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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유 Apr 19. 2023

4. 우울에 관하여

퀴어와 우울, 뗄 수 없는 상관관계 (22.04.02)

  우울하다. 평범하게 우울한 밤이다.

   유튜브에서 잔잔한 플레이리스트 하나를 틀어놓고 가만히 앉아있는다. 지금 시간은 오후 9시 50분. 맥없이 잠에 들까 하다가, 그러기에도 너무 이른 시간이라 자판을 두드린다. 깊은 무력감이 나를 지치게 한다. 어떤 것도 나를 기쁘게 할 수 없을 것 같고, 어떤 것이든 쉬이 나를 등떠밀 것만 같다.

하루가 끔찍했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그저 평범한 하루를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 청소를 했고, 폐업 준비를 하는 중인 작은 책방에 들렀고, 동생과 거리를 걷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마음을 크게 건드리는 사건도 사고도 없었다. 그저 일상적인 우울이 찾아온 것 뿐이다. 요새 내가 겪는 우울증은 아무런 맥락 없이 나를 찾아온다.

  뼛속 깊은 우울을 겪은지 아주 오래 되었다. 굳이 진단을 기준으로 한다면, 약 5년째.


  

   우울을 소처럼 되새김질하다, 문득 생각을 한다.
   퀴어 친구들 중에 우울증이 없는 이가 있긴 한가.

  어째 되짚어보면, 대부분 각자의 삶에서 휘청거리며, 혹독한 기근을 지나는 사람처럼 하루하루 생존하고 있다. 물론 모두가 퀴어이기 때문에 우울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각자의 입장, 각자의 사정으로, 부득이하게 힘겨워한다. 대체로 정신과를 다니거나, 심리상담을 받고 있다. 나 역시 정신과를 다니며, 종종 심리상담을 병행해 받았다. 우울증 환자가 아닌 사람들은 병원비와 심리상담비였을 몇백만 원을 아끼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면 어째, 조금 억울하기도 하다. 우울하고 싶어 우울한 것은 아닌데.

  특히 퀴어는 자신의 정체성이 지워지는 상황을 매순간 마주한다. 견고한 성이분법와 이성애중심주의 같으니라고. 특히나 이 사회 속에서 모든 가십과 이야기거리는 연애와 결혼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러니 편하게 이성애를 터놓는 이들에게 박탈감을 느끼고, 연애를 언제 하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애매하게 웃기만 한다. 퀴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며 '패싱'해야 한다.

  커밍아웃을 택한다고 딱히 상황이 달라지진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퀴어라는 사실에 별로 관심이 없다. 어차피 자신은 이성애자고, 관습과 규범의 굴레는 그대로니까. 그러니 그 굴레 아래에서 내가 밝힌 퀴어 정체성은 쉽게 망각된다. 내가 느끼는 차별과 편견을 입 밖으로 올리며 다시 한 번 커밍아웃을 하더라도, 분위기만 불편해질 뿐이다. 왜 꼭 상황을 이상하게 만들지, 하는 시선들에 부딪히던 나날이 떠오른다. 그러니 우울하지 않을 수 있나. 우울증이 오지 않을 수가 있나.

  우울증은 일종의 장애라는 생각을 한다. 단순히 우울감을 겪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우울감이 깊이 밀려올 때면 더러 가벼운 공황 증세나 심각한 졸음을 겪는다. 이런 병세는 일상생활에도 지장을 미친다. 맥락없이 우울이 옥죄면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모든 능률이 하락한다. 언어적인 기능이 떨어지고, 논리적인 생각이 멈춘다. 한 퀴어 친구는 심각한 우울증으로 몸을 가눌 수 없어 직장을 몇 번이고 그만두었고, 또다른 친구는 자꾸만 쏟아지는 잠으로 일상 속에서 약속을 지키기 어려워한다. 이 상황을 환자가 아닌 이들에게 이해시킨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사실상 퀴어에게 심리적 정신적 치료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왜 아직도 퀴어 전문 정신과와 상담소를 찾기 힘들까.

  우울에 노출되기 쉬운 특정 계층이 아닌가, 퀴어는. 하지만 나는 심리상담을 다니면서도 기묘한 상황에 부딪혀야 했다. 독실한 신자셨던 한 심리상담사님은 나의 커밍아웃을 듣고 난 뒤에도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종교적인 믿음을 가져보는 편도 좋다'고 권유하셨다. 또다른 상담사님에게는 '이성애를 하게 되면 제 스스로를 커밍아웃하는 것이 힘겹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커밍아웃을 굳이 할 필요가 있냐고 되물으셨다. 어차피 이성애와 동성애를 동시에 겸할 것도 아닌데, 너의 정체성 정도는 연애 하는 와중에 감출 수 있지 않냐는 말이었다.

  상담사님들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할 수 있는 조언들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철저히 이성애중심주의적 시선이었을 뿐이다.

  퀴어프렌들리한 정신과 병원이나 상담소가 더 많아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퀴어가 아니더라도, 우울증 환자들 사이에선 나에게 맞는 정신과나 상담소를 찾기란 하늘에 별따기라고 여긴다. 의사와 상담사의 스타일이 모두 다르고, 자신에게 맞는 방식의 치료가 필요한 탓이다. 하지만 애초에 퀴어프렌들리한 곳은 많지 않다. 우울증 퀴어는 퀴어 정체성을 인정받는 것은 쉽지 않아 그만큼 치료가 더뎌진다. 모든 우울증 퀴어들도 여러 병원에 대한 선택지를 늘어놓고 골라 찾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신과 선생님이 말해주셨다. 생각이 많아지면 안좋으니 그만 끊어내라고.

  씁쓸한 입맛을 뒤로 하고 키보드를 덮겠다. 다들 오늘도 무사히 살아남았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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