습니다. 큰 점 하나 작은 점 하나 두 점이 깜빡거리다 작은 점이 사라졌습니다."

  "그래? 그거 지뢰밭 안에서 지뢰 터져 몸 일부가 떨어져 나가 작은 점으로 깜빡거리다 식으니까 작은 점 사라지고 큰 점만 남은 거 아닐까?"

  "예. 저도 그렇게 추정하는데 내일 사단 정보참모 에게 건의드려 헬기 항공수색 요청해 보겠습니다."

  "고마워요. 27 정보과장이 우리 때문에 고생이 많군요."

  "아닙니다. 다 국가 봉급고 하는 일인데 네일 내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일 나도 상황 보고 마치면 27로 넘어갈 테니 내일 봅시다."

  "예. 충성!"

 사단 정보참모가 사단장에게 보고하고 헬기 항공정찰을 실시했다. 지뢰지대 안에는 지뢰가 터진 흔적과 사람 시체 1구와. 다리 한쪽이 1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것을 헬기 정찰을 하면서 사단정보처 정보처 실무자걔 사진을 현상해서 27과 36 정보과장에게 주고 사단으로 복귀했다. 영농 민 출입증 발급과 인원은 36 연대 책임이지만 지뢰가 터진 장소가 27 연대 구역이라 지뢰지대에 통로 개척을 하고 시신을 꺼내는 것까지는 27 연대가 하고 이후 유족과 협의하고 시신 인계 등은 36 연대가 하기로 했다. 통로개척 선두는 27 연대 수색중대장 허종락 대위와 전령이 다음은 수색 소대장이 그다음 통로 확장은 제갈상길 소령이 사단 공병 병사 3명을 지원받아했다.  통로개척 완료 후에 수색소대원이 들것을 이용해 시신과 떨어져 나간 다리를 꺼내왔다. 헬기장에서 국군전곡병원으로 시신을 후송했다.

  상금까지 수여하면서 현수막 문구 <산나물이 당신 목숨보다 귀합니까?>는 현수막일 뿐 효과가 없었다. 그 사건 후 한동안 제갈상길 소령은 식욕부진에 시달렸다. 정보장교를 계속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그런 제갈상길에게 선우선미는 당신이 뭐 아직도 총각인 줄로 아느냐? 총각이면 정보장교 때려치우고 사회에 나가 취업 학원 다니고 기술 배워서 살아가면 되는데, 당신은 혼자가 아니야? 발가락이 40개라고 알기나 해? 했다.

쓸데없는 고민하지 말고 중령 진급 위해 혼신을 다하라고 했다. 자신보다는 제갈미정과 제갈종호 학교생활이 걱정되었다. 미정이 학년 수보다 이동한 학교수가 많은 것이 걱정되었다.

대광리에 오면 대광시장에서 딸 옷을 사입히라고 했으나  선우선미는 꼭 서울 백화점에서  옷을 사 왔다. 그 옷을 입고 학교에 가면 왕따를 당했다. 혼란스러웠다. 아빠와 엄마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의 결혼이 이해할 수 없었다. 결혼해서는 안될 둘의 사이에 태어난 자신의 미래가 걱정되었다.

   횡성에서는 부자라고 소문난 제갈재석의 손자지만 신길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엄마와는 비교가 안되었다. 지금 여의도 공원 일대가 예전에는 프로펠러 비행기가 이륙하고 착륙하던 비행장이었다. 외할아버지 고향 강릉에 다녀올 때  외가 식구들은 여기서 탑승해서 강릉 비행장에 내렸다. 귀경 때는 강릉비행장에서 출발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했다. 그렇게 다르게 30년을 살아온 남녀가 결혼했으니 딸의 옷 한 벌 신발 한 켤레를 사도 의견충돌이 있었다. 늘 엄마우 승리였다. 하지만 엄마의 승리는 딸에게 독이라는 것을 아빠는 알고 엄마는 몰랐다. 옷 때문에 시골애들에게 왕따 당한 것을 생각해 보니 아빠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으나 입 꼭 다물고 지냈다. 맹모삼천지교를 엄마는 딸 교육에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 줄 아느냐?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고 망아지는 제주로 보내라는 말이 있듯이 종호와 나를 전세방을 얻어서라도 서울서 공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빠는 모삼천지교를 후세 교육자들이 천자문도 모르는 것들이 영어식으로 해석해 그렇게 환경이 중요하다고 공동묘지, 시장통, 서당을 환경으로 해석하는 것은 숲은 못 보고 나무만 생각하는 단견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을 위장 전학시키는 부모들은 맹모삼천지교를 잘못해석한 것이라고 아빠는 말했다. 위장전학을 시키려면 자신의 경제력이 위장전학 시킬 곳의 평균 재산 수준이 되면 그것이 좋은데, 그 정도 안되면서 전학시키는 것은 허풍이고 속 빈 강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아빠 중학 선배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선배는 영등포에서 중학교를 마친 딸을 자사고 이화여고에 보냈다. 영등포 청과시장에서 자기 점포도 아니고 타인 상회에서 일하고 쥐꼬리 월급으로 살아가는 형편을 알기에 딸은 그냥 영등포에 있는 일반고에 진학해서 내신 상위 등급 받겠다고 했으나 선배 부부는 이화여고에 진학시켰다. 합격은 했으나 500 명 중에 400등 정도로 합격했고 3년 내내 노력했으나 결과는 400등 위로 올라선 적이 없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아빠는 자신이 전출 가는 곳마다 같이 전학을 하는 것이 교육적으로 효과적이라고 했다. 행복은 성적순도 군번순도 아니다. 딸은 성적 걱정 하지 말고 딸이 열아홉 이후 이 험한 세상 당당하게 살아갈 내공만 기르면 된다고 했다. 아빠는 군인이지만 학교 상담선생님보다 딸 상담을 더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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