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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문평 May 27. 2024

단편소설

05. 백우

  김태훈은 아버지가 그리울 때면 강림중학교 뒷산에 오른다. 중학교 설립자 백우(百牛) 김광수 선생 묘지에서 김창완의  시 <무등산에게>를 불러 본다.


 말문이 막혀

 억장이 무너져

 넋 놓고 주 질러 앉은 그대 마음을

 쓰다듬어 주고 싶은 내 손

 너무 작아 가랑잎 하나보다

 초라한 내 손

 호주머니 속에 감추고

 다시 보이지 않는 얼굴

 얼굴 만나러

 아무 거리나 헤매다가 문득

 고개 들 적마다 거기

 그의 얼굴로 항상 있는 그대

 엎드려 얼굴 묻고

 어깨만 출렁이는 그대     

  -김창완의 <무등산에게>-     


아버지 김경흠 상사 국군방첩사령부 동원훈련장에서 훈련 도중 홍제동 대공분실로 연행되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언론에 공개된 이후 더 이상 대공분실의 기능을 할 수 없자 새로 지은 것이 홍제동 분실이다. 1980년 5월 18일에 광주에 있었다. 국군보안사령부 505 보안부대, 즉 광주 보안부대 수사관이었다. 정보사령부나 보안사령부나 민간인을 대면하는 부대의 대면 직위자들은 상사라는 군대 계급 대신에 계장 또는 반장이라는 가장 호칭을 사용했다.

  1980년 5월 505 보안부대장은 이태우 대령이었다. 이 대령은 성격이 소심해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광주에서의 큰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고민을 하다 부대장을 그대로 둔 채로 광주사태 감독관으로 홍석철 대령을 광주로 파견을 보냈다.

  김 반장의 직속상관은 서필원 중령이었다. 서 중령은 광주 보안부대 수사과장으로 보안사령부 이학선 보안처장이 전국 보안부대 수사과장 회의를 주관하고 광주에서 올라온 서 중령에게 특별 지시를 내렸다. 5월 18일 00시를 기하여 전국으로 계엄이 확대될 텐데, 미리 광주에서 활동 중인 반정부 시위 주동자급과 정부에 비판적인 교수 명단을 주면서 사전에 검거하도록 했다. 계엄 하이고 이미 계엄사령부에서 검찰이나 경찰계통으로 공문으로 지시가 하달되었기 때문에 수배자 체포는 관할 경찰에 협조 요청하면 최대한 경찰이 체포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계엄하의 경찰은 보안부대 수사관의 직속 부하나 마찬가지로 보안부대 수사관이 메모만 전달해도 즉각 처리되었다. 문제는 광주지역 인권변호사로 유명한 홍남순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 서 중령은 김 반장에게 홍남순 변호사를 김대중에게 1억 원의 돈을 받아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 운동권 학생들에게 나누어준 것으로 조서를 꾸미라고 했다. 그는 서 중령 명령에 반대되는 말을 했다. 홍남순은 여기 광주지방대를 졸업한 사람도 아니고 홍 변호사님은 광주에서 데모가 심해지는 것을 수습하고 확산을 저지하는 분인데 그에게 돈을 뿌려가며 데모를 지원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라고 했더니 불순분자에게 ‘님’을 왜 붙이냐고 너 항명하는 것이냐? 라며 권총을 뽑아 그에게 겨누었다. 그는 더 대차게 나갔다. 쏠 테면 쏴 봐! 하면서 머리를 들이대자 서 중령은 슬며시 권총을 다시 권총집에 넣었다. 그렇게 김 반장과 서 과장의 틀어진 인연은 광주사태가 공수부대와 20사단에 의해 완전 평정이 되고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되었다. 광주보안부대장 이태우 대령이 맘에 들지 않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보안사령부 최광택 준장을 채경조 대령과 함께 광주보안부대로 내려 보냈다. 먼저 보낸 홍 대령은 광주시내에 은거하면서 편의대를 기획 조정 통제하였고, 최 준장과 채 대령은 보안부대 내부를 장악했다. 이 대령은 허수아비 보안부대장이 되었다.

  광주사태에 대하여 지만원이가 광주에 북한군 광수가 600 명 내려왔다는 북한군 개입설의 원조가 홍 대령이 지휘하는 편의대가 지만원에게 북한군으로 보인 것이라면 홍 대령은 아주 임무수행을 잘한 것이 된다.

