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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지 않는 내 삶의 터전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040. 박경리 뮤지엄

by 바이크 타는 집사

<박경리 뮤지엄(토지문화관)>

- https://pknmuseum.vercel.app/


관람시간: 10:00~17:00
관람료: 5,000원(청소년 4,000원)
휴관일: 매주 일, 월요일, 법정공휴일, 설.추석연휴
문의전화: 033) 763-7178




모터사이클 전국 문학관 투어 마흔 번째 박경리 뮤지엄이다.


박경리는 한국 현대문학에서 손꼽히는 거장이다. 그래서 박경리를 기념하는 곳이 많다. 강원도 원주, 경남 통영과 하동에 총 네 개의 문학관과 기념관이 있다.


토재문화재단이 있는 강원도 원주에 '박경리 뮤지엄(https://pknmuseum.vercel.app/)'이 있다. 박경리 뮤지엄은 박경리가 1998년부터 작고할 때까지 살았던 작가의 집이 있던 곳이다. 작가의 마지막 10년의 삶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택지개발로 인해 박경리 뮤지엄이 있는 자택으로 옮기기 전, 원주에 자리 잡고 살았던 옛집이 있는데 그곳에서 대하소설 <토지>의 많은 부분을 집필했다고 한다. 그 옛집이 택지 개발지구에 편입되어 사라질 뻔한 것을 문화계의 노력으로 되살려 박경리의 '옛집'과 '문학의 집'이 있는 '박경리 문학공원(https://www.wonju.go.kr/tojipark/index.do)'이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경남 하동에는 '박경리 문학관(http://www.hdmunhak.com/park)'이 있다. 역시 토지의 배경이 되는 하동 평사리 '최참판댁' 옆에 박경리 문학관이 건립되었는데, 토지 문학에 대한 전시와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토지 세트장으로 쓰였던 평사리 마을 바로 위쪽에 자리 잡고 있다.


마지막으로 박경리의 고향이 통영에 '박경리 기념관(https://www.tongyeong.go.kr/pkn.web)'이 있다. 생전에 통영을 둘러보다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지금 기념관이 있는 자리에 묻히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박경리 기념관에 박경리 묘소가 있고, 박경리 묘소에 기념관을 세우게 된 것이라고 한다.


원래 '박경리 문학공원'과 '박경리 뮤지엄'이 원주에 있어 둘 다 관람하려 했지만, 박경리 문학공원은 2025년 12월까지 리모델링 중이라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공원만 걷다 나왔다. 참고로 통영에 있는 박경리 기념관 역시 2026년 1월까지 미모델링으로 인한 휴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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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이다. 고등학교 때였는지 대학교 때였는지 모르겠지만, 오래전 '불신시대'를 읽었는데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전쟁 이후 각박해진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소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큰 충격과 오랜 울림이 남았던 것 같다. 두 번째로 읽은 박경리의 소설은 '토지'였다. 토지를 읽었던 대략 8달, 나는 너무 행복했다. 대하소설을 읽을 때면 중간에 다른 소설을 읽기도 한다. 태백산맥과 아리랑이 그랬다. 그런데 토지는 그렇지 않았다. 처음 1권을 읽으면서부터 오로지 토지에만 빠져 있었고, 다른 소설은 물론 다른 책도 읽지 않았던 것 같다. 오로지 토지에만 집중했고 뒤로 갈수록 읽는 속도가 느려졌다. 빨리 읽어 버리는 게 아까웠기 때문이다. 8개월 동안 나는 용이와 함께 평사리에서 살았고, 용이가 죽은 후에도 길상이 서희와 함께 중국 용정에도 다녀왔다. 마지막 한 권은 끝내는 게 너무 아쉬웠다. '토지' 이후, 박경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가 되었고, 그 뒤로 그의 다른 책은 읽지 않았다. 읽고 싶지 않았다. 혹시 다른 작품들이 토지만 못하면 박경리에게 실망할까 봐 그랬는지, 토지보다 다른 작품이 더 좋아 버리면 이 감동이 사그라들어 서운할까 봐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다 10년 정도 지난 올해 '박경리 뮤지엄'에서 '김약국의 딸들'을 사서 읽었다. 역시는 역시였다. 실망도 서운함도 없었다. 이제 박경리의 소설을 더 읽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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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뮤지엄은 총 3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작가의 집 1층이 1 전시실이고, 작가가 생애 마지막까지 지낸 공간인 '작가의 집'이 2 전시실이다. 토지 문화관 건물의 뮤지엄샵 안쪽으로 3 전시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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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문화관 건물에 들어서면 뮤지엄샵이 왼쪽에 있고 로비 양쪽 위에는 박경리의 어릴 적 모친과 찍은 사진, 작가 시절의 사진이 걸려 있다. 2 전시실인 '작가의 집'은 반드시 해설사와 함께 관람을 해야 한다. 뮤지엄 샵에서 입장료를 결재하고 나면 해설사님과 2 전시실 가기 전에, 먼저 뮤지엄 샵 안에 있는 3 전시실을 관람하도록 안내해 준다. 뮤지엄 샵과 3 전시실을 먼저 개별적으로 관람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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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시실은 크지 않다. 박경리의 집필활동과 작품 세계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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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부터 2008년까지 약 54년을 작가로 살아왔다고 하는데, 그의 작가로서의 일생을 '토지' 집필 이전시기, '토지' 집필시기, '토지' 집필 이후시기로 나누어 소개를 하고 있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박경리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글을 써야 했기에 치열하게 글을 썼다. 어떤 해에는 2~3개의 작품을 동시에 집필하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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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는 26년에 걸쳐 원고지 4만여 장의 대작으로 탄생했다. 등장인물만도 700명이 넘는다. 1897년부터 1945년 광복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토지'라는 대하소설 한 편이 우리 한국 근대사를 관통하고 있고, 그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인물들이 결혼해 아이를 낳고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아이들이 성장해 또 결혼해 아이를 낳는 긴 삶의 과정을 함께 하게 된다. '토지'를 읽으며 나는 그 시대를 그들과 함께 살아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후 거의 세 달 넘게 나는 그 어떤 소설도 읽지 않았다. 평사리에 계속 머물러 있고 싶었던 것 같다.


