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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문평 Aug 13. 2024

열아홉 여군대령

07. 행복은 성적순도 군번순도 아니야

  전학을 하고 첫 시험을 볼 때마다 울었다. 머리가 나쁜 것도 아닌데 전학을 방학기간에만 어도 덜 억울했을 것이다. 전학을 가면 이전학교와 전학 간 학교 과목 진도사 같은 꼴을 못 봤다. 성적이 저조해 분기탱천한 딸에게 <행복은 성적순도 군번순도 아니라는 말>에 화를 냈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이 아빠 특기야?

 그러자 아빠가 고3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80년에 아빠와 김경희는 고3이었다. 중3겨울 서울시 고입 연합고사를 마치고 종로 2가 학원을 함께 다녔다. 김경희는 집이 수유동이라 12.12군사반란 영향이 없었지만 아빠는 직격탄을 맞았다. 영화 <서울의 봄>을 만든 영화감독은 집이 한남동이라 그날 총소리와 장갑차의 소름 돋는 기계음을  들었다. 43년이 지난 후 기억을 더듬어 <서울의 봄> 영화를 만들었다. 43년 동안 그날의 총소리와 장갑차 소리를 잊을 수 없었다. 그날 아빠와 김경희는 당시 수학을 잘 가르치 기로 소문난 공통수학에 이길동, 수학 2 정석 황승기, 종합영어는 최사정이라고 종로 학원가에 소문이 자자하던 때 황승기 수학 2 정석 특강을 들었다. 황 강사는 수 2 정석강의를 마치면 보너스 강의로 아인쉬타인의 E=mc제곱을 설명했다. 원자탄의 원리를 이해했다. 에너지 분열 포서발을 순식간에 이루어지면 원자탄 무기가 되고 과학적 통제로 서서히 분열시키면 원자력 발전소와 핵추진 잠수함의 에너지라는 것을 고3시절에 배웠다. 특강 수업을  마치고 김경희는 화계사로 가는 84번을 아빠는 흑석동 가는 84번 버스를 탔다. 수유동 김경희는 이상 없이 도착했으나 흑석동 아빠는 버스가 서울역에서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버스기사와 안내양은 일반인은 토큰을 학생은 회수권을 돌려주고 버스에서 하차시켰 다. 검정교복 학생이 군인 100킬로 행군도 아니고 서울역에서 삼각지, 용산을 지나 한강다리 건너 흑석동 에 도착하니 밤 12시가 넘었다. 며칠 동안 공부를 못했다. 발에는 물집이 생겼다.

 삭신이 쑤셨다. 그해 본고사에 김경희는 수학 2에서 4문제 출제된 중에 3문제를 완벽하게 풀었다. 서울대 학교 사범대학 수학교육과에 합격했다. 아빠는 대학에 떨어졌다. 할아버지가 걱정마라고 횡성에서 소를 3마리 팔아 노량진 학원에서 재수를 시켰다. 재수를 해도 낙방을 했다. 3수를 해도 전기대학에 낙방 을 했다. 증조부는 소 몇 마리를 더 팔아서라도 4수를 시키려 했다.


  1979년 12.12 군사반란과 1980년 광주민주 화운동을 진압하고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 시키고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이 징집 나이를 낮추는 바람에 3수하던 해 대학생이 못되면 8월에는 입영을 한다는 예비소집 영장을 받은 상태였다. 후기 대학 중에 골라서 간 곳이 청주사범대학 국어교육과였다. 지금은 청주대라고 검색하면 <서원대학교의 전신>이라고 나온다.  요즘 젊은것들이 서원대교라면 그런 학교도 있어하는 싸가지들이 있어서 하는 말이다. 왕년의 <공주사대> <청주사대><연고전> 모방해  <사대전>을 했었다. 그 시절은 전국에서 교사가 장래 희망인 학생들이 한강 이남에서는 최고의 사대 명문이던 것이 교육을 교육이 아니라 영업의 일부로 여기는 것들이 종합대로 만들어 <사대전>이 사라졌다.