 특전사 요원 중에서 체구가 왜소하고 깡마른 인원을 차출하여 편의대로 운용한 것이 효과만점이었다. 편의대 운영에 대해서는 광주청문회에서 정호영 특전사령관이 광주에 왜 내려갔느냐? 질문에 부대원들 속옷과 사복을 가져다주었다고 실언을 했는데, 그것은 실언이 아니고 얼떨결에 나온 진실의 말이다. 2군 사령부 계엄 상황일지, 전투병과학교 계엄 상황일지, 육군본부 상황일지에도 편의대 운용이 기록되어 있다.

 김 반장은 1981년 8월 30일 군대에서 불명예 전역했다. 광주사태에 서 중령과 홍남순 변호사 건으로 다툰 것이 불명예 전역을 불러왔다. 광주사태 시기에는 일손도 부족하고 김 반장의 수사진술조서 만드는 솜씨가 필요했으나 모든 것이 보안사령부에서 계획한 대로 진행된 6월 이후는 김 반장은 계륵이 되어 있었다.

 불명예 전역을 해서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곳을 찾았다. 전국 지도를 펼쳐 몇 군데 후보지를 선정했다. 전라북도 무주와 강원도 양구, 화천, 강림을 후보지로 선정하고 답사를 했다.

 돈이 별로 많지 않으니 한정된 돈으로 농가와 밭이 딸린 곳을 구할 곳이 강림뿐이었다. 다른 곳은 이미 개발이 될 만큼 되어 땅값이 모두 평당 20만 원 이상이었고, 평당 10만 원으로 구할 수 있는 곳이 강림이었다.

 지금이야 강원도 횡성군 강림면 강림리지만 30년 전까지만 해도 안흥 찐빵으로 유명한 안흥면 강림리였고 1989년에 강림면으로 승격했다. 강림(講林) 한자로 외울 강(講), 수풀 림(林)이지만 이것은 조선총독부에서 토지조사 사업을 한 1914년 이후의 명칭이고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는 천태종의 유명한 사찰 각림사(覺林寺)가 있어서 ‘각림’으로 불리던 곳이었다. 조선총독부 토지조사 측량을 하고 기록하는 말단 공무원이 각 발음이 안되니 가꾸림으로 하려는 것을 조선총독부 과장급 관리가 강림으로 하되 깨달을 각과 그래도 가까운 외울 강을 넣어 강림(講林)으로 했다.

 천자문도 모르는 무식쟁이가 기록했으면 ‘강림(江林)'이거나 예수쟁이가 지었으면 ‘강림(降臨)’이 되었을 것인데 ‘강림(講林)’이 된 것은 천만다행이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해 물러가고 78년이 지나도록 조선총독부 관리가 각 발음을 못해서 지어준 이름을 아무 문제의식 없이 사용하는 것을 보면 강원도지사, 횡성군수, 강림면장, 횡성문화원장이 확실한 철밥통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전라도 광주보안부대와 천리나 떨어진 강림은 은둔자에게 살기 좋았으나 동원예비군훈련이 문제였다. 원주 36사단 예하 108 연대에서 받으면 강림서 가까워 좋았는데, 행정망이 전산화되다 보니 보안부대근무자라고 동원예비군훈련을 보병부대가 아닌 보안사령부로 동원소집이 떨어졌다.

 예전에는 방첩사령부가 경복궁 근처였는데 지금은 미술관으로 변했다. 대신 방첩사령부로 이름이 변경되어 과천으로 이전을 했다. 과천 남태령 고개를 넘어 과천시 사서함 1113으로 된 곳을 찾아갔다.

 일반부대도 동원훈련 콘크리트 막사가 다 있는데, 여기 방첩사령부는 이전한 지 얼마 안 되어 현역들이 근무하는 공간만 신형건물이고 동원예비군은 24인용 텐트를 쳐서 훈련을 받도록 했다. 군대를 안 가보고 고위공직자가 된 사람은 이런 곳에서 어떻게 훈련을 받느냐? 그런 소릴 하겠지만 막말로 흑탕물을 마시고 동물훈련을 받아본 방첩부대 부사관 출신들은 이런 24인용 텐트에서 훈련하는 것은 호텔로 생각이 되었다.

  현역 부사관 중에서 보안부대로 차출해서 운용하던 것을 어느 해부터 대학 졸업자를 대상으로 전문가를 육성한다고 방첩분야 하사관을 공개 모집했다. 경쟁은 치열했고, 아내는 반대하였다. 대학을 졸업했으면 대기업 아니라도 갈 곳이 많이 있을 텐데, 장교도 아니고 부사관으로 가면 아무리 잘해도 장교와 다툼이 생기면 손해를 보는 것은 아래 계급 부사관이라고 반대하였다.

