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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유 Jun 09. 2024

토익을 거부하니 취업할 수 없었다 2

내 인생 첫 퀴어 운동의 단초

  동료의 요청으로 내가 성소수자 운동을 언제부터 했는지 이력을 정리해볼 기회가 있었다. 곰곰히 되짚어보니, 어느새 2015년부터 시작해 2024년이 된 지금까지 거진 10년간 이 활동을 해왔었다. 내가 어쩌다가 성소수자 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는지, 그래서 졸업 이후 내 삶은 어디로 흘러갔는지. 오늘은 이 이야기를 이어 해보려고 한다.


  한창 학내교지편집위원회에서 일할 때였다. 대학생이라는 신분은 내팽겨쳐놓고 성적은 내다버리고 사회 운동에만 열심히 뛰어다녔다. 물론 열성 운동권이라서 성적이 처참했던 건 아니었다. 사실 성적이 낮게 나왔던 가장 큰 이유는 나의 상습적인 우울과 무기력으로 인해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고, 1학년 때부터 나 하나라도 먹고 살기 위해 주 5일 알바를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 번에 학업과 알바, 운동까지 병행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도 교지편집위원회에 대한 애정 하나만큼은 내 인생에서 가장 넘쳤던 시기였다. 그 활동이 이후 나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 곱씹어 본다면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매번 떠올리건데, 무척 웃긴 사실은, 나의 선배들은 나를 '선택'하지 않았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를 뜯어보자면 상황은 조금 더 복잡하다.


 우리 교지는 소위 운동권 내의 PD파 계열이었다. 이쯤 읽었을 때 누군가는 어리둥절해서 PD가 무엇인지 고민할테고, 누군가는 푸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을지도 모르겠다.


 과거 학생운동권이 아주 활발했을 때에는 각 다양한 계열과 분파로 이념과 가치를 표방하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당연히 시간이 지날수록 신자유주의의 물결 아래 운동권을 쇠퇴했고 차츰 특정 계열을 표방하는 이들은 거의 사라졌다. 결국 명맥을 잇고 있는 사람들은 NL이 대부분이며, 아주 작게 PD가 존립하고 있었다. 아마도 NL이나 PD나 무언가의 약자겠지만, 간단하고 납작하게 한 단어로 설명하자면 NL은 자주통일민족주의자들이었고 PD는 노동운동사회주의자들이었다. 나라고 교지편집위원회를 처음 들어올 때 이런 구분까지 알고 선택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 명맥은 정치/시민단체/학생운동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나도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원래 NL파였던 교지편집위도 어떠한 연유로 PD파가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거점은 서울에 있으나 각 지역의 PD파 학생운동 권역마다 담당자를 보냈다. 당시 내가 수습위원일 시절에도 J라는 정체불명의 선배가 우리와 함께 활동했었다. 수습위원들은 당연히 우리 학교 휴학생이라고만 생각했으나, 알고 보니 J라는 이름도 그저 활동 별칭이었을뿐 무엇 하나 우리에게 제대로 알려진 정보가 없었다. 소위 80년대 운동권에서 본인의 정체를 숨기고 안기부에 동지가 잡히더라도 실제 정보를 불지 않기 위해 가칭을 쓰던 문화가 그대로 내려져온 것이라는 썰이 있더랬다.


 아무튼, 그렇게 PD파와 꾸준히 연이 닿아있는 조직이 교지편집위이기도 했다. 그리고 내 주변 교지편집위 동기와 선후배들은 PD파 선배들에게 개인 면담과 낙점을 받아, 졸업 이후 서울로 올라가 본부에서 일하거나 광주 내 산하에서 일하게 되곤 했다. 대부분 그랬다. 대부분. 왜 '대부분'이냐면, 이 명단에서 나는 똑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연도 닿지 않을만큼 일반인으로 돌아간 이들마저도 한 번씩 선배들과 가졌다는 진로 면담을, 나는 진행한 경험이 없었다 (최소한 내 기억에는). 4년을 꽉 채워 교지편집위에서 활동하고 편집장까지 지냈던 나로서는 가끔 이 사실이 내심 웃기다. 하기야, 편집실에서 매번 우울증에 쓰러져 소파에서 자고 있는 무기력하고 사회성 떨어지던 나를 사회 생활 후배로 누구도 들이고 싶지 않았던 거겠거니, 미루어 짐작해본다. 아니면 나의 모습이 별로 'PD 운동권' 다운 후배로 보이지 못했던 것이겠지. 이젠 웃고 지나갈 이야기다.


