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참 아이러니하다. 예전에 비해 참 공정한 세상이 됐음에도 아직도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일이 종종 있다. 일은 하는 사람만 하고 노는 사람은 주변에 민폐인 줄도 모르고 논다. 주변에 있는 사람이 피곤할 수밖에 없다.
기획안을 들고 PD와 함께 방송국을 들어가 방송국 관계자를 만나곤 했다. 방송국은 한가할 때가 많다. 특히 KBS방송국은 일은 안 하고 주변 사우나에서 노는 사람이 참 많았더랬다. 출근했다가 사우나에 가서 퇴근할 시간이면 온다는 말도 들었다. 돈은 받지만 딱히 할 일도 없어서 철밥통의 신세계를 나는 알게 됐었다. 기획안에 대해 얘기를 듣는 사람도 이 사람이 과연 전문가일까라는 의구심이 들 때도 있었다.
프로덕션에서 힘들게 촬영하고 고생하면서 만든 편집본에 대해 참 쉽게 말하곤 했다. 확실한 이유도 없이 마음에 안 들면 쓱 훑어보고 고치라는 것 같았다. 프로덕션에서는 그 수정 한 번에 몇 십만 원에서 몇 백만 원의 돈을 다시 써야 했다. 내레이션을 맡은 성우분을 다시 섭외해야 하고, 녹음실도 빌려야 하고, 음악도 다시 부탁해야 하고 참 번거로운 작업이었지만 담당자 마음에 안 들면 빼는 거였다. 그 담당자는 감수만 하니까 만드는 과정의 번거로움을 고려하지 않는다.
예전에 장애인에 대한 다큐프로그램을 쓴 적이 있었다. 한 달이 넘도록 자료조사를 하고 교수나 관계자들을 찾아다니며 발로 원고를 썼다. 그때 나는 방송경력이 3년밖에 안 돼서 10년 이상의 연륜을 못 갖췄다는 이유로 방송국에서 이 사람 빼라는 소리를 들었다. 내가 기획하고 쓴 원고라서 아무도 그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다행히 나는 구성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남았다.
우여곡절을 겪고 6개월이 넘도록 고생을 한 끝에 편집본을 들고 피디가 방송국을 찾았었다. 취업에 성공한 장애인들에 대한 인터뷰가 있었다. 그분들을 섭외하려고 나는 애를 많이 썼었고 다국적 기업에서 열심히 일하는 중견관리자인 분이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 주셨다. 그런데 그분의 영상을 빼라는 것이다. 이유는 단지 그분의 일터가 다국적기업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기업이 아니라고. 그분한테 방영날짜까지 다 알려드렸고 그분의 기대에 찬 음성이 귓가에 맴돌았다.
난리가 났다. 방송이 나가고 그분의 부인한테 연락을 받았다. 방송이 나가기 전에 이주일이 넘도록 제대로 잠을 못 잤던 나는 비몽사몽간에 전화를 받아서 죄송하다고 KBS방송국에서 다국적기업이어서 안 된다고 해서 최종본에서 내용이 빠졌다고 정말 죄송하다고 몇 번이고 사죄를 했다. 미리 알려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거듭 사죄를 했지만 방송시간에 쫓겨서 나는 전화할 한치의 여유도 없었다. 저녁에는 속상한 전화로 난리가 나고 아침에는 프로덕션에서 난리가 났다. 나는 피디한테 된통 깨졌다. 피디는 왜 KBS에서 다국적기업이라서 빼라고 했다는 말을 했냐고 폭풍처럼 화를 냈다. 돌려 말하지 못했다고 지청구를 들었다. 아니 KBS에서 빼라고 해서 뺐다고 얘기한 게 잘못인가 왜 담당자의 잘못을 프로덕션 피디가 뒤집어써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세상이었다. 피디는 방송국에 달려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다시 KBS방송국과 일을 못할까 봐 전전긍긍했다. KBS담당자는 저가 그렇게 말했으면 적어도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게 아닌가? 온 동네에 소문을 내고 일가친척을 모시고 방송에 아들이, 남편이, 동료가 나오는 장면을 기다렸던 그분들은 무척 실망해서 KBS방송국으로 항의 전화를 하셨고 그 담당자는 왜 그렇게 얘기했냐고 피디한테 난리를 쳤다고 했다. 저가 한 말을 고스란히 옮긴 게 잘못인가? 책임도 못질 말을 왜 하는지 모른다. 월급이 아까운 사람이다.
일을 하면서 국가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환멸이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군대에서도 그랬다. 군부대 촬영을 앞두고 사단장의 허락을 받고 촬영을 갔더니 부대 입구에서 갑자기 안 된단다. 촬영팀은 당황했고 섭외를 맡았던 나를 책망했었다. 나는 바로 사단장한테 전화를 해서 촬영불가의 이유를 물었고 사단장의 흔쾌한 촬영허가를 다시 받았다. 딴지를 걸었던 실무자는 자기를 제치고 바로 사단장한테 허가를 맡은 게 못마땅했던 거였다.
일을 하면서 실무자와 얘기가 잘 돼도 최고 책임자한테 거절당할 때가 많아서 최고 책임자를 통하는 게 나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불만에 찬 사람들이 마음에 안 들면 높은 사람 나오라고 경찰서에서 은행에서 소리를 지르는 거 아닐까? 실무자가 복지부동의 끝판왕인 경우라면 일이 당최 진행되지도 않았고 내 일만 늘었다. 복지부동에 딴지를 거는 실무자들도 많았다. 주로 공무원들한테서 그런 모습을 많이 보곤 했다. 그런 기억들로 아직까지 공무원에 대한 인식은 별로 좋지 않다. 발로 대충 해도 월급을 받아서 그런가 일을 똑 부러지게 하는 국가 기관의 사람을 별로 만난 적이 없다. 아니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공정한 세상을 희망한다. 속 다르고 겉 다른 세상이 아니라 적어도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대충 넘기는 세상이 아니라 공정과 정의가 살아있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