 동원 2일 차에 동원훈련 부대장이 아버지 김 상사를 찾는다고 안내방송이 나왔다. 부대장실 텐트로 가니 사복 차림 두 사람이 있었다. 직감했다. 수사관이라는 것을.

“김경흠 당신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합니다.”이런 상태서 반항해 봐야 바보짓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는 순순히 수갑을 채우도록 손을 내밀었다. 선팅이 어둡게 된 스타렉스 차량이 대기하고 있었다. 차량은 남태령 고개를 넘어 사당에서 동작대교를 건너 서울역을 지나서 홍제동에 도착했다. 홍제동 대공분실에 도착하자마자 김경흠 자신의 옷을 벗고, 분실에서 내주는 허리띠가 아닌 고무줄이 헐렁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김경흠은 수사관들을 몰랐지만 수사관들은 김 반장에 대해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김경흠 씨, 당신은 이제 우리 보안부대의 선배 부사관도 아니고 국가보안법 위반  피의자입니다. 일체의 존칭 없이 이름으로 호칭합니다. 알겠습니까?”

“예.”

“모든 질문에는 예, 아니오. 로만 대답합니다. 알겠습니까?”

“예.”

“수기 <무등산은 말이 없다> 당신이 쓴 것입니까?”

“예”

“수기에 지만원이 북한군 광수 600명이라고 한 것은 홍석철 대령이 지휘하는 편의대라고 했는데 맞습니까?”

“예.”

“책 서두에 아들이 곧 중학생이 된다고 했는데 강림중학교 1학년 김태훈이 아들 맞습니까?”

“예.”

“이미 5.18에 대해서 정부에서 발표했고, 관련자들 국가 보상도 다 마친 상태에서 이런 불경한 <무등산은 말이 없다>를 쓴 이유가 뭐야? 무등산이 말이 없지 있으면 그게 산이냐고?”

“아닙니다.”

“아닌데 왜 써?”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썼습니다.”

“야, 이 새끼가 입만 살아서 붕어랑 놀게 해 줄까? 욕조로 들어간다. 실시!”

  욕조에는 물이 반 정도 담겨있었다. 팬티만 입은 몸으로 욕조에 들어갔다.

1980년 광주에서 발생한 5월 18일의 사건은 정부에서 발표한 것처럼 광주에서 김대중의 사주를 받은 학생들이 시민들과 합세하여 데모를 폭동으로 몰아간 것이 아니라 광주에 폭정을 유발하기 위해 전두환을 정점으로 하는 신군부가 특전사를 동원해서 무자비한 진압을 시도해서 힘든들과 학생들을 악에 받치게 하여 데모가 커진 것이었다.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홍석철을 광주로 보내 감독관 겸 편의대를 기획 조정 통제한 것을 아는 그를 속일 수는 없었다.

 아들이 강림중학교에 입학할 때쯤 원고를 완성했다. 완성되자 책으로 출판하려고 했다.

 1979년 12월 12일 군사반란부터 5월 18일 광주사태까지 일련의 정권찬탈에 핵심활동을 한 사람은 권정수, 허이수, 허도 평, 이학선 등이고 아래 행동대장급은 정도영, 최예섭, 남웅종, 이상연, 한용원, 변규수, 이상재, 신동기 등이었다.

  1980년 5월 뉴스로는 대한민국의 신문보다 북한에서 발행하는 노동신문이 더 상세한 보도를 했다. 그런 것을 근거로 광주사태를 북한의 사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지만원은 북한군 600여 명이 광주에 투입했다는 주장을 했다. 아무런 검증도 없었다. 나중에 30년이 흘러 비밀이 해제된 미 국방성 문서를 봐도 북한군 개입은 없다. 만약에 북한군이 광주사태에 직접 개입했다면 광주 사태가 그 정도로 마무리되었을 리가 없다. 전국규모로 확전 되고 공산화되어 남이나 북이나 김일성을 수령으로 호칭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광주에서 북한군 개입설을 유튜브로 확대 재생산하는 인간을 보면 아가리를 콱 찢어버리고 싶다. 1983년 3월 18일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4학년에 다니던 중에 암호명 ‘녹화사업’ 대상으로 군대에 입대하여 맘에 없는 군대생활과 휴가 나오면 동아리 선후배들의 동향을 망원 37호로 보고했던 김두한이라는 학생이 있었다. 김두한이 군대서 의문사를 했는데, 그의 군복 주머니 속에서 발견된 ‘유서’라는 시가 들어있었다.


