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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유 Nov 18. 2023

토익을 거부하니 취업할 수 없었다 1

2011년 망해가던 학생운동에 투신하다

 18살, 나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생과 사의 기로를 가르는 고민이었다. 나는 지금껏 제대로 성장한 어른을 본 적 없었다. 나의 미래도 저들의 미래와 같다면 굳이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사춘기를 가장한 패악을 부리는 것도 슬슬 한계였다. 나이는 먹을만큼 먹었다. 이럴바에 죽을까? 대책도 없이 덜컥 20살이 되어 세상에 내동댕이 쳐진다면 어차피 고통스러울 게 분명했다.

 하지만 몇 번의 자살시도와 자해 끝에 결정했다. 살아보자. 19살에 최선을 다해 살아보고, 남은 생을 결정하자. 어쩌면 더 나은 인생이 내 상상력 바깥에 존재할지도 모른다. 원래 나이 먹고 수능 점수 자랑은 하는 게 아니라지만, 나는 고3 3월 모의고사를 기준으로 수능까지 총점 100점을 상승시켰다. 그 전까지 그만큼 처참한 성적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치열한 수험생활 끝에 나는 지방국립대에 안착할 수 있었다.

 물론 약간의 협상이 필요했다. 집안에서는 내가 어느 과를 가는지 딱히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일단 학비가 싼 국립대를 가는 게 중요했다. 그러니 애초에 나에게 선택지는 아예 하나 밖에 없었다. 그럴거라면 차라리 학과는 내 마음대로 고르고 싶었다. 딱히 고민하지도 않고 국어국문학과를 택했다. 원래 책을 읽기를 좋아하고, 소설을 써보고 싶기도 했으니까. 사실 소설 작가를 희망한다면 당대의 유명한 작가와 시인을 교수로 모아두었던 조선대학교 문예창작과가 훨씬 더 걸맞았겠지만, 아무튼, 내겐 사립대라는 선택지가 없었다. 내 결론은 집에서 1시간 반 이상 떨어진 학교를 통학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되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스무 살 성인이 되는 것이 꽤나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에 가면 인생이 많이 달라진다고도 하고, 대학으로 인생의 경로가 결정난다고도 했으니까. 게다가 19살과 20살의 차이는 청소년금지로 묶여있는 것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러 변화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니, 아마도 스무 살이 되는 건 엄청난 격동을 인생에 불러 일으키리라는 막연한 공포가 있었다. 간단히 말해 피카츄가 천둥의 돌을 가져 결국 라이츄가 되는 정도의 변화라고 해야할까. 대폭적인 변화가 휘몰아친다면 어떻게 대비해야할지 무서웠다. 하지만 2011년, 스무 살이 되고 나서도 딱히 나의 외적/내적인 변화는 없었다. 허무했다. 어른이 된다는 건 꽤나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인생의 전반으로 보건데 스무 살로 넘어가는 시기가 중요했던 게 아니라, 스무 살에 했던 선택들이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예컨데, H라는 친구. 전남대는 입학예비학생들을 모아 영어를 가르친다는 명목의 수강프로그램을 진행했다. H는 그곳에서 내가 처음 사귄 친구였다. 친구를 사귀는 법을 오래 잊어 서먹하게 홀로 있던 내게 '같이 걸을래?'라고 물어왔던 그 친구. 그리고 H는 낮은 자존감의 나를 다독여줬고 살뜰히 우정을 키워, 12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의 단짝친구로 남아있다.

 또한 첫 연애를 했다. 친구 사이였던 애였다. 온라인으로 만나 오프라인 만남을 몇 번 가졌던 동갑내기 여자애.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나는 내가 여자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 친구의 고백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우리는 서로 전화기를 붙들고 하루 종일 이야기를 해댔다. 동생에게도 여자친구를 소개시켰다. (당시 동생은 내심 엄청 놀랐다고 했다.) 나름대로 내 스스로가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었다.

 여기까지만 겪었다면 나의 평범한 대인관계 확장 썰이었겠지만. 2011년, 나의 스무 살, 내 인생을 가장 뒤흔들 순간을 만났다. 바로 전남대학교 용봉교지편집위원회에 들어간 것. 그건 내 앞으로의 인생 경로를, 활동가로서의 마인드를, 내 삶을 뒤흔든 선택이었다.


 평범한 3월이었다. 첫 개강이었고, 딱히 학과에서 살갑게 친구를 사귀지 못했고, 애들은 동아리며 소모임이며 다닌다는데 나는 썩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뭔가 쓰는 쪽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하며, 전대신문 수습기자 모집글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때였다. 하지만 신문에서 뭘 배울 수 있을지 잘 감이 잡히지 않을 무렵, 인문대 인근에 붙은 현수막 하나를 봤다.


"사회를 탐구하고 실천하는 글쓰기를 지향합니다."


