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 때쯤이다. 살림을 돕기 위해 독서교육을 시작하면서 책이 필요했다. 마침 지인과 잘 아는 분이 거의 20년이 넘도록 해오던 독서 수업을 그만둔다고 책을 넘긴다고 했다. 90년대에 독서교육이란 것이 처음 시작될 때다. 당시에 그분을 도와 여의도 거리에서 홍보 아르바이트를 했다. 더운 여름에 파라솔 아래 앉아서 무엇을 했는지는 기억에 없고 일이 끝나고 그분 집에서 먹었던 시원한 냉면만 떠오른다. 수박의 하얀 부분을 무처럼 양념하여 냉면에 넣어서 신기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엉뚱한 기억만 남은 시작과 독서교육을 정리하는 끝에서 그분을 만났다.
애들한테 잘해 주세요. 애들한테 꼭 잘해주셔야 해요. 여의도의 좁은 사무실 안 천장까지 꽉꽉 찬 책 속에서 그분은 몇 번이고 강조를 했다. 아이들은 자기한테 못 해준 것을 절대 잊지 않는다고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그 사랑을 꼭 받으려고 하니까 애들 어려서 정말 잘해줘야 한다고 했다. 그때는 나에게 들을 귀가 없었다. 그 말의 뜻도 그 말의 무거움도, 귀함도 알아듣지 못했다. 책을 고르고 나르는 동안 그분은 나에게 몇 번이고 아이들의 소중함에 대해 말을 건넸다. 나는 전처소생 딸의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사춘기를 감당해야 했고 내 어린 아들은 밥 차려주는 걸로 충분하다며 하루하루 살기가 바쁜 날이라 무지했다. 아들의 마음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다. 딸과 하루하루 신경전을 치르느라 진이 빠지는 중이라 그분의 말이 전혀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남편은 일을 관뒀고 생활비에 대한 압박으로 나는 그분이 2000년대 초반부터 천만 원이 넘게 벌었다는 지인의 말만 귀에 쏙 들어왔다. 그분이 얼마나 열심히 수업을 했는지 좁은 방에 열정이 가득했다. 책 겉면에 전화로 하는 수업 시간표가 빼곡히 메모돼 있었다. 나도 열심히 언니처럼 벌어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애들한테 잘해주세요는 잘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애들 키우기 정말 힘들다는 투정만 그분한테 실컷 했다.
차가 땅바닥에 닿을 듯이 책을 잔뜩 싣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분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국어교사를 그만두고 아이들을 키우다 독서교육을 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다고 했다. 지인은 나보고 너무 돈 많이 벌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밤늦게까지 남의 아이들을 돌보느라 자신의 아들 둘은 돌볼 새가 없었단다. 아들 둘은 대학 입학에 모두 실패했고 그분은 아이들이 먹고살 만한 직업을 찾아주려고 독서교육을 접고 사무실을 정리해서 돈을 마련하는 중이었다. 예전에는 고물상이라 했던 재활용 자원센터를 하려고 했다. 아들 둘을 데리고 인생의 새로운 시작을 했다. 그분한테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애들한테 잘해주세요라고 몇 번씩 했던 말에 아들들에 대한 미안함과 속상함이 많이 배어있었다. 자기처럼 애들을 방치하지 말라고 그렇게 강조했다. 그때 귀담아 들어야 했다.
부모한테 못 받은 사랑은 사춘기에 그 갈등이 극에 달하나 보다. 전처소생의 딸은 엄마한테 학대받은 거 같다고 신경정신과 선생님이 그랬다. 나중에 사춘기에 무척 힘들게 할 거라고 했다. 뚱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 4학년때부터 시작해서 끝이 날 줄 몰랐다. 저가 말 한마디 안 하고는 갑자기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으면서 졸졸 따라다니더니 자기한테 말을 안 해준다고 성질을 부렸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맞고 다니더니 어느새 애들을 패고 다녀서 같은 반 남자아이 엄마가 집으로 찾아왔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갈등이 극에 달했다. 어느 날은 학교도 안 가고 설거지하는 내 옆에 딱 버티고 서서 시비를 걸었다. 갑자기 라디오를 꺼버려서 내가 다시 켰더니 또 끄고 실랑이를 벌였다. 하도 기가 차서 학교나 가라고 뭐 하는 거냐고 했더니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쳤다. 말싸움이 밀고 당기는 육박전으로 이어졌고 아들은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아들을 달래주느라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누나의 행동에 놀란 아들을 달래 학교에 보내놓고 나와 보니 딸은 부엌 라디오 안테나 줄을 잘라놓고 갔다. 라디오는 채널이 잡히지 않았다. 딸은 대학을 가면서 집을 떠나 조부모와 함께 산다. 어느 대학을 갔더라는 얘기를 동네 사람들을 통해 들었다.