          유서     


 기다림밖엔

 그 무엇도 남김 없는 세월이여

 끝없는 끝들이여

 끝없는 가없는 모습도 없는

 수렁 깊이 두발을 묻고 하늘이여 하늘이여

 외쳐 부르는 이 기나긴 소리의 끝

 연꽃으로 피어 못 난 이 서투른 몸부림의 끝

 못 믿을 돌덩이나마 하나

 죽기 전에 디뎌보아

 죽기 전에

 끝없는 네 하얀 살결이나마 기어이

 불길한 꿈 하나는 남기고 가마

 버림도 소리도 빛도 없는 세월이여

 기다림밖엔

 남김 없는 죽음에서 일어서는

 외침의 칼날을 기다림밖엔

 끝없는 끝들이여 

    

김 반장은 대학노트 한 장을 찢어 적은 이 글을 읽고 또 읽어 암기할 정도가 되었다. 눈물이 났다. 억지로 참았다. 자신은 잘한다고 보안부대의 수사관으로 명성을 날렸지만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이런 죽음의 경지로 모는 일을 했다는 것에 마음이 미어졌다. 이 시의 주인공은 틀림없이 자살을 가장한 타살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1980년 5월 17일 광주보안부대장실에서 나온 서 중령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김 반장을 포함 10명의 수사관을 회의실로 집합시켰다.

  서 중령 말에 의하면 5월 18일 0시 즉 5월 17일 자정을 기하여 전국계엄으로 확대된다. 형식을 전국계엄확대라고 하지만 실제는 광주 때문에 전국으로 확대하는 것이라고 했다. 제주도를 제외하는 부분계엄은 데모주동자 색출에 형사적인 법적 절차를 따라야 하지만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 모든 입법, 사법, 행정의 권한이 계엄사령부로 이관되기 때문에 데모주동자체포에 영장 없이 계엄포고령 하나로 다 해결된다고 했다.

   아울러 오늘 밤 24시 이전에 10명의 수사관에게 인원을 분담시켰는데 자기가 맡은 인원은 수단과 방법 안 가리고 체포하여 계엄보통군법회의가 있는 전투병과학교 수감장소에 수감하라고 했다. 이번일은 극비 중에 극비인 만큼 보안유지에 각별히 신경 쓰라고 했다.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들려는 추종세력들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통일주체국민 회의에서 대통령 당선될 가능성이 없으니 광주에서 폭동을 일으켜 정권을 잡으려고 한 것이라 고 조직도까지 그려져 있었다.

  서 중령은 연 수사관을 불러 광주가 계엄확대의 핵심인 이유를 설명했다. 김대중이 대통령 병에 걸려 1971년부터 1980년까지 시도했으나 박정희 철벽에 이룰 수 없었는데 이번에 김영삼, 김종필, 김대중 3파전만 되면 필승 대통령인데, 복병 전두환을 만나서 12.12군사반란에 이어 정권찬탈까지 노리는 것을 김대중 추종세력이 간파하고 전두환 집권 전에 폭동으로 김대중 선생을 대통령으로 옹립하려 한다. 그 점을 전두환 보안사령관 핵심 참모들이 눈치채고 역이용해서 김대중을 체포하면 광주에서 폭동을 일으킬 것이고 그걸 이용해 정권을 차지할 밑그림을 그리고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내란 최고 수괴는 김대중, 재야수괴는 홍남순, 학생수괴는 정동년, 폭도수괴는 김종배, 기타 똘마니는 박남선, 윤석주로 파악한 것이라고 메모지를 연 수사관에게 슬쩍 보여주었다. 이렇게 사전 김대중 내란음모 사전 조직도를 만들고 수사하고 체포하여 고문을 해서라도 그틀에 만들어 넣었다. 결국 수사 조서라는 것이 저 조직도를 부각될 수 있게 체포하고 조서를 꾸미는 것인데 하필 홍남순 변호사를 김 반장이 맡게 되었다. 체포까지야 했는데 심문조서를 작성할 수가 없었다. 홍남순 변호사를 김대중으로부터 1억 원의 돈을 받아 광주에 있는 조선대, 전남대 학생들에게 데모 경비로 준 것을 조서에 꾸미라고 했지만 홍 변호사를 고문하고 회유도 먹히지 않아서 도저히 서 중령 지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솔직하게 서 중령에게 보고했다.

