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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나영 Sep 07. 2024

로맨스 코미디

  달달하다. 뽕 맞은 환자처럼 나른하게 늘어져서 잠도 안 자고 드라마를 본다. 얼마 만에 느끼는 감정인지 모르겠다. 로맨스 코미디 드라마 한 편이 무너져 내린 내 감정을 폭발시켰다. 일본 아줌마들이 아들 뻘인 연예인을 따라다니는 것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되게 외로운가 보다는 생각만 했다. 그들의 달뜬 얼굴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알 거 같다. 지금 내가 아닌 것처럼 만든다. 흰머리가 잔뜩 나고 근육은 다 풀어져 너덜너덜한 살에 배가 불룩한 내 모습은 잊게 되고 어리고 예쁘기만 한 그들의 모습에 마음을 풀어놓는다.

  한 때 레이프 가렛에 미쳐 날뛰었다. 그 가수 노래를 들은 것도 아닌데 홀딱 빠져서 온 동네 문방구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쓸어 모았다. 사춘기의 열병은 레이프 가렛으로부터 왔다. 엄마의 놀림을 무시하고, 엄마가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녀 짜증을 내면서도 내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그냥 좋았다. 내 냄비근성은 거기부터인가? 일 년이 지난 뒤 얼음같이 식었다. 왜 좋아했는지 갑자기 그냥 싫어졌다. 하루라도 사진을 안 보면 미칠 것 같던 마음이 흐지부지 사라져 갔다. 책상에 가득했던 사진들을 모두 버렸다. 지금 나는 로맨스 코미디의 남자 주인공에 빠져서 달달한 기분을 며칠째 흐뭇이 끌어안고 있다. 사춘기의 열병과 결이 다르지만 비슷하기도 하다. 예전에 비해 떨림과 흥분에서 훨씬 빨리 빠져나오지만 삶의 활력이 되는 건 확실하다. 살을 빼라고 의사가 곧 죽는다고 협박을 하고 운동하라고 얘기를 해도 변하지 않던 마음이 달라졌다. 살을 빼겠다는 결심을 했다.

  코로나 시기에 일은 반토막이 나고 점점 한가해졌다. 갑자기 늘어난 시간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여태 다니지 못했는데 잘 됐다고 지인과 여기저기 쏘다녔다. 속초로, 남원으로 갈 수만 있다면 백수가 과로사할 만큼 돌아다녔다. 텅 빈 시간을 쪼개 못 만났던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길지 않았다. 노는 것도 지쳐서 힘에 부쳤다. 지친 끝에 남은 건 무기력이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점점 나가기도 싫고 하루 종일 컴퓨터로 영화를 봤다. 책은 이미 벌써 손에서 멀어졌다. 무얼 생각하기에 마음이 너무 복잡했다. 영화도 지루하게 느껴졌다. 너무 길었고 아무 생각 없이 보기에는 짧은 영상이나 쇼츠가 좋았다. 우울함이 나를 데리고 누웠다. 마지못해 밥벌이를 위한 일 정도만 다니고 대부분 누워서 유튜브 영상을 봤다. 여행 영상에 몰두하고 시골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무료하고 지친 내 삶을 벗어나고 싶어 집 고치는 영상만 찾아봤다. 그것도 시들해져 갔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드라마를 보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너무 길었고 오랫동안 그 서사를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 작위적인 행동에 쉽게 지쳤다. 지극히 현실적인 나는 인형극에 몰입을 못 했는데 말도 안 되는 내용과 자극적인 대사에 눈길이 가지 않았다. 판타지 소설을 질색하는 나에게 드라마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판타지 세상이었다. 가끔 지인들이 드라마를 추천해 주었다. 한때 '나의 해방일지'가 유행을 해 조금 봤지만 방안 가득한 술병과 매일 술로 사는 남자의 사랑 얘기에 쉽게 흥미를 잃었다. 남자주인공이 매력적이었지만 술병과 밤무대 이야기에 질렸다. 작가가 매일 술만 마시나 도대체 이 작가는 왜 이렇게 술을 놓지 못하는지 술 마시는 장면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지인들은 '나의 해방일지'에 이어 '나의 아저씨'를 추천해 줬다. 너무 암담했고 처참했다. 하루하루 사는데 지친 나는 그 칙칙한 어둠이 싫었다. 아버지가 불우한 이웃의 다큐멘터리를 질색하며 외면했던 걸 이제 알았다. 팍팍한 내 삶에 그들의 삶이 쉽게 감정이입이 돼서 싫었다. 돕고 싶은, 그들이 불쌍하다는 마음은 내가 그들보다 낫다고 여겨질 때 생긴다. 비참하고 헤어 나올 수 없는 악다구리 같은 삶을 보며 내 삶이 낫다고 위로하는 나 자신에 환멸이 느껴질 때도 있다. 복잡한 감정이 회오리치는 거 자체가 싫은 거다.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겹쳐지는 내 삶에 대한 성찰이 불쾌해진다. 생각이 지나간 자리엔 오롯이 감정만 남았고 잊으려고 애썼던 감정이 바글바글 끓어오른다.  

  알콩달콩하고 티격태격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남녀의 대사에 마음이 녹아내렸다. 꾸미지 않고 솔직한 남녀의 대사에 자꾸 눈길이 갔다. 유튜브로 짧게 요약된 영상을 보다 처음으로 드라마를 한 편 다 봤다. 드라마도 요약한 내용만 슬쩍슬쩍 봤지 거의 이십 년이 넘도록 한 편을 제대로 본 적이 없는데 시리즈를 처음부터 다 봤다. 보고 또 보고 낄낄거리면서 얼마 만에 이렇게 웃어보는지 모르겠다. 내 안에 신명이 울려 퍼졌다. 무언가 해보고 싶다는 의욕이 생겼다.

  늙어가는 몸과 마음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어느 날 문득 물컹물컹해진 다리 근육을 알아채서 울적해지고 어느 날은 갑자기 흐려진 시력에 마음이 내려앉았다. 만삭 이후 한 번도 들어간 적 없는 불룩한 배, 펑퍼짐해진 얼굴, 푹 퍼져가는 몸매를 잊고 살았다. 길을 가다 유리창에 비치는 나의 모습에 익숙하지 못해서 발길을 돌려 나를 본 적도 있지만 점점 무심해져 갔다. 반짝반짝하는 젊음 그대로 예쁜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를 가꾸고 꾸미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내가 연애를 하면 온 식구가 다 알았다. 다림질을 시작한다. 옷도 반듯하게 다려 입고 아무거나 입지 않고 골라 입었다. 이제 내 마음을 다려야겠다. 여태 방치한 나 자신을 꾸미고 싶다. 함부로 나온 배와 출렁거리는 살들을 정리해야겠다. 내 머릿속도 다시 리셋하고 싶다. 드디어 책을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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