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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문평 Aug 13. 2024

열아홉 여군대령

06. 아빠의 고향

 서울 강북 <빨래터 중학교>에서 1짱 아버지가 한남 검사라고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다. 학교를 퇴학하고 횡성군 <강림중학교> 3학년에 전학을 했다. 동생은 <강림초등학교> 5학년에 전학했다. 동생에게 미안했다.

 아빠가  양양군단에 근무했고 엄마 양양촌구에서 살 수 없는 것도 없는 것이지만 교육이 더 문제라고 집값과 전세가 비교적 저렴한 서울 강북구 삼양동에 전세를 얻어 이사를 했다.  양양은 동네에 보습학원 하나 없는 깡촌이었다. 외할아버지는 1층 성철이네가 아파트 당첨이 되어 가산동 두산위브파트로 이사를 간다고 감나무집 1층에서 살라고 했다. 엄마는 시부모가 싫어하신다고 사양했다. 횡성 본가에서 장가를 가더니 <처갓집 말뚝에 절하는 놈>이라욕을 먹고사는데 처가살이까지 하면 영원히 강림땅을 밟을 수 없다고 전세를 고집했다.

  난 빨래터여중 2학년에 동생은 삼양 학교 5학년에 전학했다. 학교 1짱과 싸웠다. 1짱 한상미 아버지가 <한남훈검사>라고 건설업자 스폰서 검사로 한동안 언론에 한때 회자되었다. 언론에 시끄러울 때는 여주지청 한직으로 밀려났다가 잠잠해지자 서울로 들어왔다. 왕년에 <파랑새 검도장>에서 배운 실력을 발휘해 한상미 팔목을 골절시켰다. 학교에서 무조건 내 잘못이라고 중학생에게 <무검유죄>적용했다.

  아빠는 강릉잠수함 침투사건으로 거의 산에서 지낸다고 했다. 핸드폰도 잘 안 터지는 산속이니 고향  강림은 학생수가 줄어 전학을 가면 대환영일 것이다라는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싸움 상대가 검사 딸이라 그 애가 저 싸움 걸고  대 일단 은 후에 팔목을 쳤다고 진술해도 검사딸답게 피해자 코스프레를 했다. 선생님은 검사딸 편만 들었다. 삼양지구대 경찰도 상미편만 들었다.

  동생은 전국카트라이더 토너먼에 출전해 준우승했다. 학교교문에 <삼양초등학교 5학년 제갈종호 전국카트라이더 대회 준우승> 경축 현수막이 붙었다. 삼양초등학교에서는 강림 촌구석으로 전학을 가느냐 그냥 1년만 더 다니면 삼양초등학교 졸업생으로 두고두고 학교를 빛낸 선배 동문으남을 텐데 하면서 담임과 교감과 교장까지 말렸다. 남들은 촌구 석에서 서울로 전학을 못해 안달인데 서울서 강 원도 강릉. 춘천. 원주급도 아닌 횡성군 림면 단위로 전학이냐고 말렸다.