 아무튼 나는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했다. 당시엔 그야말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였다. 그나마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던 도중 1년을 휴학해서, 편집장까지 거친 이후 퇴임한 나에겐 졸업까지 학교 생활을 1년 더 할 시간이 있었다. 지금껏 교지를 만드는 것에만 골몰했던 나에겐 뭔가 새로운 것을 해볼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친구 U가 있었다.


 U는 나와 대학 친구였다. 처음 마주쳤을 땐 그저 평범한 남자애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녀석이 군대를 가던 날, 녀석은 편지를 주변에 한 통씩 부치고 떠났다. 내가 그 편지를 받았을 땐 이미 U는 훈련소에 있을 때였다. 그 편지는 여차저차 사소한 잡담과 함께 이 한 마디가 써져 있었다.


"나 게이야."


  서면 커밍아웃에 부딪힌 나는 혼란에 빠졌다. 당장이라도 논산에 달려가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지난 나날, 나 혼자 바이섹슈얼 성소수자로 살고 있다고 여겼던 고독한 시간이 억울했다. 물론 U가 갑작스럽게 내게 커밍아웃한 건 고마운 일이었다. U가 군대로 떠나기 몇 개월 전쯤,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커밍아웃을 시작했고 성소수자임을 밝히고 주변에게 축하를 받았던 덕이었다. 그 자리에 U도 있었고, 그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믿음과 기대가 생긴 모양이었다. 나도 여기 있다는 말을 던지고 싶었다는 마음을, 나도 백번 이해했다. 하지만 이 비밀을 나만 알게 된 채로 어이 없음을 풀 수도 없이 끙끙 앓아야 한다니! 칼을 갈며 녀석의 100일 휴가를 기다렸다.


 휴가를 나온다는 소식을 듣자 마자 U에게 우리 할 이야기가 있지 않냐며 당장 약속을 잡았다. 그리곤 따로 자리를 만들어 우당탕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에겐 성소수자 동지가 처음 생겼었다. 이후로 녀석과 간간이 연락을 나누며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정말 이 대학교 내에 나 혼자 있는 게 아니라면, 이 친구와 다른 퀴어들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즈음, 서울대학교 학과 통폐합으로 인한 총장실 점거 농성이 있었다. 나 역시 해당 사안에 연대하기 위해 서울대학교 본부 앞에서 브로콜리 너마저의 노래를 들으며 앉아있던 차였다.


그렇게 서울대학교의 QIS가 발간한 교지를 만났다.


학생회관 한 켠에 놓여있던 책이었다. 'ㅆ발ㄴ'이라는 당시의 교지 발행 타이틀이 충격적이었다. 게다가 내용을 펼쳐보니 정말 많은 성소수자들의 자신의 수기를, 그리고 경험담을, 분노를, 회고를, 섹스 기술을 (!) 나열하고 있었다. 한 번도 이런 걸 묶어서 책으로 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다. 그걸 당당히 학교에 진열해놓을만큼 용기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결국 이런 활동이 가능한 건 교내에 공식 성소수자 동아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서울권역 대학교 곳곳에 성소수자 동아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건 그 이후였다.


U의 제대 이후, 나는 친구를 꼬드기기 시작했다. 우리 둘이서 뭐라도 해보면 좋지 않겠냐, 하고 말하며 내가 다니는 대학교 내에 있는 친구들을 찾아보자고 으쌰으쌰하고 의기 투합했다. 뜻을 함께 해주는 헤테로 친구들도 동아리 구성에 도움을 줬다. 무작정 대학 내 화장실 칸마다 동아리 결성을 위한 구성원 모집 홍보 스티커를 붙이고 다녔다. 그렇게 한 명 두 명 연락이 왔다.


전남대학교 성소수자 동아리, 라잇온미의 창설이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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