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에게 쥐어주는 내 삶의 권력
오전 8시, 침대에서 오래 뭉기지 않고 곧장 화장실로 직행하며 아침을 시작한 하루다. 눈 내린 창 밖을 보며 커피도 마시고 독서하며 부지런을 떠는, 오늘의 나다. 대체로 급한 오줌보를 붙들고도 침대에서의 로딩 시간이 짧지 않기에 새삼스럽다.
‘가녀장’. 상,하 권력 관계도 없지만 나는 내 삶의 가녀장이다. 1인 1체제의 삶이기에 굳이 가녀장이라 할 것 없이 가장이라고만 해도 무방하지만 어쩐지 단어 자체가 혁명적이기에 그렇게 호명해본다. 한국을 나오고서 깨닫게 된 사실은 내가 스스로의 ‘양육자’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영국에서는 5인이 복작복작 부대끼며 살았던 공동 주택에 풀타임 레스토랑 일을 하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 되는 대로 사는 감이 없지 않았던 거 같다. 그러나 독일에서의 시간은 속도감이 매우 다르다. 얼마 전 런던을 오랜만에 다녀오고서 느낀 것이지만 나는 베를린의 이 차분함과 제법 잘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차분함을 제대로 다룰 줄 모르면 곤란하다. 독일의 겨울은 매우 길고 해가 없기 때문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된다. 지난 첫번째 이 곳에서의 겨울이 너무 혹독했기에 이번에는 스스로가 가라 앉을 틈이 없게끔 여러가지 유흥거리를 미리 강구해야만 했다. 마치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아기에게 종류별로 딸랑이를 들이민다던가 잘 보이고 싶은, 고양이 앞에서 손에 집히는 대로 무엇이건 흔들며 재롱을 부린다던가하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늘 정신을 뺄 수는 없다. 스윽 가라 앉으면서 올라오는 불순물들도 알아차리는 때가 필요한 법이니까.
스스로를 위한 유흥거리 마련 이외에도 슬아 작가의 말처럼 ‘태평함’을 누리기 위해선 그 전에 부지런히 물 밑 작업을 해두지 않으면 안된다. 카페에서 남들은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 먼지들을 걷어낸다거나 당장엔 티 나지 않아도 꾸준히 돌봐주어야 하는 영역의 청소 노동들을 1년 조금 안되게 반복했다. 이 전 집에서는 룸메이트와의 불화로 좀처럼 내 공간이라는 생각이 안 들어 손 놓았던 공간 돌봄이 지금의 집에서는 조금 되찾은, 아니 발견한 느낌이다. 내 삶의 가장으로서 나를 건실하고 알뜰살뜰 챙기기 위해 해두어야 할 일들이 있고, 그것은 삶의 기동력이 된다.
얼마 전 블로그에 일기를 쓰며 내게 ‘앞으로가 기대된다, 미연아’.라며 내 이름을 호명하니 그렇게 다정 할 수가 없었다. 정규로 일하던 돈 줄이 끊기게 되면서 또 불안과 호기심과 많은 혼란이 또 한 번 흔들텐데 이럴 때일 수록 내게 다정함을 성실하게 행해줘야만 한다. 그래서 어젠 없는 살림에 PMS라고 초콜렛 푸딩에 초콜렛 쿠키와 공정무역 솔티드 캬라멧 초콜렛을 사다 먹였다. 그간 외롭고 힘들 때마다 내가 나부터 놓아버리곤 했었는데 그 때마다 얼마나 당혹스럽고 무서웠을까. 오히려 놓아버린다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왔던 거 같다.
사랑이란 무엇일까란 질문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곤 한다. 대체로 그것은 내 안에서가 아닌 외부로부터 찾았다. 가장은 권력의 시스템에서 나오는 호령이 아니라 돌봄의 주체로서 다시 명명되어야 할 것이다. 아직 <가녀장의 시대>를 3분의 1 정도 밖에 읽지 못했지만 이것이 오늘 재발견하고 정의하는 가장의 이상향이고 사랑, 책임, 다정함, 충실함, self-oriented가 아닐까한다. 사랑의 시대, 사랑의 계절을 맞이하길 바란다, 미연아.
* 며칠 전 영화 <세자매>를 보고 나서 이 책을 읽으니 '가부장'의 시대에서 살아 온 역사를 다시 뜯어보게 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