  아빠는 부귀빈천 없어야 할 학교에서조차 <유검무죄 무검유죄>, <유전무죄 무전유죄> 말도 안 되는 소리가 하는 곳이 서울이다. 천박한 돈만 아는 놈들이 득실대는 서울을 떠나 물 맑고 경치 좋은 강림,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강림중학교가 교육적으로 열 배는 좋고, 강림중 보다 열 배 좋은 곳이 강림초등학교라고  했다. 전세금은 받아서 통장에 두고  2년만 고향다니면 1군지역 근무 채우고  서부전선으로 전출 가게 되면 군인아파트 배정받고 그리 합류하자고 했다. 그러면서 또 동기와 술퍼마셔 민영 아파트 미리 장만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아빠가 학생시절에는 강림, 월현, 부곡, 가천 초등학교가 있었다. 점점 인구가 출고 취학 아동이 없다 보니 부곡, 월현, 가천 초등학교  폐교되었다. 폐교된 학교 선배들의 학적부는 모두 강림초등학교에 이관되었다. 강림초등학 도 20명 이하면 분교로 떨어질 위기였다. 6학 년이 3명 졸업을 하고 1학년에 2명이 입학하여 19명인데, 동생이 전학을 와서 20명이 되었다. 1학년 시절 장호원 나래 초등학 분교로 떨어질 것을 막은 남매였다. 강림중학교는 교나 폐교 염려가 없었는데도 초등학교 5학년에 동생의 전학으로 학교는 금세 활기를 되찾았다. 교장 선생님 겸 고학년 담임 이재웅 선생님은 제갈종호를 19명 전교생에게 소개했다. 지난 5월 전국 카트라이더 대회에 서울 삼양 등학고 학생으로 참가해 준우승했다고 소개했 다. 이제 강림초등학교 동문이 라고 하자 박수가 터졌다. 동생만 소개한 것이 아니라 아빠까지 소개했다. 종호 아버지는 제갈상길 소령이다. 강림초등학교를 5학년까지 마치고 6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갔다는 소개를 하자 다시 박수가 터졌다. 종호 아버지와 선생님이 사실은 5학년까지 같이 공부했다. 난 원주중학생이 되고 종호 아버지는 서울 성남중학생이 되었다고 하자 박수가 또 터졌다. 자리에 앉으니 삼양초등학교는 삼양라 이 세운 학교냐고 짝이 물었다. 아니라고 동네  삼양동이라 삼양초등학교라고 말했다. 아빠는 5년을 다니고 졸업장이 없는 학교에 아들이 5학년 2학기에 전학을 왔다. 1년 반을 다니고 자랑 스러 운 강림초등학교 99회 졸업생 되었다.  할아버지 제갈선호, 할머니 전선옥, 나의 엄마이자 며느리 선우선미 5인 가족 이 되었다.  보통 며느리는 시부모를 모시기 싫어하 는데 손자, 손녀까지 시골로 데려요즘 보기 드문 효부 며느리라고 강림, 월현, 부곡, 운학까지 소문이 났다. 그동안 불효막심한 아빠와 엄마의 불효를 남매가 상상 그 이상으로  행복하게 해 드렸다.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가 농협에 소를 판 돈을 맡기거나 찾기 위해 농협에 가면 상냥하게 인사하고 일퍼리를 신속하게 해주는 김현정이라는 아가씨가 있었다.

   강림은 초등학교나 중학교나 학생이 폐교 직전의 인원수라서 선생님이나 동네 어른들이 학생을 다루기를 금과 은을 다루듯 했다. 학교폭력은 그런 단어조차 찾을 수 없었다. 타지에서 할 수 없는 자연 체험학습을 했다.  이재웅 선생님은 이곳 강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원주중학과 원주고를 졸업하고 춘천교육대학을 졸업하였다. 아빠는 서울로 전학을 갔고 이재웅 선생님은 원주로 전학을 갔다. 전학을 간 이유는 강림에 중학교가 없었 는데 김광수라는 분이 재산상속을 받을 후손 없이 소 100마리를 유산으로 남기고 돌아가 셨다. 마을 어른들이 그의 유산을 어디에 쓸까 회의를 해서 중학교를 짓기로 하고 모금을 했다.  누구는 학교터를 기증했고 마을 원로들이 쌀 한 가마니 소 한 마리 등 기증을 모아 학교를 건립했 다. 김광수의 유산 100마리 소가 주력 자금이고 동네 유지들의 기부금으로 학교건물을 세웠다. 학교 별명이 <백우중학교(百牛中學校)다. 일백 백(百)에 소 우(牛)자를 써서 <백우중학교>라고 불렸다. 그 내역은 강림 우회 심욱종 사무국장이 회의록을 잘 보관했 다. 심욱종은 큰고모 제갈미숙 동기였다. 강림중학교 1회, 2회 졸업생들은 고생 많이 하고 졸업한 선배들이다. 개교 때는 시멘트 골조만  된 상태에서 개교해서 운동장 주변 돌을 골라내고 조경수를 심는 것은 초기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몫이었다. 어느 학교나 1회 2회가 애교심이 큰 이유는 허허벌판에 학교건물만 덩그러니 있던 것을 피땀으로 학교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제갈상길과 이재웅은 부모 잘 만난 덕에 초등학교 6학년 때 도시로 전학을 가서 그런 고생  하고 공부한 끈끈한 애교심이 덜한 도시 중학생이 된 것이다. 다들 칠십 노인이 되었지만 강림중학고 1회, 2회 졸업생들은 모여라 공지를 하면 <호남향우 > <해병전우회>보다 더 잘 모인다. 