'토지'의 육필원고도 있었다. 망상이긴 하지만, 전국의 문학관을 다니면서 관람했던 전시품 중에 딱 하나를 가질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토지'의 육필원고 한 장을 선택할 것 같다.


이제부터 나는 써야 할 작품이 있다. 그것을 위해 지금까지의 것을 모두 습작이라 한다. 그것을 쓰기 위해 아마도 나는 이 삼 년을 더 기다려야 할까 보다.


다른 단편들에 토지의 내용이 녹아 있는데 집필하기 이전부터 소설을 구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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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이후의 박경리는 '흙과 생명의 작가'로 평가하고 있었다. 생명과 자연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실천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작가의 집'으로 옮긴 후, 후배들이 마음껏 글을 쓸 수 있는 집필실을 마련해 후배들에게 제공했다고 한다. 직접 농사를 짓고 후배 작가들에게 밥을 지어 먹였다고 하는데 그 하나의 사례만으로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참 어른이었던 것 같다.


3 전시실 관람을 끝내고 나오면 해설사분과 함께 2 전시실로 향한다. 가는 길에 박경리의 동상을 만나게 된다.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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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상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몇 년 전 하동의 '박경리 문학관'과 통영의 '박경리 기념관'에서 이 동상을 본 적이 있다. 내가 본 세 개의 동상이 모두 같은 동상이라고 한다. 한국과 러시아 우호 증진을 위한 '한러대화(KRD)'라는 단체가 있는데, 러시아 측에서 러사이를 대표하는 작가 '푸시킨'의 동상을 서울에 건립해 달라고 요청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도 러시아에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의 동상을 세우기로 하는데 그때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김경리를 선정해 러시아에 박경리 동상을 세우게 됐다고 한다.


이때 토재문화재단이 서울대 권대훈 교수에게 제작을 부탁했고, 추가로 세 개의 동상을 똑같이 만들어 원주의 '박경리뮤지엄', 하동의 '박경리 문학관', 통영의 '박경리 기념관'에 각각 세웠다. 같은 동상 네 개가 러시아와 원주, 하동, 통영에 각각 세워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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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가 새겨진 하동의 박경리문학관(좌), 통영의 박경리 기념관(우)

네 개의 동상에 새겨진 문구는 지역마다 다르다고 한다. 러시아 동상에는 '슬픔도 기쁨도 왜 이리 찬란한가', 원주에는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사진을 찾아보니 통영에는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고 하동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박경리 동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나서 2 전시실인 '작가의 집'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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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만나는 곳이 거실과 부엌이다. 박경리가 생활했던 공간이 그대로 남아 있다. 실제 생활했던 그대로라고 한다. 많은 다기들이 인상적이었다. 화자 방혜자의 작품과 박경리의 외손주가 그린 고양이 그림을 좋아해 액자로 만들어 늘 곁에 두고 보았다고 한다. 화가의 그림과 나란히 놓여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 박완서와의 사진도 있었다.