  홍 변호사는 군대서 장교가 포로가 되면 소속, 계급, 군번, 성명만 밝히고 기타 사항은 묵비권을 행사한다는 장교교육과정 하나인 <신문과저항> 늘어  서 배웠는지 적절하게 잘 구사했다. 보안 부대에서 내로라는 고문기술자로 정평이 난 김 반장 도 어쩔 수 없었다.

 1980년 5월 22일 오후 4시 광주통합병원 근처에서 시민군이 붙들어 계엄군에 인계한 간첩 용의자 전옥주를 서 중령은 김 반장에게 김대중의 지시를 받아 가두방송을 한 것으로 심문조서를 꾸미라고 했다.

 홍제동 대공분실은 남영동이나 서빙고 호텔 보다 외부는 깔끔했다. 하지만 내부시설은 물고문에 쓰이는 1인용 욕조, 몽둥이 나무와 쇠파이프 야구방망이 등 남영동 시절의 고문  를 그대로 비치했다. 김 반장은 비록 피의자 신분이지만 스스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다녀온 것도 아니고, 1980년 광주에서의 경험하고 본 것을 아들에게 부끄럽지 아니한 아비가 되기 위해 쓴 것을 문제 삼아 국가보안법으로 다스리는 것이 억울했다. 항상 역사는 승자의 편이지만 진실을 영원히 묻어둘 수 없다는 것을 수천 년 역사에서 교훈을 도출할 수 있지만 1980년 광주에 유혈 폭동을 유발한 신군부는 그걸로 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 위원회를 만들고 8월 16일에는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를 만들고 9월 1일에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장충체육관에서 거수기 통일주체국민회 의가 99%의 찬성을 해서 대통령이 되었다.

  이렇게 99%의 투표를 하는 것은 김일성을 비난할 것이 못되는데 김일성의 99% 찬성은 독재이고 전두환의 99% 찬성은 민주주의라는 궤변을 1980년에는 뉴스로 보도했다. 김 반장 은 홍제동 분실에서 당당함을 유지하려 애써 이나 3일까지는 굶는 것을 참았는데 4일 차에는 사정을 했다. 뭐라도 좋으니 먹을 것을 좀 주면 수사에 협조하겠다고 했다. 철제 밥국, 삼찬 식판에 밥이 들어왔다. 순식간에 식판을 비웠다. 수사관은 김 반장이 쓴 <무등산은 말이 없다>를 책상 위에 놓고 조목조목 심문을 했다. 우선 이 글을 왜 썼느냐? 고 물었다. 글 쓰는 사람이 목적 없이 썼겠습니까? 원하는 답을 말씀드릴 테니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놈이 너의 생각을 말해봐? 제 생각은 1980년 광주에서의 10일간의 데모와 진압 작전이 홍석철 대령을 전두환이 광주사태 감독관으로 파견 보내고, 특전사에서 북한군처럼 삐쩍 마른 인원을 차출해서 편의대로 운용하고 진압하는 공수대원은 초기에 무자비하게 진압을 해서 학생과 시민들의 반감을 유발해서 데모가 폭동으로 되는 것을 조장했습니다. 그걸 글로 써서 이 나라에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쓴 것입니다.

 “야, 홍석철 대령을 네가 보기나 했어? 보지도 않은 놈이 본 것처럼 글을 쓰면 홍 대령 유족이 너를 사자명예훼손으로 고발하면 여기 다시 와야 해? 그거 알고나 씨부리는 거야?”

 “사자명예훼손 할아비로 고소를 해보 슈? 내가 목숨 걸고 이 글을 쓸 때는 그 정도 준비와 각오 없이 쓴 줄 아시오? 전두환이 1980년 5월 21일 광주에 내려와서 광주사태가 진압되고 난 후에 총기사용의 법적 책임을 면하기 위해 참모들에게 총기사용에 법적 문제가 없도록 조치하라고 해서 이루어진 것이 윤흥정 전남북 계엄분소장에게 총기사용을 계엄사령관에게 건의하고 인가받은 형식을 취했지만 사실은 보안사령관 의도대로 하수인 노릇을 한 것이지 윤흥정이나 이희성이 뭔 생각이 있어서 그리한 것이 아닙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살아생전 자신은 광주사태에 명령권자 아니라고 발뼘을 했는데, 군대에 일반부대 출신자는 속일 수 있으나 이승만 시절 방첩부대부터 보안사, 기무사, 안보지원사령부, 방첩사령부 등 수많은 명칭 변경이 있었지만 핵심은 국가가 위급할 시 대전복 활동을 위하여 군의 모든 작전과 화기사용 부대이동에 대해 작전부대 지휘관에게 지휘조언을 하고 긴급한 것은 선 조치 후 보고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계엄사령관, 2군 사령관, 전남북 계엄분소 게 책임이 있지 자기는 책임 없다는 말을 회고록에 썼고, 언론 인터뷰도 했는데 빨간 거짓말 다.”