  그 시절 전통이 남아 있어서 한강 이남 사범대학 중에 중등교사 임용시험 합격자 수로 평가하면 청주사범대학 사도정신을 이어받아 21세기에도 서원대학교 사범대학은 임용시험에 합격자가 많다. 국어교육과 1학년 때 <사대전> 투수가 국어교육과 3학년 김운백 선배였다. 1회전을 3진으로 마감하고 자신감 빵빵하게  2회 마운드에서 투수 앞 땅볼에 눈을 맞았다. 눈퉁이가 밤탱이가 되니 던질 수가 없었다. 아빠가 구원투수가 되었다. 옛날 서울 성남중학교 시절 250그램 수류탄을 너무 멀리 던져 야구감독이 집에 찾아와 야구투수 시키려던 것을 장손은 공부시켜 서울대 가야지 천박하게 야구는 무슨 야구냐고 증조부가  막았다. 아쉬움이 큰 김대박 감독이 투수 기본기만 알려주었다. 직구와 손톱으로 야구공 실밥을 흠집을 내고 회전과 역회전 공을 던지는 방법과 회전 없이 무겁게 던지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 기초실력을 <사대전> 야구시합에 구원투수로 마운드에 올랐다. 스케이트나 자전거를 어린 시절에 배우면 어른이 되어도 탈 수 있듯이 야구의 투구도 직구와 변화구 슬라이드는 한 번만 똑똑히 배우면 나이 60도 던질 수 있다.

  그 공주사대와의 야구는 아빠가 마운드를 장악해 1대 0으로 완승봉승을 했다. 1점을 투수가 마지막까지 지키는 것은 선동열과 오승환만이 할 수 있는 투구를 아마추어지만 해냈다. 2024년 일본 <고시엔>에서 교토국제고가 우승할 때 투수의 마지막 삼진이 아빠의 <사대전>에서 마지막 삼진수준이었다. 마지막 삼진을 잡고 글러브 낀 채로 하늘로 팔을 뻗으면서 환호하는 투수의 모습에 아빠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아빠는 대학시절 4명의 여자와 연애를 하고 차였다. 첫 번째는 학보사 김미자, 두 번째는 유아교육과 권현주, 세 번째는 가정교육과 고지연, 네 번째가 무용교육과 곽형신이었다. 아빠가 차였지   먼저 작업을 걸어온 것은 여자들이었다. 입학하자마자 대학재단은 청주사범대학으로는 학생 증원이 어렵다고 학교발전을 위해 종합교로 교명을 변경한다고 했다. 학생들은 대학 본부 앞에 설립자 동상을 밧줄을 걸어 쓰러뜨렸다.

 '청주사대 고수하자!'

 '어용재단 물러가라!'

 '어용교수 물러가라!'

데모구호를 힘차게 외쳤다. 학보사 기자 김미자는 취재하고 사진 찍고를 반복했다. 필름이 떨어지면 <제갈상길 보아라. 동상 앞 코닥필름 2통 부탁해.>라고 지를 보내 면 학생회관에서 필름을 사서 전달했다. 연일 계속되는 데모에 학교는 위수령이 내려졌 다. 중간고사 대신 리포트로 학점을 부여한다고 했다. 교양한문, 문화사, 헌법개 론까지 모든 리포트를 2부 작성했다. 한부는 아빠 이름으로 제출하고 한 부는 김미자 에게 주면 표지만 만들어 제출했다. 요즘 문제가 되는 <김명신 표절논문>의 원조는 아빠가 써준 <김미자 리포트 대필>이었다.  그녀는 기사를 쓰거나 필름 중에서 <이 한 장의 사진>을 고르기 위해 학보사에서 살았다.

