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석동 연못시장 복덕방에서 최태자마마의 영생교전단으로 흑석동 노인들이 두 패로 갈렸다.
저런 기행이라면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노인과 가경 신생처럼 정통 유학을 공부하신 분은 다 혹세무민이라고 일축하는 파로 양분되었다.
1975년 최태자마마는 영생교를 그만두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요즘은 신학대학교와 신학대학원 학사관리가 엄격하지만 그 시절은 돈 몇 푼 만 주면 목사 안수를 주는 곳이 태반이었고 최태민도 그런 부류라고 전기영 목사와 탁명환이 여러 글에서 밝혔다.
1973년 5월 빌리그레이험 목사가 여의도 광장에서 수백만 집회 전도를 했는데 그걸 모방하려 했는지 대한구국선교단을 만들어 총재가 되었고 박근혜를 명예총재로 하여 기업인으로부터 세금 같은 기여금을 뜯었다.
기독교에 호국정신을 가미하니 박정희가 솔깃했으러라고 가경 선생은 말씀하셨지만 다음 이어지는 말이 하여튼 종교를 호국에 끌어들이는 꼴이 권훤이 미륵이라고 한지 천년이 흘렀는데 요새도 저런 미혹함이 먹히는 것을 보니 북한은 김일성교가 성하고 남한은 사이비 기독교 최태민총재를 정점에 두는 유신 대한구국선교단이 기존 기독교 성결교 감리교 장로교 교단들은 속으로 부글부글 끓어도 유신시절은 긴급조치라는 것이 있어서 내뱉지는 못했다.
임진강에서 기독교인 2 천명을 동원해 구국선교단 최태민 총재와 박근혜 명예초애는 흐뭇한 표정으로 사진을 박았다.
그 시절 유신헌법에 긴급조치가 무서워 가경 선생은 오직 말 상대를 손자에게 막걸리 한 되 받아오게 하시고는 절대로 손자는 듣기만 하고 일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라고 하셔서 말없이 살았는데 유언비어로 생각했던 일이 박근혜 최순실게이트르 가경 선생 어록이 지어낸 말이 아니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만약에 가경 선생에게서 최태민과의 이런저런 이야기가 언론에 크게 보도되어 최태민과 박근혜가 차단되었다면 먼 훗날 최순실게이트로 박근혜가 탄핵되는 일이 없었거나 박근혜가 대통령 자체가 안 되었을지도 모른다.
역사에 가정법이 없으니 그런 상상만 해봤다.
손자는 할아버지가 그리워졌고 산소에 손자가 책을 냈습니다라고 막걸리 한잔 올리고 상석에 책을 올렸다.
1975년 최태민은 대한구국선교단을 만들고 자신은 총재 박근혜를 명예총재로 추대했다. 박근혜가 명예총재로 있자 기업들이 알아서 후원금을 바쳤다.
대한구국선교단은 대한구국봉사단으로 개명했다가 새 마음봉사단으로 이어지다가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 해산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