 “이 놈이 묻는 말에만 답해? 왜 묻지도 않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언급하는 거야?”

  서 중령은 보안사령부에서 이학선이 계획한 것을 광주에서 구체화시키는데 충견이 되었다. 1980년 5월 18일 전국계엄확대와 더불어 광주외곽을 차단하고 통신을 두절시켰다.

 광주는 육지지만 하나의 섬이 되었다. 대중가요로 히트한 <바위섬>은 해운대나 동백섬 앞의 바위섬이 아니라 광주의 고립을 바위섬에 비유하여 쓴 가사라는 것을 음악평론가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처럼 광주는 무립 고원의 상태였다. 광주를 고립시킨 후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으로 광주는 시민군과 계엄군의 총격전이 일어난 것이다. 광주를 고립시킨 후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이 시작되었다. 한편 보안사령관에게 특수임무를 부여받은 홍성률 대령은 광주사태의 진행과정을 확인 감독하는 감독관으로 광주 시내에 상주하면서 편의대를 운용하고 있었다. 편의대는 광주시민을 폭도로 만들고 광주 전체를 폭동의 도시로 연출하는 것이었다. 홍석철이 기획하고 확인 감독하는 광주사태는 대성공이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980년 9월 1일 대통령이 된 공신 1호로 홍석철을 지목했다. 편의대에 대한 글은 일반 시중에는 판매가 안 되는 비매품으로 만든 5 공화국 이전의 역사라고 앞전(前)을 넣어 <5 공전사(五共前史)>라는 책이 있다. 거기에 편의대운용이 광주사태에 큰 역할을 했다고 기술되었다. 2군 사령부 계엄 상황일지와 광주 전투병과학교의 계엄시기 상황일지에도 편의대 투입 기록이 남아있다. 이렇게 편의대가 광주사태에 큰 활동을 하였으나 어느 누구도 편의대 활동에 대한 양심 고백이 없다. 그러니 친일파들이 계속 득세하고 독립군 후손들은 계속 가난을 대물림하고 있는 것이다. 나라가 불의를 몰아내고 정의로운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먼 역사가 아닌 지금 현재의 역사를 청산할 것을 청산하고 보존할 것을 보존해야 한다. 모두들 1980년 5월을 망각하려고 애를 쓴다. 한편에서는 기억해야 한다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잊어야 한다고 말을 한다.

  김 반장은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전국으로 계엄이 확대 뉴스가 나오기 전에 사전지시를 내려 서 중령의 희희낙락하는 얼굴이 야수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 김 반장은 무등산은 말이 없다를 쓰기 전에 메모를 했다.

 첫째, 정부가 발표한 사망자 명단은 정확한 것인가?

 둘째, 발포 명령은 누가 내렸나?

 셋째, 광주사태에 대하여 내란폭동인가 민주의거인가?


 홍제동 대공분실에 조사를 받으면서도 광주 악몽에 시달렸다. 1979년 12월 12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러 허삼수와 우경윤이 갔다. 허와 우 둘이 공관으로 들어가고 신형기 준위는 자동차의 시동을 그대로 둔 채로 승용차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총장 공관에서 총성이 들렸다. 차량 트렁크에서 M16소총을 7정을 꺼내 공관 경비병을 향해 난사를 했다. 탄창에 실탄을 가득 장전해서 탄창만 갈아 끼우면 편할 것을 그는 탄장 분리 결합을 잘 못했다. 그리고 탄창 제거 결합하는 시간보다는 7 정의 소총을 나란히 놓고 잡히는 대로 난사를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다. 결과론이지만 그 당시공관 경비 측에서는 신 준위가 M16소총 7정을 연발로 사격하는 소리가 너무 크고, 지속적이라서 대규모 병력이 출동한 것으로 오판하고 감히 대적할 생각을 못했다고 한다. 실제 공관 경비병과 간부의 진술이 일치하여 신 준위는 정승화 참모총장 체포에 숨은 공신이 되었다.