  이재웅 선생님은 5, 6학년을 담당하면서 교장 직무대리를 겸 했다. 학생수 20명이라 폐교가 안되고 분교로 학교 명맥을 유지했다. 그 옛날 이재웅 선생이 강림초등학교 입학할 때는 일본인이 수주보통학교로 개교한 목조건물이었다. 학교운동장을 울타리처럼 전나무가 있었다. 어른들 둘이 손을 잡아야 될 정도의 전나무가 있었고 선생님들 교사사택부터 학교 뒷산에 그 정도 굵기의 전나무가 꽉 찼다. 수주보통학교 1회, 2회 선배들이 학교운동장 돌을 골라내고 운동장 울타리로 20미터 간격으로 전나무를 심었다. 남은 묘목은 선생님들 사택을 시작으로 학교 연못과 학교건물 뒷산에 심었다. 세월이 50년을 지나다 보니 나무가 아름드리가 되었다. 횡성군 교육청에서 나무를 팔아 목조건 을 해체하고 콘크리트 2층 아담한 건물을 짓고도 돈이 남아서 강당을 짓고 그랜드피아노까지 비치하였다. 신축건물 입주와 강당 개관 기념 학예회를 했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합창은 공통과제였고 합창 이외의 개인장기자랑 을 했다. 이재웅 선생과  아빠는 5학년이었다. 5학년 58명 중에 50명 합창단원을 뽑았다.

  담임 전국재 선생은 50명을 엄선하고 8명을 떨어뜨렸다. 음치 8인방은 이재웅, 제갈상길, 최수영, 전찬수, 김인수, 김길수 , 송창용, 박용기였다. 이 8명 중에 지휘자 1명을 뽑았다. 4분의 4박자와 4분의 2박자 4분의 3박자 지휘테스트 결과 이재웅이 지휘자가 되었다. 최종 떨어진 7명이 지구를 지키는 독수리 7형제처럼 강림천 다리를 건넜다.  대우슈퍼 이수영 사장님이 물었다.

예들아! 학예회 한다더니 니들은 연습 안 하니? 물었다. 7명의 악동들은 합창하듯 앙큼한 거짓말 했다. 연습하는데요, 우리 7명은 한 번에 합격했고 나머지 43명은 선생님 맘에 들 때까지 연습을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아빠가 서울로 전학을 안 갔으면 중학교 2회 졸업생이었다. 강림목장을 하는 장경수 사장, 태종대에서 리장과 새마을지도자 등 감투를 5개나 쓰고 있는 전찬수, 건설사 사장인 김진섭, 현진 등이 아빠동기였다. 원주에서 개인택시를 하는 최수영은 웃담 친구였다. 

