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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유 Oct 31. 2023

어쩌다 태어났는지 모를 성장기


 누군가 유년기의 분노에 대해서 묻는다면, 나는 곧장 입을 다물곤 한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다. 너무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아서다. 어느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지 순서를 정해야 한다. 상대와의 친밀도에 따라 이야기의 경중을 가뤄야 한다. 대화의 분위기에 따라 가볍게 언질하고 장단만 맞출지, 내 끔찍한 절망까지 꺼내도 될지 가늠한다. 너무 많은 슬픔과 분노는 대화를 뒤죽박죽 엉키게 했고, 가끔 결정을 잘못 내려 자리의 분위기를 망치곤 했다.


 내 이름은 유진이다.


 어린 시절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여자애들이 참 많았다. 김유진, 박유진, 정유진, 이유진. 반에 꼭 유진이라는 이름이 나를 포함해서 두 명 이상 있었다. 심지어 내가 도서관을 들락거릴 당시에는 유명한 소설로 '유진과 유진'이라는 책이 있을 정도였다. 나는 참 내 이름이 지겨웠다. 밋밋하고 재미도 없는 이름. 심지어 한자훈음조차 있을 유, 참 진. 성의도 맥락도 없다고 여겼던 어느 날, 부모님 둘 중 한 분이 진실을 알려줬다.


 집안 큰아들이 가진 첫 아이가 나였다. 아들이어라, 하고 다들 고사를 지냈다는데, 안타깝게도 시스젠더 여성으로 당당히 태어나고야 말았다. 다리 사이에 10cm도 안 될 살덩이가 뭐 어쨌다는 건지 그거 하나 없다고 내 존재 가치는 수직하락하고 말았다. 사주명식에 목을 매달던 할아버지에게 아버지는 딸아이의 이름을 지어주십사 했는데, 할아버지는 정작 무신경하게 본인이 일하던 학교 학생부를 펼쳐 자신과 같은 성을 따르는 여자애의 이름을 대충 추려 건넸다고 했다. 그렇게 골라진 게 내 이름이었다. 유진.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두고두고 할아버지를 두고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래, 내 모든 절망의 원인은 양가 조부모로부터 시작되었다. 친가 할아버지가 되셨던 분은 술을 마시고 자식과 아내를 패댔고, 외가 조부모는 아들 둘을 키우겠다고 엄마를 포함한 딸들을 찬바닥에 내몰았다. 빌어먹을 가부장제. 빌어먹을 남아선호사상. 가스라이팅과 사기의 신이 된 아버지는 자신보다 10살 넘게 어린 엄마를 꼬드겨 나이조차 속인 채로 식장에 입장했다. 이미 다른 여성을 자신의 가정 노예로 부리려다 파혼당한 이후였다. 엄마는 결혼 이후 아버지의 의처증과 가스라이팅, 폭력에 시달리며 미쳐갔다.


 아버지라는 모 씨가 참 내 인생에 도움이 되질 않았다.


 그건 어릴 때부터 그랬다. 그 인간은 자신이 한 모든 행동이 나를 위해서라고 주장하지만, 단언컨데 그건 자기 변명일 뿐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외부 음식을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했다. 이건 엄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가졌을 때 엄마는 먹고 싶은 음식 하나 외식 한 번을 즐기지 못했다고 했다. 아이의 건강에 나빠서였다. 덕분에 정작 엄마는 영양실조에 시달려야 했다.


 그 족쇄는 나에게로 똑같이 돌아왔다. 어느 날엔가, 잘 사는 고모집에 잠시 가족들끼리 들릴 일이 있었는데, 숙부가 드시는 콘프로스트 씨리얼이 너무 맛있어보여서 반짝반짝 쳐다봤지만, 그걸 보고 숙부가 한 그릇 주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먹지 못하게 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순대 같은 길거리 음식을 먹어본 것 마저도 아버지의 말에 어깃장을 놓기 시작한 사춘기 시절, 15살 때의 일이었다. 유치원생 때는 초코파이를 유치원 선생님에게 하나만 더 달라고 했다고 엊어맞았다.


 아버지가 번듯한 가장이었냐면 그조차도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아버지는 직장이란 것을 다녀본 적 없었다. 주식 놀음으로 제 먹을 것이나 벌어들였고, 사회 생활이라곤 담을 쌓았다. 웃기고 끔찍한 건, 그 인간이 집에서 하는 일이 또 한 가지 있었는데, 하루 종일 컴퓨터를 켜놓고 야동을 다운받는 일이었다. 나는 그게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할 정도로 일상적인 삶이었다. 아버지는 혼자 컴퓨터를 차지하곤 절대로 이 컴퓨터를 건드려선 안된다고 엄포를 놓았다.