 대충 저런 말이었는데, 지금은 좀 흐려지기야 했다. 확실한 기억으로 남아 내 마음에 박힌 단어는 '실천하는 글쓰기'였다. 뭘 실천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이 세상 좆같은 건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바꿔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저기는 뭔가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심심한 신문보단 교지라는 낯선 것이 더 궁금하기도 했고. 신문과 교지 사이에서 고민하던 나는 결국 교지 편집실의 문을 두드렸다.


 아직도 처음 편집실을 방문했을 당시를 기억한다. 지금은 건물 리모델링으로 사라진 제1학생회관 건물 3층에 위치한 곳이었다. 한 여성분이 앉아있었다. 당시 26살이던 편집장 Y 언니였다. 이후에 알았지만 당시 교지편집위원회에는 약 3년째 편집장 1인이 겨우 버티는 형국이었다. 수습위원이 몇 년째 새로 들어오지 않았고, 혼자 교지를 발간해내는 것도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심지어 Y 언니는 버티고 버텼지만 결국 대학교 졸업이 코앞이었다. 그러던 와중, 11년, 나를 포함한 4명의 수습위원이 우르르 모였다. 나는 당시 사회성이 무척 떨어져 면접을 진행한 이후에도 어느 타이밍에 자리를 떠야할지 몰라 어영부영 계속 앉아있다가 저녁까지 얻어먹었다. 

 수습위원으로 활동한 이후로도 제법 헛소리를 많이 해댔다. 고작 26살이던 (그때 당시에는 하늘같이 나이가 많게 느껴졌다!) Y 언니에게 나랑 6살이나 나이차이가 난다고 놀리거나, 남성도 성폭력을 당하곤 하는데 여성만 성폭력의 피해자인 것처럼 말하면 안 되지 않냐고 묻는 식이었다. 하청, 용역에 대한 관계도 일절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언니와 수습위원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나를 가르쳤다. 당시까지 문제였던 쌍용자동차 해고 사건부터 용산 참사, 그리고 한진 중공업 희망 버스, 밀양 송전탑 저지 투쟁. 1박 2일간 도로에서 날밤을 지새우며 싸우고, 한 겨울 텐트 하나에 의지해 몸을 덜덜 떨며 자고, 비가 와서 미끄럽기 그지 없는 송전탑 부지 산길을 걸으며 휘청거렸다.

 그 과정에서 나는 강렬한 해방감을 느꼈다. 사회에 내가 작은 계란을 던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무도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기에 하지 못했던 일들을, 타인과 어깨를 맞대자 저항할 수 있었다. 특히 페미니즘은 나에게 신세계였다. 매주 한 번씩 모여 진행했던 독서모임에서 읽었던 '페미니즘의 도전'이 주는 깨달음이란. 내가 지금껏 가지고 있던 평범한 가부장적 시야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가부장제가 여성들에게 내세우는 성녀/창녀의 이분법은 나와 엄마를 지독하게 괴롭게 했던 근원이었다. 엄마는 자신이 바람을 피우거나 도망가는 창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평생 아버지에게 증명해야 했고, 나는 일기에 적었던 아버지의 저주처럼 '창녀'가 될까봐 두려움에 떨었다. 색안경을 벗으면 더이상 그 뒤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그 이후 해당 책의 저자인 정희진 선생님의 다른 저서를 찾아봤고,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현재는 '아주 친밀한 폭력'으로 이름이 개정됐다)'를 통해 아내폭력/가정폭력의 단면을 접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겪었던, 엄마가 겪었던, 여동생이 겪었던, 비참한 폭력의 현장은 단순히 우리가 '운이 나빠서' 혹은 '우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폭력을 저지른 '아버지'가 가부장제의 권력을 누린 탓이었다. 사회적으론 아무 위치도 갖지 못한 아버지가 집에서 강한 통제력을 가지고 언성을 높이는 상황. 그리고 이건 단순히 우리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느 집에서나 일어났고, 다양한 방식으로 끔찍하게 작동했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무차별적인 폭행만이 아내폭력/가정폭력이 아니었다. 그랬다, 우리는 피해자였다.


 그때 당시의 나는 뭐가 잘못됐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알았을 뿐이었다. 그게 왜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어서 자꾸 화살을 나와 엄마, 여동생에게 돌렸다. 저항할 수 없다고 여기는 폭력은 끝까지 족쇄가 된다. 차라리 자신을 해하는 것이 답이라고 여겼고, 그래서 나는 어린 시절부터 당시까지 끔찍한 분노와 절망과 우울에 차있었다. 하지만 진실은 다른 곳에 있었다! 나의 삶이 겪고 있던 지독한 수수께끼는, 페미니즘이라는 열쇠로 해금되었다.

 그제야 나는 나와 엄마를 용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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