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 이외수 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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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시간: 동절기(10월~3월) 10:00~17:00 하절기(4월~9월) 10:00~18:00
관람료: 무료
휴관일: 매주 월요일, 화요일
문의전화: 033) 441-1253
모터사이클 전국 문학관 투어 서른아홉 번째 이외수 문학관이다.
이외수문학관은 강원도 화천에 있다. 정확히는 화천에 있는 '이외수 감성마을' 안에 '이외수 문학관'이 있다.
그는 화천이 아닌 경남 함양에서 태어났고, 강원도 춘천에 정착해서 살았다. 젊은 시절에 이미 춘천에 터를 잡았고, 거기서 부인도 만났다. 이외수 스스로도 춘천은 아름다운 도시라고 말하며 '문학의 문외한도 춘천서 3년만 살면 시인이 된다.'라고 말할 정도로 춘천을 좋아했다고 한다. 춘천에서 등단해 작가가 되었다. 그는 40년을 춘천에 살았다. 당시 '호수', '막국수', '이외수'를 춘천의 3 수로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호수와 안개를 사랑했던 이외수에게 춘천은 상당히 의미 있는 공간이었고 무엇보다 그에게는 삶의 터전이었다. 그런데 문학관은 화천에 있다. 이외수는 화천으로 터전을 옮겼다.
당시 이외수가 살던 춘천시 교동은 2000년 초반 대학을 중심으로 개발 시기였다고 한다. 주택 재건축, 상가개발 등으로 소음이 상당했다고 한다. 낮에는 공사소리, 밤에는 취객들의 고성과 노랫소리로 2년 가까이를 제대로 글을 쓰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화천에서 '이외수'에게 손을 내밀었고, 화천군의 파격적인 제안으로 화천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지자체에서 작가를 데려 와 살게 한 것도 이례적이고, 작가 1인에게 투입한 예산도 어마어마했다. 또 생존 작가의 문학관을 짓는 것도 최초의 일이었다.
화천은 이외수를 유치(?)해 군사도시의 이미지를 딛고 '문화도시'로 변모하여 지역사회 발전을 기대했다. 그래서 이외수가 '아무 조건 없이 화천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단순한 집필실과 거주공간뿐 아니라 이외수를 테마로 하는 '문화공간'인 감성마을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게 생존 작가의 이름이 붙은 최초의 문학관이 탄생한 것이다. 주민보다 군인이 더 많다는 화천에 '감성마을'이 들어서자, '산천어 축제'는 더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이외수가 직접 홍보에 나서기도 하며 인기를 더해갔고 산천어 축제는 대표적인 '한국의 겨울 축제'가 되었다. 화천은 문인 유치는 성공적이었다.
문학관 부지는 상당히 크다. 집필실과 거주 공간뿐 아니라 문학관과 정원, 주변 산책길까지 잘 조성되었다.
이외수가 살았던 때의 '감성마을'은 어떤 분위기였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아무도 없이 조용했다. '기인'으로도 불렸던 유쾌한 이외수의 공간 같지 않게 고요했다. 깨끗한 자연, 맑은 공기가 좋았고 조용하게 바람소리와 물소리만 한쪽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문학관은 경사진 땅 위에 지어져 기울어진 바닥과 쭉 뻗은 지붕이 뭔가 독특한 느낌이었다. 건축가 조병수가 설계했다고 하는데 학이 날아오르는 형상으로, 이외수의 소설 '벽오금학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입구에는 관람객들이 남긴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그리고 이외수 등신대가 반겨준다. ㅎㅎㅎ 이외수라서 가능한 포즈들이다.
내부로 들어가면 이외수의 삶과 문학을 만날 수 있다. 복도를 따라 그의 작품 속 문장들과 어린 시절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외가에서 태어나 바깥 외(外)를 써 이름이 이외수가 되었다는 이야기,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여러 도시를 전전했던 것, 아버지가 전역을 하고 교사가 되어 자신의 담임을 맡기도 했었던 이야기들이 소개되어 있었다.
잘 알려져 있듯, 그는 '기인'으로도 불렸고 자유분방하게 살았던 인물이다. 그래서 항상 말이 많았고, 논란도 많았지만 대중들은 그의 유쾌함을 좋아했다. 그는 문학뿐 아니라 미술에서도 능력을 발휘했는데, 그의 미술 작품에서도 형식과 틀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성향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글보다는 좀 더 차분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출간한 도서들도 전시되어 있다. 전시를 보면서 문득, 나는 이외수를 좋아했던가? 의문이 들었다.
고등학교 때였는지, 수능이 끝나고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즈음, 이외수의 작품인 '들개'를 처음 읽었고 그 날카로운 문장과 거침없이 펼쳐지는 내용에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소설의 내용이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작가에게서 '똘끼' 같은 것을 느꼈다고 해야 되나? 어둠의 '마력'을 느꼈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었다. 매력적이기도 했고 충격적이기도 했다. 그러다 제대하고 난 후였으니 1997년이나 1998년쯤이었을 것 같다. 당시 신작으로 나온 '황금비늘'을 읽었는데, 그때부터 이외수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이후 내 거의 모든 계정의 닉네임은 황금비늘이다. 가끔 황금비늘을 누군가가 쓰고 있어 사용하지 못하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세계의 끝'을 따서 쓴다.
그런데 정작 그의 출간된 책을 직접 눈으로 보니 나는 그의 소설을 딱 두 권만 읽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출간되는 그의 모든 장편 소설을 직접 사서 읽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왜 이외수는 그러지 않았을까? 나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이외수를 좋아했던가? 이외수문학관에 와서야 되묻게 되었다.