 나더러 '아빠가 뭘 보는지 아냐'고 묻곤, 내가 '벗은 여자들이나 보고 있는 거 아니냐'고 대답했더니 깔깔 웃어댔다. (아마 자기 딴에는 내가 섹스를 아는지 모르는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곤 야동을 씨디로 구워서 어디다 주고 팔았다. 그리곤 시간이 남으면 총질로 여자들 옷을 벗기는 탄막 게임 따위를 해댔다. 그 게임을 나와 내 여동생한테도 해보라고 시켰다. 학원에 가던 청소년기의 나를 붙들고 '남녀가 가장 빨리 체온이 높아지는 방법이 뭔지 아냐'는 식의 성희롱을 해댔다. 집창촌 포주 일이나 하던 삼촌이 나만 있는 집에 찾아와 공포에 떨며 혼자 문을 잠그고 있었더니, '어떻게 삼촌을 범죄자 취급하냐'며 화를 냈다. 미친놈, 싸이코, 쓰레기.


 폭력은 저지르지 않았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나는 학대 받았고, 그 체벌들은 폭력이었다. 아주 아기인 시절부터 툭하면 아버지가 집 밖으로 나가라고 고아원에나 가버리라고 소리를 지른 덕에, 나는 추운 겨울에 혼자 가방을 싸서 책과 인형을 넣고 그래, 내가 억울해서 고아원에 제발로 가겠다고 가출을 해댔다. 그게 초등학교 입학도 전이었고, 입학 후에도 그랬고, 중학교 때도 그랬다. 머리채가 잡혀서 집 밖으로 내던져졌다. 판타지 소설을 읽고 있다고 머리채가 잡혀 방바닥에 내동댕이 쳐졌고, 아버지가 발로 내 머리를 짓밟았으며, 일기에 내 손으로 '나는 자라서 창녀나 되어 남자에게 버림 받을 것이다'라고 쓰게 했다. 아버지의 폭력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별거를 한 이후에나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고등학생이 된 이후였고, 나 역시 그쯤 미쳐있었다.


 그 인간이 엄마와의 관계가 원만했을리도 없었다. 당연히 엄마와 아버지는 하루가 다르게 싸워댔다. 보통 일방적으로 엄마가 맞거나 내쫓기는 엔딩이었다. 그만 싸우라며 울다가 등교 시간을 놓쳐 엄마와 손을 잡고 택시를 타고 학교에 가며 울었던 기억이 선명했다. 그것도 모자라 아버지는 나와 내 동생을 앉혀놓고 어머니 험담을 해댔다. 아주 의도적이고 교묘한 방식의 가스라이팅이었다. 엄마는 악녀고, 창녀고, 다른 남자들이나 꼬시고 다니고, 너를 낳고 버리고 도망쳤던 년이며... 얼마나 너희를 싫어하는지, 쉽게 버리고 갈 여자인지, 믿을만한 엄마가 되지 못하는지, 계속 우리를 세뇌시켰다.


 어느날 중학생의 내가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아빠 의처증 같은데 엄마가 좀 조심하면 안 돼요?"


 어린 시절의 나는 울고 있었다. 엄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지금 와선 그 말을 되돌려놓고 싶다. 왜 엄마가 조심해야 하나. 폭력과 부부강간을 당하는 엄마가 왜 조심했어야 했나. 그도 모자라 그 인간은 내 핸드폰 내역을 뒤져 다른 여자아이들에게 사랑한다며 (그때는 순전히 우정의 의미였음에도) 나눈 문자에도 욕설을 퍼붓고 혐오를 세뇌시켰다. 아버지는 어떻게든 나를 제어하고 싶어했다. 위치 추적 장치 같은 것으로, 핸드폰 비밀번호 해제로. 나는 아버지와 떨어진 직후에도 아버지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길거리에 있는 씨씨티비나 내가 갖고 있는 핸드폰을 통해 나를 보고 있을 것 같다는, 거대한 공포에 떨었다. 여전히 나는 아버지가 무섭다. 두렵다. 죽여버리고 싶다.


 빌어먹을 집안. 손바닥만한 바퀴벌레가 나오던 집안. 장난감조차 길거리에서 씻어서 가져오고 부유한 고모 집에서 버린 것이나 가져오던 집안. 물건이 부서지고 고성이 사라지질 않던 집안. 언제나 나에게 '너는 내가 하는 투자니, 좋은 성적과 뛰어난 대학이라는 성과를 주지 않으면 내버릴 것이다'라고 윽박지르던 폭언. 살려달라고 버리지 말아달라고 빌던 어리고 슬픈 나. 학교에서 사오라던 학습지 하나 사게 해달라고 해도 한숨과 눈총을 받던 찢어지는 가난, 폭력, 가부장제, 아버지, 혐오.


 아버지가 죽는 날 나는 박수를 치며 가장 크게 웃을 것이다.

 누구보다 기뻐하며 춤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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