  아빠할아버지이며 나의 증조부 제갈재석을 소개한다.  증조부 고향 은 청일면 유동리였다. 서당에서 한문만 익히고 농사짓던 청년을 일본 에 징용으로 끌고 갔다. 관동군 7396부대에서 광복을 맞이했다. 조선인은 바로 조선으로 보내줄 줄 알았으나 시베리아 포로작 대가 되었다. 거기 포로작업대에서 함께 일하던 사람 중에 김광수라고 북청사람이 있었다.  시베리아 노역을 마치고 흥남항으로 귀국했다. 김광수는 북청이 고향이라 포로심사를 마치고 바로 흥남에서 북청까지의 여비를 받아 떠났다. 남한지역이 고향인 제갈재석은 새해가 되어 출 발했다. 38선까지는 북한 장교가 인솔해 주었다. 파주에서 경찰에 붙잡혀 인천 전재민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모든 조사를 마치 고 청일로 갔으나 정 붙일 사람 하나 없었다. 청일을 떠나 강림으로 왔다는 이야기는 증조부 제갈재석이 조작한 인생스토리다. 영화 <화차>에 보면 주인공이 어느 한 사람의 이력을 자신의 이력으로 꾸며 가짜로 사는데 증조부가 가짜 어렸을 만든 것은 사실대로 북청서 내려왔고 아편장사로 번돈을 김구 선생과 김일성에 균등하게 군자금을 보냈다고 이실직고하면 증조부는 박정희 시대에 중앙정보 부에서 최종길 교수보다 먼저 고인이 되었을 것이다. 북청이 고향임을 숨기고, 아편으로 번 돈을 김일성과 김구 선생에게 군자금 보낸 것도 숨기고 사셨다. 청일면 유동리 인생을 조작했고 증조부 산소도 유동리에 있다.

  조작한 이유는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조금이라도 김일성과 친분이 있으면 빨갱이 낙인을 찍어 무기징역이 나 사형을 시켰기에  인생조작을 했다. 실제 증조부 인생은 지금부터 이야기가 진짜다. 증조부는 1911년 신해생이다. 1910년 경술국치라고 하는 일본이 조선을 삼킨 이듬해에 태어났다. 청일이 아니라 함경도 북청이었다. 서당에서 한문은 사서삼경을 익혀 겁날 것이 없었다. 만주로 갔다.

  요즘도 <버닝썬> 사건이나 영등포경찰서 <백 경정> 마약수사팀이수 사하고 그 많은 마약을 어떻게 공항 게이트를 통과하였느냐고 질문에 말레이시아 운반책이 공항세관 직원이 직원용 게이트로 나가게 했고 택시까지 불러주었다고 하듯이 경찰이나 검찰 세관의 도움이 필요하다.

  1930년대 만주에서 제갈재석과 김광수가 이편장수를 했다. 이때도 일본 순사나 중국공 산당이 뒷배를 봐주었으니 아편장수를 하지 그런 뒷배 없이는 아편장수를 할 수가 없다. 영등포경찰서  백 모 형사가 마약밀수법을 잡았다. 마약의 유통과정을 역추적했다. 공항   검색대를 마약을 휴대하고 통과한 것이 이상해 현장조사를 했다. 마약을 몸에 랩으로 칭칭 감고 들어온 것을 세관직원이 검색대 아닌 직원 통로로 통과시켜 주고 친절하게 택시까지 잡아주었다. 1930년대 증조부가 아편장사할 때나 지금 마약으로 돈을 벌려면 검찰 경찰 끄나풀 없이는 그 일을 할 수없다.

  아편으로 막대한 돈을 벌었다. 번돈의 30%는 김구 선생에게 30%는 김일성에게 다른 사람 이름으로 군자금에 쓰도록 보냈다. 40%는 다음 아편장사하느라 아편 매입을 했다. 모르는 사람들은 김일성에게 왜 돈을 주느냐고 하겠지만 증조부가 아빠에게 해준 말은 그 시절은 김구나 김일성이나 때려잡자 왜놈에는 좌우가 없었다고 했다. 후에 김일성이 저렇게 나쁜 놈이 될 줄 증조부는 모르고 돈을 보냈다고 통탄하셨다.

