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지인 덕분에 매주 한 꼭지씩 이메일로 배달되는 김영하의 <인생 사용법>이란 칼럼을 읽었다. 화요일(월요일이었나?)이면 어김없이 배달되는 칼럼 덕분에 숨을 깊게 내뱉는 사치를 누릴 수 있었다. 주로 수업에 들어가기 직전 몇 분 동안 읽었기 때문에, 가끔은 학생들에게 그가 했던 이야기에 근거한 엉뚱한 질문을 하기도 했던 기억이...
김영하의 글은 흡인력이 강하고 가독성이 높다는 큰 장점이 있다. 게다... 그 수려한 말발은 (글발이라 쓰지 않고 말발이라 썼다. 왠지 그게 더 어울리게 느껴진다.) 뭐... 딱히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들 계실 듯.
그때 그 칼럼이 묶여 『단 한 번의 삶』이란 산문집으로 출간되었다.
제목이 참...
“인생 사용법”은 직관적으로 팍 꽂혔는데, “단 한 번의 삶”이라고 해 놓으니 뭔가 되게 거창해진 느낌이다.
어쨌든,
그때도 즐겁게 읽었지만, 지금도 즐겁게 읽힌다. 명쾌하고 빠르고 독특하다. 지천명(知天命)에서 이순(耳順)을 향해 가고 있는 작가가 인생에 대해 사소하지만 넓고 깊게 사유한다. 물론 여전히 깔끔, 명쾌, 유쾌하다. 비슷한 공간,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법한 그의 경험과 그에 대한 성찰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엄마에서 시작해 아버지까지, 그의 인생을 재단이라도 하듯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분들이 나이 먹어가는 아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지 담담하게 고백한 부분에 특히나 공감했다. 작가는 그분들을 기억하고 글로 씀으로 존중과 사랑을 표현한 것이리라.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엄마의 과거. 자신에게 살과 뼈를 주었다는 이유로 오십 년 넘게 아들에 대한 소유권을 강하게 주장했던 엄마에게 꽁꽁 숨겨온 과거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대체 ‘우리는 가깝다고 믿는 사람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를 의심하던 “엄마의 비밀” 편은 나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지게 했다.
“테세우스의 배” 편에선 변화에 대해 말한다. ‘사람 잘 변하지 않는다’ 고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인간은 평생 많이 변한다는 그의 관찰에, 혈기 왕성하고 피 뜨겁던 이십 대의 나에서 지금의 나는 얼마나 변했는지를 자연스럽게 떠올려 보았고. 동시에 스무 권쯤의 책을 펼쳐 놓고 두서없이 같이 읽는다는 작가의 고백에 강한 친근감까지 느꼈다 (난 한 다섯 권 정도를 함께 읽는다). 그의 말처럼 어쨌든 시간이 지나면 뒤죽박죽이긴 해도 다 읽게 된다는 결론에도 완전 동의한다.
‘인간은 보통 한 해에 할 수 있는 일은 과대평가하고, 십 년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과소평가한다’는 데, 한 십 년 퐁당퐁당 해왔으나 별 성과를 보지 못했던 일을 놓지 않고 더 지긋하게 해야겠다는 용기 비슷한 것도 얻었다.
“인생이 일회용인 것도 힘든데, 그 인생은 애초에 공평치 않게, 아니 최소한의 공평의 시늉조차 없이 주어졌다. 생이 그렇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럼에도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11)
“어떤 환대는 무뚝뚝하고, 어떤 적대는 상냥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게 환대였는지 적대였는지 누구나 알게 된다.” (29)
“구세주의 탄생을 그렇다고 쳐도 평범한 인간의 생일은 왜 축하하는 것일까? 그것은 고통으로 가득한 삶을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서로에게 보내는 환대의 의례일 것이다.”
“생일 축하는 고난의 삶을 살아온 인류가 고안해 낸, 생의 실존적 부조리를 잠시 잊고, 네 주변에 너와 같은 문제를 겪는 이들이 있음을 잊지 말 것을 부드럽게 환기하는 의식이 아닌가 싶다.” (31)
“내가 좋아하는 언어는 문학의 언어였다. 그 언어는 모호하다. 이것을 말하면서 동시에 저것을 말하고, 저것을 말하면서 이것을 말한다. 때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언어이며, 사람에 따라 무한히 다르게 해석된다. 회계가 그랬다가는 큰일이 날 것이다. 그런데 문학은 그래도 된다. 그래서 좋았다.” (48)
“신은 나에게 집중력을 주지는 않으셨지만 대신 태평한 마음을 주셨던 것 같다. 지금은 이래도 오 년, 십 년이 지나면 그럭저럭 잘할 수 있을 거야,라는 마음, 나에게는 그 마음이 있었고, 참으로 다행하게도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를 때까지 참고 기다려준 사람들이 내 곁에 있었다.” (71)
“내 삶이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모를 무한한 삶들 중 하나일 뿐이라면, 이 삶의 값은 0이며 아무 무게도 지니지 않을 것이니, 존재의 이 한없는 가벼움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더는 단 한 번의 삶이 두렵지 않을 것 같다. 태어나지 않았을 때 나는 내가 태어나지 않은 것을 몰랐기에 전혀 애통하지 않았다. 죽음 이후에도 내가 죽었음을 모를 것이고, 저 우주의 다른 시공간 어디엔가는 내가 존재했는지도 모르는 내가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런 위안이다.” (192-193)
그의 말처럼 내 인생도 후불제가 분명하다. 보조 배터리, 서비스 같은 것도 절대 없고, 언제나 따박따박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점점 불안하게 눈 감는 순간까지 청구서가 계속 날아올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 든다.
그러나 어쩌겠나.
청구서가 날아오면 힘닿는 데까지 내며 버텨야지...
어쨌든,
어린 시절, 성인이 되어서 그리고 작가가 된 후, 일상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삶에 관한 사유가 쉽지만은 않게 그러나 무겁지도 않게 읽힌다. 잘 읽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