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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미연 Feb 02. 2024

23년 동안 피를 흘렸어요

호르몬의 농간

급성 통증으로 기존에 가던 산부인과 대신 새로운 클리닉에 진찰을 받으러 갔다. 기존 산부인과는 당장 몇 개월안에 가능한 예약 일정이 없었기 때문. 월경이 끝나고도 복부 통증이 비정상적으로 계속된데다 출혈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당 클리닉의 첫 환자로서 부지런히 답해야 할 문항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최초 월경으로부터 몇 년이 되었느냐는 질문이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시작했으니 대략 23년 정도 한 셈이다. 사촌동생의 나이가 스물셋인데 그 숫자와 세월에 기함하고야 말았다.


성인 여성 한 명의 삶을 통틀은 시간동안 나는 부지런히 매달 피를 흘려왔구나. 그 피를 한데 모으면 대체 얼마만큼의 양이 될까. 임플라논 시술 덕분에 1년 가량 월경을 멈췄던 적이 있지만 그 외 20대 동안은 일주일을 꼬박 채우고도 열흘간에 걸쳐 피를 흘린 적도 있다. 5분 거리인 집까지 걸어 갈 수가 없어 전철역 벤치에 누워 친구가 약을 들고 온 적도 있을 정도로 월경은 매달 꾸준히 내 삶을 지배했다.


진료를 통해 월경 직후 억센 섹스로 야기된 고통인 줄로 알았던 통증이 배란통임을 알게 되고 이상한 안심을 하게 되었다. 탓할 대상이 어떤 실체가 아닌 ‘호르몬’의 장난이란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 오는, 아주 묘한 주술 같은 것이다. ‘아, 이 모든게 다 호르몬 때문이었어? ㅇㅇ 오케이’ 이런 식이다.


간밤의 룸메와 룸메 여자친구의 웃음소리가 다른 때보다도 유난히 날서게 했던 신경을 두고 나는 왜 이리 속이 좁은 인간인가라며 자책했던 순간들이 고해성사 받는 순간이다. “그 마음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호르몬의 농간이었단다!”


이 주 들어 매일 1시간 단위로 먹을 것을 우겨 넣었던, 설명되지 않는 식탐에도 ‘호르몬’이라는 진단명이 내려졌기에 이제는 모든것이 납득되고야 만다. 아니 납득되지 않지만 그냥 그것 때문이라면 모든 것을 퉁칠 수 있다. 호르몬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23년 정도 월경했으면 이게 배란통일거라는 짐작 정도는 했어야 하는게 아닌가! 어처구니가 없기도 했다. 물론 주기 계산을 하고 있기에 지금 배란기인것은 알고 있었지만 배란통이 이렇게 심하고 오래 간 것은 처음이기에 그럴 만도 했다. 


신기하게도 매년 월경전증후군과 월경 때의 증상이 조금씩 바뀌는데 재작년부터는 젖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듯한 통증에 시달렸다면 요즘은 변비와 불면증이 추세다. 심지어 지난주에는 자다가 가위눌림까지 당했다.


누구보다 빠르게 월경 조기 교육을 구성애 선생님과 그 외 성교육 책으로 깨친 나였지만 여전히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때때로 무관해진다. 이것은 순전 내 몸에 대한 탐색과 여성의 월경과 성에 대해 탐색하도록 학교에서 교육을 해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때마다 다른 증상들을 세세히 다 예측할 수는 없지만 이를테면 배란기 때 분비물에서 물씬 비린내가 나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 (이것 때문에 작년에만 산부인과를 3개월 단위로 드나들었는데 그 때마다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매일 꾸준히 유산균 (vegan lactobacillus)만 복용해도 냉분비물이 줄어든다는 지식 정도만 좀 더 빨리 알았더라면!


그래서 더욱 적극 월경과 내 몸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법을 체득한 것은 여성환경연대 단체에서 근무 할 때다. 활동가 동료들과 단체에 초대되어 강연해주신 지역 산부인과 선생님에게서 ‘월경권, 월경 할 권리’에 대해 들었던 그 날은 10대의 어느 날, 정희진 선생님으로부터 ‘페미니즘’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만큼이나 생소하고 놀라우며 짜릿했다. 자연을 거스르면 죄스러운 것이고 불경한 것인 줄로 배웠는데 내 몸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의 ‘권리’가 있다니.


2018년부터 월경컵을 쓰면서는 이전과 다르게 월경기간이 부쩍 짧아지고 통증도 줄었으며 무엇보다 더는 휴지통에 누가 볼 새라 돌돌 말아 버리던 일회용월경대 ‘쓰레기더미’들이 사라졌다. 컵에서 길어 올린 피 한 컵을 세면대나 변기에 쏟아 낼 때의 광경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지만, 이제는 탄력 있는 고무컵을 한 손으로 쥐락펴락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게다가 이전까지 월경 때마다 나던 퀘퀘한 냄새가 더는 혈 자체가 아닌 일회용월경대에서 나는 것이었다는 알게 된 이후 설명 할 수 없었던, 혐오로부터 해방되었다. 월경 시작 이래 십 몇 년을 써왔던 팬티라이너를 안 쓰게 된 것도 덤이다.


임플라논을 빼게 된건 2021년 코로나에 걸리면서 부작용으로 하혈과 함께 월경이 다시 시작되었기 때문인데 자금 여건만 된다면 저혈압과 월경전증후군 등으로 인해 오는 불편함들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미레나 삽입을 시도 할 것이다. 한 달 중 월경전증후군으로 인한 정신과 신체의 롤러코스터 1주일, 월경 기간 동안 온 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고통, 월경 직후 이제는 배란통까지. 그렇다면 그나마 온전하고 평이한 상태의 몸으로 살 수 있는 기간은 단 1주일 남짓 뿐인 것이다. 이렇게 억울할 데가.


지난 며칠 배를 움켜쥐며 이 고통이 야기된 원인과 탓할 대상을 찾는 데에 혈안이 되어있었던 나는 의사의 진단에 마음이 녹았다. 그래요. 당신은 이게 뭔지 아시겠지요? 내가 나로서 산다는게 얼마나 힘든지, 게다가 포궁 달고 사는 여성으로서 산다는건 얼마나 더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닌지를 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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