  간도특설대 출신 백선엽과 박정희를 증조부는 바퀴벌레나 송충이 보듯 했다. 간도특 설대에 있으면서 독립군을 토벌에 앞장선 것을 증조부는 눈앞에서 보았고 아편과 돈주머니를 간도특설대들에게 털린 경험이 있기에 돌아가실 때까지 미워했다. 백선엽 회고록 일본어판과 한글 회고록 초판에는 간도특설대에서 독립군을 토벌한 것에 죄책감을 기술했다. 재판에서 은근슬쩍 그 내용을 삭제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에 고문으로 있으면서 한국전쟁사에서 백선엽이 실패한 것을 뒤집어 미화했다. 심지어 이명박 대통령 시기에 오성장군 원수 칭호를 추대하 일까지 벌어진 것을 예비역 준장 박경석 장군의 근거 제시로 추대가 무산되었다.

   강림중학교는 학급수가 1학년부터 3학년까지 1학급으로 편성되다 보니 교장선생님 포함 5명의 선생님이 10개 과목을 가르쳐야 했다. 그러니 국어, 영어, 수학. 과학  선생님이 2개 과목을 가르치고 교장선생님이 국사를 가르 쳤다. 국어 이유나 선생님이 국어와 기술 및 가사를 담당했다. 영어 장미영 선생님이 영어와 한문을 가르쳤다. 수학 권영조 선생님은 수학과 미술을 가르쳤다. 과학 정석봉 선생님은 과학과 음악을 가르쳤다. 선생님들은 자신의 전공 이외 과목을 맡은 것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미안했지만 이 나라 교육법이 학급수에 1.6을 곱해서 교사를 배정하는 법규 때문에 전국에 시골 중학 교는 보통 한 선생님이 자기 전공과 무관한 과목도 가르쳐 야 했다. 

  국어선생님은 특이한 수업을 했다. 교과서가 있지만 교과서는 어쩌다 한번 사용하고 강림면 사무소에서 각종 서식의 쓰임새와 작성방법부터 가르쳤다. 여러 분 중에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사람도 있지만 중학교가 최종학력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보통은 중학교만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는 사람은 모든 것에 모른다고 체념하는 경가 많습니다. 하지만 강림중학교 학생들은 강림중학교가 최종학력이 되어도 세상 살아가는데 이상 없는 수업을 했다. 면사무소의 각종서식 작성법을 익히고, 각종 법률 서식을 수업하고  국어교과서수업을 한 주를 했다. 다음은 강림지구대에 견학을 했다. 지구대장이 경찰의 하는 일 경찰이 되는 방법까 알려었다. 경찰서에 각종 서식의 용도와 작성방 법을 지구대장에게 직접 배우고 연습을 로 한 번씩 해봤다. 그런 후 교과서 진도를 나갔 다. 다음 주 국어시간에는 <예버텅문학의 집> 탐방했다. 문학의 집 원장은 조일수 시인이었다.  시인은 강림이 고향이 아니지만 전국을 여러 곳 돌아보고 이곳 주천강이 흐르는 예버덩 이 문학의 집을 건립하기 좋은 곳으로 생각해서 대한민국시인협회의 도움을 받아 문학의 집을 짓고 젊은 작가들에게 창작공간으로 제공하고 있다고 했다.  시인은 강림중학교 선배는 아니 강림출신 함문평 소설가의 <백서>를 학생들에게 <예버덩 문학의 집> 방문 기념으로 한 권씩  나누어 주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함문평 작가와  아빠는 쌍둥이 형제였다. 형은 제갈영세, 동생은 제갈영국이었다. 