예전에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커피숍에 가면 잡지가 많았다. 영화잡지, 문학잡지, 문화잡지 등등. 학교 도서관이나 서점에 들러서도 잡지를 많이 봤는데 이외수가 나오는 편이 보이면 꼭 읽었던 것 같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무박삼일로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 하루에 6갑인가 8갑인가 먹고 잘 때 빼고는 하루 종일 담배를 입에 물고 살았다는 이야기, PC로 작품활동을 하려니 키보드가 익숙지 않아 주변인들의 추천에 따라 타자수를 늘리기 위해 PC 통신을 하게 된 이야기, 그래서 집에 컴퓨터가 몇 대나 된다는 이야기, 잘 씻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들은 것 같다.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늘 관심이 가는 작가였고, '황금비늘'은 항상 나를 따라다닌다. 깊은 관심을 가졌지만 정작 그의 작품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인데, 나도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그는 특이한 사람이었고 특출 난 사람이었다. 그의 미술 작품들이 좋았다. 기사로 나온 사진들만 봤던 터라 실물로 보니 더 느낌이 좋았다. 그의 작품에 담긴 여백이 주는 힘이 컸다. 여긴 문학관이면서 미술관이다.
건물 가운데 외부 공간이 있고, 내가 있는 전시실의 반대편이 창문 사이로 보인다. 문학관은 하나의 건물이 길게 빙 둘러 이어진 공간이다. 창 너머로 보이는 곳은 반대편 건물이나 다른 전시실이 아니라 지금 내가 서 있는 공간이다. 묘한 느낌이다. 그것이 작가의 시선인가 싶기도 했다. 창의 크기나 공간의 구성이 뭔가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 좋은 느낌이었다.
친필원고도 있었는데, 필체가 독특했다. 상당한 악필일 거라 생각했는데 악필이 아니라 너무 독특한 필체였다.
그가 생전에 독자들과 만났던 공간이다. 강연도 하고, 공연도 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쓸쓸하게 비어 있다. 코로나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북적거렸을 것이다.
공연시설을 보면서 나는 이외수를 인간적으로 좋아했던 작가였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이들과 소통하고 인터뷰에서도 PC 통신 은어들을 사용하고, 어느샌가 TV에도 나오고 영화에 카페오로 출연하는 것을 보며 그를 좋아하고 응원했지만, 내심 작가로서는 지지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그의 많은 신간 도서들에도 쉽게 손이 가지 않았던 이유는 그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 사실 이외수를 좋아는 하였으나 정작 작가로서의 이외수와 그의 작품에 대해 아는 게 없다. 내 스스로 아니라고는 하지만, 깊은 내면에서는 '기인'으로 워낙 논란거리가 많았던 작가라 가십거리를 즐긴 건 아닌가 싶어 부끄러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의 소설을 읽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읽고 싶어졌다.
이외수는 화천으로 옮기고 삶이 규칙적이게 되었다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게 된 것은 물론이고 세수를 한다고 했다. 맑고 깨끗한 아침 공기를 맞이하면 온몸이 깨어나는 것 같아서 좋다고, 씻지 않은 얼굴로 자연을 만나기 부끄럽다고... 화천과 이외수의 관계는 안타깝게 종지부를 찍었다.
그가 술자리에서 화천 군수에게 욕을 한 것이 화근이 되어 있는데, 사실상 화천군과의 불화는 그의 정치적 발언들 때문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다. 어쨌든, 이외수는 이후 군수에게 전화를 해 사과를 했고, 다시 만나 식사자리에서 거듭 사과를 했다고 한다. 여론이 악화되자 공식 사과문까지 내게 되었다. 하지만 작가 1인을 위해 130억을 쏟아부었으나 지역 경제활성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먹튀 논란'에 시달리게 되었고 결국 애초에 이외수의 집필실 사용이 불법이었다며, 화천군 의회에서 이외수의 감성마을 퇴거를 결정했다.
그리고 이외수는 고향인 함양으로 내려가기로 했다고 한다. 실제로 함양군과 조율이 되고 있었던 것 같다. 만일 이외수가 함양으로 옮겼다면 어땠을까? 함양도 역시 화천과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지역 문화 발전, 지역 축제 및 홍보에 도움이 될만한 인물로 이외수를 유치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외수는 함양으로 가지 못했다.
사실 화천이 이렇게 알려진 데에는 이외수의 역할이 상당했다. 그가 화천으로 옮기고 '산천어 축제'가 대박 나기 시작했고, 생존작가의 문학관을 찾기 위해 정말 많은 이들이 감성마을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쫓겨났다. 함양으로 결국 옮겨가지 못했고, 2020년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투병이 시작됐다. 함양 이전은 유야무야 되었고 2년 뒤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코로나 후유증으로 인한 폐렴이라고 한다.
기사를 찾아보니 작고 1주기인 2023년에 동산공원묘원에서 경춘공원묘원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말년을 보냈던 감성마을로 옮기는 방안도 검토되었으나 법적인 문제로 불가능해 춘천의 경춘공원묘원에 이장하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화천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어떤 사업도 하지 않고 있는 듯하다. 화천군의 반대로 감성마을에 그의 추모비나 추모 공간은 만들 수 없었다고 한다. 안타깝다.
너무 유명해서 잘 안다고 생각했던 작가 이외수를 나는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 가십거리 속의 이외수가 아닌 '작가 이외수'를 만나는 시간이었다.
한 줄 느낌
- 언론을 통해 보이는 가십거리 속의 이외수가 아닌 진짜 이외수를 만나고 왔다.
한 줄 평
- 구성, 배치, 기획 그리고 건축까지 모든 것이 작가를 잘 담고 있는 아름다운 문학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