 준위가 일약 장군 급에 해당하는 부이사관으로 승진하는 영예를 차지했다. 5.16 군사반란을 5.16 혁명이라고 배운 장교들이 12.12군사반란 때 반란군과 진압군의 상층부를 형성했다. 5.16 직후에 1군 사령관 등 혁명에 반대를 한 장군들이 반혁명분자로 체포되었다. 12.12군사반란에서도 반란이 성공하면 진압군 장교들은 반혁명분자가 될 것이 두려워 적극진압을 못했고 눈치를 살폈다. 그 증거가 정승화 참모총장 체포되고 참모총장 직무대리를 하는 참모차장 윤성민이 12.12군사반란 이후 영전되었다. 이것은 진압군 최고 책임자가 반란군을 도와준 거 아니면 영전이 될 수 없는 상황인데, 그 시절은 그랬다.

  김 반장은 자신이 <무등산은 말이 없다>를 쓴 이유 중 하나가 성공한 군사 반란을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을 넘어서 성공한 군사 반란은 역사가 좀 늦더라고 평가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글을 썼다고 에필로그에 보여주었다. 12.12군사반란 이후 대부분의 장군들이 승진 또는 수평이동이라도 영전의 특전이 주어졌으나 처벌받을 만큼 반란군 제압에 목숨을 걸었던 장군은 수경사령관 장태완과 특전사령과 정병주뿐이었다. 나머지는 하나회나 신군부 편에서 눈치껏 처신한 장군들이 수두룩했다.

  역사적으로 군사반란을 목숨 바쳐 저지한 사례가 있었다. 스페인에서 안토니오 중령이 중무장한 병력 140 여 명을 이끌고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국회의사당을 점령했다. 국왕은 나를 죽여라! 외치고 반란군 앞에 나서자 국방장관이 기관총을 들고 반란군에 응사를 했다. 무엄한 반란군은 지금 당장 철수하라! 호통을 쳤다. 반란군을 제압했다.

  칠레에서는 아예 데 정부에 대하여 피노체트가 군사 반란을 일으켰다.

자유선거를 통해서 수립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 아예 데 대통령은 보수파 피노체트가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이 대통령궁으로 공격해 오자 아옌데가 기관총을 들고 반란군을 저지하다 현장에서 전사했다. 결국 반란군은 반란에 실패하여 처형되었다. 1979년 12월 12일 이 땅에는 피노체트도 국방 장관도 아옌데 같은 인물이 없었다.

  지하실 철문이 열렸다. 대공분실에 오면서 아예 인격이고 뭐고 다 던져버린 김 반장이지만 고문은 견딜 수 있으나 배고픈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3일은 참았는데 4일이 되자 온 사방이 다 먹을 것으로 보이는 환각 착시가 일어났다. 잠을 청해도 망상이 생겨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1980년 전남도청 앞에서 그냥 조준 사격을 하여 쓰러진 시민들의 눈동자가 처음에는 두 개, 다음은 네 개, 또 다음은 8개, 16개, 32개, 64개로 기하급수로 늘어났다. 겁이 났다. 눈을 감았다. 서 중령이 보였다. 정말 저 인간은 다시는 마주치기 싫은 인간이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아침을 먹자마자 수사관이 무등산은 말이 없다 원고를 들고 들어왔다. 야, 김경흠 네가 무슨 내무부 장관이야? 보훈처장이야? 건방지게 5.18 광주사태에 보상의 글을 쓰고 지랄이야? 너 말해봐? 이거 허울 좋은 보상과 훼손된 과거청산의 정의는 오랜 시간 직접적 피해자들을 모욕해 왔으며 이들의 고통을 양산시켰다고 썼는데 이게 뭔 말이야?

 “그대로입니다.”

 “이 새끼가 정신 못 차려?

광주에서 공수부대의 과잉 진압 후에 시민들이 금남로에 모여드는 인원이 늘었다. 청바지에 단풍잎 색상의 잠바를 입고 긴 머리의 전옥주가 가두방송 마이크를 잡았다. 그녀는 조선대학교 무용학과를 중퇴하고 해남에서 무용학원을 운영했다.

고향인 광주에 한 번 다녀가려고 왔다가 공수부대원들이 시민과 학생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것을 보고 아니지 내가 진실을 알려야지 하는 마음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저는 해남에서 무용학원을 운영하는 전옥주입니다. 광주가 고향이라 한 번 다녀가고자 왔다가 끔찍한 광경을 보고 그냥 해남으로 가면 두고두고 후회될 것 같아서 마이크를 들었는데요, 제 동생이 공수부대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녀는 박관현 사망 소문을 듣고 박관현 대신 남동생을 대입하여 가두방송을 했다. 그녀의 가두방송으로 금남로 인파는 늘어만 갔다. 전남도청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자유발언 중에 민주시민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이 <민주의 나라>를 낭독했다.      