  졸업한 기자 선배들이 학보사에 찾아와 회식을 시켜주는 경우도 있어 김미자 기자는 아빠랑 사귄다는 소문만 무성했지 키스 한번 못했다.  모처럼 시간이 난다고 5월 18일 본정통 커피 전문점 <전설의 언덕>에서 6시 30분에 만나자 고 했다. 6시 20분에 도착해 40분까지 기다렸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게시판에 <김미자, 제갈상길 6시 40분까지 기다리다 간다> 손글씨를 써서 부착하고 전설의 언덕을 나왔다. 남자 선배들은 제갈상길 상남자야 멋있어라고 했고 여자 선배들은 남자가 좀 더 기다리지 인내심 없는 남자라고 했다. 사람들은 10분을 우습게 생각한다. 10분이면 전투기가 청주비행 장에서 출격해 평양 금수산의사당을 폭파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두 번째는 유아교육과 권현주였다. 교양한문을 함께 수강했다. 담당 교수가 출석을 부른 후에 무작위로 교재 강독을 시켰다. 권현주는 옆자리 아빠에게 교양한문 교재에 연필로 음을 달아달라고 했다. 다음 주 수업시간에 음을 달아 전해주었다. 그녀는 털실로 짠 조끼를 건네주었 다. 줄자로 가슴둘레를 잰 것도 아닌데 딱 맞았 다. 그 조끼를 받아서 국어교육 전공 강의실에 갔더니 이미 소문이 나서 김미자와 결별하고 권현주와 사귀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세 번째 여자는 가정교육과 고지연이었다. 그녀는 집이 제주였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웅변을 했다. 매년 6월 에는 전국웅변대회가 있었다. 이번 전국 6.25 주제 웅변대회가 열린다고 5분 분량 웅변원고를 써주었다.

  (원고)

6.25가 발발하기 전 전쟁이 나면 평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신의주에 가서 저녁을 먹겠다고 국방부장관은 호언장담을 하였습니다.

정작 6.25가 발발하자 국민 여러분! 국군이 북한군을 물리치고 북진을 하고 있다고 거짓 방송을 하고 이승만 대통령과 각부장관, 국회의원들은 천안 대전으로 먼저 피난을 갔습니다. 순진하게 방송을 믿었던 서울시민만 항강다리가 폭파되어 공산치하 몇 달을 살게 하였습니다.

(이하생략)

고지연과는 잘 나갔는데 돌발이 발생했다. 고지의 오빠 고재필이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공군 중위였는데 재갈미숙과 속도위반을 했다. 하는 수 없이 공군 중위 고재필과 공군회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내가 태어 기 7년 전의 사건이었다. 고지연과 아빠는 청주 무심천 강변 개나리 덤불에 눈꽃이 피었을 때 눈꽃 속에서 눈물의 마지막 키스를 하고 사돈이 되었다.  인생에 가정법이 없지만 만약에 말이야 고모와 고모부 속도위반 없었다면 이 몸이 태어나 지 않았을 것이고 제갈길 아내가 고지연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아픔이 있기에 아빠는 학년수 보다 전학 간 학교가 많은 딸에게 남들은 <개똥철학>  라고 비웃을지 모르지만 <인생에 행복은 성적순 도 군번순도 아니다.>말핬. 아빠가 횡성 촌구석 학교 58명 중에 1등 재수 없으면 2등을 하다가 서울로 전학을 오니 77번이었다. 첫 시험에 77명 중에 50등을 했다.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엄마가 학교성적으로 닦달했지 아빠는 성적을 물어본 적이 없다. 에게 무한 사랑 무한 신뢰를 했다. 동생 종호 교통카드를 엄마 모르게 충전해 주어 동생이 전국카트라이더 대회에 준우승하게 한 것도 아빠의 사랑이었다. 만약 아빠가 동생 교통카드 충전해 주는 것이 발각되었다면 바로 아빠 용돈을 삭감할 엄마였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동생과 아빠의 깐부는 들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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