아들에게 무릎을 꿇었다. 엄마가 그동안 너한테 잘못했다고 제발 마음을 잡기를 바랐다. 아들은 내 모습에 당황해 방에서 나가버렸다. 말 한마디 안 하고 사는 부모를 아들은 견디기 힘들어했다. 부부 사이가 깨진 지 오래됐는데 가운데 끼어있던 아들은 중학교부터 차츰 입을 다물더니 나한테 적개심이 늘어갔다. 나 또한 아들이 제 아빠의 미운 모습을 닮는 게 싫어서 더 혹독하게 야단을 쳤다. 따로 사는 누나한테 연락이 오는 것을 숨기기 시작했다. 중학교 졸업식날에는 한 마디도 안 해서 학교에 찾아간 나는 서러웠다. 아들이 갑자기 친구들과 사진 찍을 포즈를 취하면 애들은 누가 찍는 거냐고 물었고 아들은 말도 없이 턱으로 나를 가리켰다. 기가 막혔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말을 삼켰다. 아직도 도대체 왜 아들이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제 누나가 또 이간질을 했나 너네 엄마 때문에 갈 수가 없다고 애를 건드렸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추석을 지날 때마다 학교에서 부모를 불렀다. 억지로 가야 하는 친척집에서 내 욕을 끊이지 않고 들으니 추석이 끔찍했을 거다. 결국 다른 부모처럼 이혼하지 왜 이렇게 사냐고 했다. 아들을 뺏길까 봐 못한 이혼이었다. 전처소생의 딸도 제 엄마를 못 만나게 만들었는데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참는 수밖에 없었다. 마음을 못 잡는 아들을 학교에서 자퇴시켰다. 공부가 문제가 아니었다.
제 아빠가 자퇴 사실을 알게 될까 봐 아들은 불안해했다. 밤마다 치킨집으로 알바를 하러 나갔다. 치킨집 사장은 공부가 다가 아니라고 이걸로 얼마든지 먹고살 수 있다고 했다. 이제 고2인 아들이 마음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만났는데 괜한 헛걸음에 돌아오면서 얼마나 자책을 했는지 모른다. 치킨집 사장은 공부가 다는 아니라고 치킨 튀겨서 평생 먹고살 수 있다고 했다. 물론 공부가 다는 아니지만 치킨 튀기는 일로 평생 살 직업을 정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얼마든지 세상을 겪어보고 할 일을 찾아봐도 된다. 내가 누구인지, 앞으로 어떻게 인생을 살지, 무엇을 할지 그런 것을 생각할 나이인 거다. 아들 살려보겠다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느 날 아들은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했다. 저만 힘들게 산다고 생각했는데 치킨집에서 만난 실장의 살아온 이야기에 아들은 조금씩 마음이 풀렸다. 아버지의 사업부도로 집안이 망하면서 어머니가 자살을 하고 고등학교2학년 때부터 알바를 한 번도 쉬지 않고 했다고 했다. 고1 때 전교 7등까지 했다는 실장은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에 다니는 동생과 함께 살면서 억척스럽게 생활비를 벌고 있었다.
애들한테 잘해주세요라는 말이 그제야 떠올랐다. 그분이 그렇게 강조했던 그 말이 몇 달 동안 휘몰아친 아들의 일을 겪으면서 그때서야 떠올랐다. 진즉에 듣고 잘해줄 걸 왜 그 말을 못 알아들었는지 나의 미련함에 가슴을 쳤다. 아들은 부모의 사랑이 부족했던 건데 애를 보듬어주기보다 다그치기만 했다. 불안함에 지친 아들을 위로는 못 해주고 오히려 나쁜 거 닮을까 봐, 미운 모습 배울까 봐 닦달하기 바빴다. 애를 너그럽게 봐주고 격려해 주고 사랑해주지 못했다. 아들이 아들답게 자랄 수 있도록 기다려주기는커녕 애를 재촉만 했다. 집보다는 기숙사가 있는 학교에 보내는 게 나을 듯싶어서 공부하라고 애를 밀어붙였다. 불꽃 튀기는 전쟁이 끝나지 않은 휴전 상태의 집에서 매일이 불안한데 무슨 공부가 되겠는가 애 마음도 모르고 내 딴에는 그게 좋다는 생각만 했던 것이다. 집에서는 남보다 못한 부모 눈치 보느라 제가 하고 싶은 것도 마음껏 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 아들한테 매일 소리 지르고 싸우는 것보다 말을 안 하는 게 낫지 않냐고 했는데 그러는 것보다는 차라리 헤어진 게 더 나았을 거다. 오래 쌓고 묵힌 감정을 풀기는 쉽지 않다.
아들의 웃는 모습을 이제 본다. 나를 보고 인상을 쓰던 아들이 군대를 가면서 홀로 남을 엄마가 안쓰러웠는지 엄마의 옷깃을 챙겨주었다. 아들의 떨리는 손끝에 못다 한 말을 느껴야 했다. 아들의 싸늘한 눈초리에 익숙했는데 아들의 눈꼬리가 점점 풀려간다. 잘해줘야지. 그분이 그랬다. 못 받은 사랑을 언제라도 받으려고 한다고 꼭 잘해주라고 했다. 아들한테 못 해준 사랑을 이제 돌려준다. 나 또한 애 아빠 눈치 보느라 애한테 충분히 못 해준 사랑이다. 주변에서는 농담도 잘하고 살갑게 구는 아이가 왜 엄마한테는 한 마디도 안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이의 웃는 모습도 볼 수가 없었다. 엄마니까요, 엄마니까 애가 저 속상한 것을 투정하는 거 아니냐는 말에 위로받고는 했다. 아이는 나한테 투정밖에 할 수 없었다. 불만이 더 많았으니까 말이다. 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저 하고 싶은 대로 해주니까 아이는 이제 편안하게 다가온다. 예전에는 하지 않던 이런 얘기, 저런 얘기도 해준다. 괜히 엄마가 간섭할까 봐 자기 얘기를 안 했는데 이제는 내가 묻기도 전에 알아서 얘기할 때도 있다. 고마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