 남도의 하늘은 아름다웠다.

 천사가 나팔을 부는 것도

 나는 꽃마차 위의 일곱 색 나비들이

 꽃 이 피하를 뿌려주는 것도 아니었건만

 남도의 하늘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빨강, 파랑, 노란색으로 춤추던 물줄기는 멈추고

 향기 없던 조화가 시들던 날

 너와 나는 한 걸음씩 다가갔다.


 페퍼포그 멈추고

 최루탄이 사라지던 날

 무진 벌의 백성들이 모여들었다     

 지식인이면 어떠냐

 노동자면 어떠냐

 농민이면 어떠냐

 우리는 민주시민이다     

 가까이 가면 벌 받는다고 무서워하던

 도청 앞 분수대

 가만히 만져보고

 부둥켜안아 보고

 그대와 나 마주 보고 웃는 모양

 얼마나 좋으냐     

 어느 세상 이보다 아름다운 노래 있으리

 모두가 한입 되어 외쳐 부르는

 민주의 노래

 서기 일천구백팔십 년 오 월 십팔 일

 우리는 여기 도청 앞 광장을

 민주의 광장이라 명명했다     

 그리고 영원한 민주의 행진을 위해

 횃불을 들었다

 한 걸음 뛸 대마다 가슴 깊이

 다짐한다

 다시는

 백성을 핍박하는 눈물가스를 위한 세금을 납입지 말자고

 다시는

 백성을 팔아 삼십육 년 식민의 설움을 당하지 말자고

 다시는

 백성의 착함을 개인의 욕심으로 욕되게 말자고

 다시는

 외세로 인해 허리가 잘리거나

 대리전쟁을 치르지 말자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횃불이여

 역사의 그날까지 활활 타올라라

 백성의 나라를 위해

 백성의 나라를 위해

 영원히

 영원히

 빛나거라

 -작자미상 <민주의 나라>-

     

연단으로 전남대 학생회장 박관현이 올라갔다. ‘제가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관현입니다. 여러분들의 힘찬 박수에 더 이상 숨어 지낼 수 없어 마이크를 들었습니다. 오늘 전남도청의 이 함성이 전 국토와 민족에게 다 들릴 수 있게 다시 한번 큰 목소리로 외쳐봅시다. 우리가 민족 민주화 화 횃불 대행진을 하는 것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고 이 횃불과 같은 열기를 우리 가슴속에 간직하면서 우리 민족의 함성을 남북통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뜻이며, 꺼지지 않는 횃불 같은 우리의 민주 열기가 전두환, 신현확, 최규하에게 전달되게 외칩시다! 전두환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 최규하 물러가라!’

  김 반장이 홍제동 대공분실에서 사망하자 유품과 시신을 인수하라는 전보가 왔다. 아버지 옷과 신발 아버지 수첩 그리고 아버지 수기라고 할 수 있는 <무등산은 말이 없다> 초안이었다. 이 수기는 아버지가 고등학교 후배가 소설가라고 책으로 발간하면 독자들 반응을 좋을지 아니면 문장에 잘못된 호응은 없는지 검토해 달라고 보낸 것인데 작가 장문평이 실수로 국가정보원에 압수당했다.

  국가정보원은 그것을 지금은 방첩사령부 아버지 근무 시절은 보안사령부로 이첩했다. 아버지의 초고를 천천히 읽었다. 이름은 수기지만 아들인 나에게 유언을 쓰듯이 쓴 문장이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아버지는 1980년에 직업이 보안부대 수사관이라 봉급 똑바로 받기 위해 마지못해 하기는 했으나 아들에게 비겁한 아비가 아님을 이 글을 읽고 이해 바란다. 볼펜을 국 꾹 눌러가며 쓴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장교와 부사관의 신분차이가 조선시대로 비유하면 양반과 중인의 수준 차이지만 아버지는 실력으로 중인이 양반을 능가했던 허 준의 심정으로 글을 쓴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 유품을 정리하여 강림중학교 백우(百牛) 김광수 무덤 아래 묻었다. 이제야 밝히지만 강림중학교를 설립하는데 100 마리의 소를 유산으로 남겨 그 소를 팔아 학교 설립에 상당 부분 공사비를 부담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나자 전국에서 자신들이 상속자라고 주장을 했으나 횡성경찰서의 수사결과 모두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김 반장은 직책이 보안부대 수사관이라 그런 소식에 신경을 끄고 지냈는데 은신하러 강림에 들어와 치악산 작은 도서관에서 족보를 우연히 보고 백우(百牛) 김광수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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