  지금은 각림사(覺林寺)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 지만 조선시대 각림사는 큰 절이었다. 태종 이방원이 13세에 여기 각림사에서 공부했다는 것은 태종  나오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각림사 한 칸에 고려마지막 충신 원천석이 이방원만 가르칠 수 없어 박윤희, 김홍기, 최홍기, 임은묵, 채수석, 구법모 등을 가르쳤다. 이방원과 . 수학한 자들은 이방원이 왕자의 난에 묻지마 이방원 편에서 목숨 걸었다. 죽은 자는 실록에 없다. 살아남은 자들만 위 이름없는 자들만 조선 록에 남아있다. 그 큰 사찰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치악산 곧은치에 <각림암>만 남아있었다. 각림암 함칠봉 스님이 시주를 왔다. 제갈영세, 제갈영국 쌍둥이 엄마 전선옥은 집에 쌀이 업습니다. 옥수수로 시주를 해도 될까요? 물었다. 함칠봉 스님은 보살님 정성이 문제지 시주에 쌀이면 어떻고 보리면 어떻고 옥수수면 어떻습니까? 시주는 과시가 아니고 있는 그대로 시주가 최고입니다라고 했다. 이 말에 옥수수 한 되를 시주를 했다. 칠봉스님은 그런데 이 집에 아이가 쌍둥이가 있군요? 그렇습니다.

큰애는 제갈영세, 작은애는 제갈영국입니다. 허허 보살님 남편과 시아버지가 욕심이 크십니다. 이름에 헤엄칠 영은 돌림자일터 인간 세를 쓴 영세, 나라 국을 쓴 영국 모두 욕심이 과한 이름입니다. 과욕은 화를 부르지요. 과유불급이 진시황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여기 제갈집안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나무아미관세음보살 작은 아들은 태어날 때 오줌발이 벽을 적셨을 것이고, 큰 놈은 오줌발이 바닥에 깔렸을 것이오? 그렇습니다. 

이 두  아이를 한집에서 키우면 둘 다 조실부모할 것이니 제갈성씨를 온전히 보전하기 위해 큰 놈은 절에 데려갈 것이니 작은 아들도 이름을 영국으로 하지 말고 서로 상 길할 길 상길로 하시오. 그래도 아들을 넘기는 것은 남편과 시어른께 말씀을 드려야 한다고 할 때 제갈재석이 사랑채에서 나왔다. 스님 말을 듣고 영세를 스님에게 넘겼다. 스님이 함칠봉 스님이라 제갈영세는 함문평으로 개명했고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소설가가 되었다. 이 인터넷 검색창에 <함문평> 치면 <백서> 작가로 검색된다. 함문평 작가는 제갈상길 형님이다. 아빠 고향에서 공부하다 보니 꽁꽁 숨겨둔 아빠 출생의 비밀도 알게 되었다. 영원한 비밀은 없다. 단지 하루 후에 밝혀지냐 30년 후에 밝혀지냐의 차이만 있을 분이다.

  이유나 선생님은 교장에게 말씀드리고 폐교가 된 월현초등학교를 서울시가 도농상생 협력사업으로 만든 별빛마을 서울캠핑장을 견학했다. 월현초등학교는 광복 후 1946년 3월 1일 개교하였다가 1995년 3월 1일 폐교되었 다. 월현에 초등학교 입학할 어린이가 없어 폐교된 건물을 서울시가 야영장으로 개조했다.

 선생은 강림중학교 학생들을 야영장 견학을 하고 원고지 10매 분량 소감문을 쓰도록 했다. 교과서를 던져버린 국어수업을 현장체험을 병행하면서 학생들을 국어와 글쓰기가 어려 운 공부가 아니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했다. 그렇게 수업을 했어도 횡성군교육청 관리하는 중학생을 대상으로 학력평가에 늘 상위  3개 학교에 선정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강원도에서 주최하는 독서경진대회에서도 일반부는 연영흠 어르신이 중등부 우수상은 나, 제갈미정이 받았다. 초등부는 동생 종호가 장려상을 받았다. 림면은 축제분위기였다.