거실을 지나 안방으로 가는 길에 아주 큰 아궁이 같은 벽난로가 있다. 환경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작가가 집안 전체의 난방을 위해 거대한 벽난로를 고집했다고 한다. 가장 따뜻했던 이 공간에 고양이들이 들어와 쉴 수 있도록 고양이 문까지 만들어 두었다고 한다. 따뜻한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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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은 침실이면서 집필실이기도 했다. 큰 책상 하나가 있고 나머지는 정말 소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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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 둔 성냥(촤), 미니 동상(중앙), 담배 속지(우)

담배와 커피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성냥도 하나씩 얻어오면 모아두고 사용했다고 하고, 담배 속지인 은박지를 모아서 메모지로도 썼다고 한다. 또 자신을 드러내는 것도 좋아하지 않아, 표창이나 상장들도 원래는 옷장 속에 있었는데, 돌아가신 후 '작가의 집'을 정비하면서 꺼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참 간소한 살림이었다.


'작가의 집'인 2 전시실에서 해설사님의 설명이 끝나고 나서, 하나만 더 보여주겠다며 장독대와 발코니로 우리를 안내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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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묻은 장독도 보였고 장독대가 많았다. 실제로 장도 담그고 부지런히 일을 하셨다고 하는데 모두 찾아오는 손님들과 후배 작가들을 위해 준비하셨다고 한다. 발코니가 꽤 넓었는데 앞으로 펼쳐진 풍경이 좋았다. 박경리는 그곳에 그렇게 고추를 많이 말리셨다고 한다.


그리고 작가의 집 아래 1층에 있는 1 전시실로 우리를 안내해 주셨다. 자유롭게 관람하고 문을 닫고 나와 달라는 부탁과 함께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시는데 그 덕에 좀 더 편하게 여유 있게 관람할 수 있다.


1 전시실은 박경리의 전 생애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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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설명에 나와 있듯 '사람' 박경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의 탄생부터 시작한다. '나의 출생' 육필원고와 고등학교 시절의 사진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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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소설가로서의 삶과 토지 집필과 결실, 딸과 손주들을 위해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강원도 원주로의 이사하게 되면서 '토지'를 마무리하게 된 이야기들도 소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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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박경리의 '토지'는 우리 문학에 큰 획을 그은 기념비적인 작품임은 분명하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한발 물러서서 인물들의 삶을 관찰하고, 깊이 바라보며 공감했다. 하지만 박경리의 '토지'는 독자인 내가 평사리 마을 제3의 인물로서 그 속에서 그들과 함께 살아간 듯했다. '토지'는 내 인생 소설이고, 한국인의 필독서라고 생각한다. 꼭 읽어 봐야 할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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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의 생전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고, 일기 사진 등과 함께 2008년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그의 마지막을 정리하고 있었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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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외부활동을 거의 하지 않아 사람들과의 교류가 많은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몇몇의 지인들과 깊은 교류를 나누었다고 한다. 작가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작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늘 자신을 찾아온 지인들에게 따뜻한 밥을 대접하고 텃밭에서 기른 채소들을 가득 싸주며 마음을 표현했다고 한다. 그럴 분일 것 같았다. 따뜻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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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는 박경리를 이렇게 기억했다.

내가 차마 견디어내기 힘든 비통 중에 있을 때도 원주에 가는 차편이 생겼을 때는 떨치고 일어나 따라나섰다. 그때 거기서 싱싱한 배추속대를 안주삼아 술을 억 병으로 마시면서 절절히 맛본 서러움과 그분 인품의 인자함과 넉넉함을 어찌 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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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뮤지엄에서는 '사람' 박경리를 더 많이 알게 된 것 같다. 나는 박경리가 너무 좋다.





한 줄 느낌

- '사람' 박경리를 잘 보여주어 마음이 따뜻해진다.


한 줄 평

- 과하지 않고 적절한 전시가 작가를 더욱 빛나게 하는 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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