 그다음 주 국어수업은 강림중학교 설립 재원의 주축이 된 <김광수 선생> 묘소 참배였다. 강림중학교 뒷산 80미터 정도 오르면 평법한 무덤에 김광수 묘가 있다. 만주에서 아편으로 돈을 벌었고 6.25 시기에 남한으로 내려와 일가친척 없이 홀로 지냈다. 그가 소 100마리 유산이 있다는 것을 알고 전국 각지에서 자기가 상속자라는 사람이 10 명이나 나타났다. 횡성경찰서에서 확인 결과 모두 허위였다.

  동생 제갈종호는 게임을 강림초등학교 19명에게 가르쳐주는 선생이 되었다. 이재웅 선생님도 배운다고 하여 종호의 게임수업 제자는 20명이 되었다. 20명을 각각 직책을 부여했다. 단체전을 위해 전반적인 게임진행과정을 설명했다. 닉네임 팀명을 <각림병장>으로 정했다. 상금은 없지만 이재웅 선생이 온라인 게임에 참가했다. 20명 단체게임인데 모든 작전에 대한 전권을 제갈종호에게 맡겼다. 이 대회에서도 처음 참가해서 4강에 올랐다. 게임크루에서는 듣보잡 <각림사 의병장>이 게임동우회 검색어 실검 1위에 올랐다. 강림이라는 명칭은 각림 사가 있는 동네라고 해서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 까지는 각림이었다.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고 1914년 토지조사 업을 했다. 측량기사와 말단 공무원이 <각림> 발음이 안되어 <강림>으로 기록했다. 일제기는 영월군 수주면 강림리던 것이 광복 이후 횡성군 안흥면 강림리가 되었다. 인구가 늘어 강림면으로 승격되었다. 농촌인구가 점점 줄어 월현초등학교, 부곡초등학교, 가천초등학교가 폐교되었 다. 졸업생들의 학적부는 모두 강림초 등학교에 이관되었다.

  강림중학교를 졸업하고 원주여자고등학교에 제갈미정이 입학했다. 5학년에서 6학년이 된 종호는 전국어린이 검도대회 고학년 개인전 우승을 했다. 학교에 우승컵 하나 선물하고 강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강림중학생이  되었다. 강림초등학교를 검도 명문학교 대열에 올리고 졸업했다. 나는 강림중학교를 졸업하고 원주여고에 합격했다. 원주여자고등햑교 합격자표가 있던 날 이 선생님은 합격을 축하한다고 금풍식당에서 짜장면과 탕수육을 사주셨다. 선생님은 아빠에 대해 물었다. 아빠가 청주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한 것과 <사대전>에서 야구 투수를 한 것과 부산에서 3경비중대장 한 것등을 확인했다. 어머 미정이가 우리 선배님 따님이었구나 하셨다. 근황을 물어서 고촌대대 부대대장이고 중령 진급이 못되어 1년 부대대장을 마치면 바로 전역이라고 말씀드렸다. 요즘 학생들은 모두 추첨으로 학교를 가고 그것도 학교 정원보다 중3인원이 수가 적다 보니 학교가 학생을 모셔 오는 세상이지만 그 시절 원주여고는 들어가기 힘들었다.

 조선시대에는 강원도의 명칭이 강릉과 원주의 앞글자로 만들어진 만큼 강릉고와 원주여고 들어가기가 힘들었다. 강릉여고는 대관령 동부의  명문이고 원주여고는 대관령 서부의 명문이었다.

  그렇게 모처럼 학교생활 잘하는 남매에게 아빠가 군대 마지막 보직으로 김포 고촌 대대 부대대장이 되었다. 아파트는  장기동 군인 아파트가 배정되었다. 이사를 했다. 나는 청솔고등학교 2학년 종호는 청솔중학교 1학년에 전학했다. 강림에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과 좀 떨어진 곳에 막내 작은 아버지 제갈상민 가족이 있어 덜 외롭 게 되었다. 남매가 김포로 이사하는 날 조부모와 증조부 네 분은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이쁜 강아지들 건강하게 공부 잘하고 방학하면 놀러오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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