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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엔 샴페인 Oct 20. 2023

변변한 직장, 변변한 가정이 뭐라고

 자신이 어딘가를 표류하고 있다는 것만 해도 불안하기 짝이 없다. 

앞이 깜깜해져 보이지 않는다는 건 그래서 무섭고 살 떨리는 경험이다. 그것이 누구의 마음 안을 꿰차고 들어가지 못하거나, 마땅한 일자리가 없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집안이 편해야 밖에 나가 일을 하면서도 편한 맘으로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라고 옛날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지 않은가.  

 어디엔가 안전하게 착륙해 편안함을 느낀다는 건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달달함이다. 소속감이란 그런걸지도 모른다. 내가 나이기 전에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곳, 거기에서 만큼은 내가 나로 인정받고 누릴수 있는 모든 능력을 발휘하며 환대를 받는곳, 어떤 잘못을 해도 왠만하면 다 이해와 용서로 감싸 안아질 수 있는 곳, 만약에 그런 곳이 없다면, 한 번씩 휘청휘청 거릴 때 마다 잡아줄 큰 무언가가 빠진 기분일 것이다.

 사랑으로써 애정하며 사람을 잡아주는 건 어느모로 한계가 있다. 사람은 그래서 무엇을 하건 어디에라도 소속감이 있느냐와 없느냐에 따라 자존감의 하락폭은 엄청나게 요동치곤한다. 그래서 박봉의 월급이던, 월급이 아니더라도 인턴쉽이던 봉사직이던 무엇이던 간에 자아를 성취할 만한, 내가 담길 밥그릇 같은 곳을 찿아야 한다. 

 내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무소속으로 느껴지는 순간, 닥쳐오는 현실의 무게는 몇 배로 확대되어 엄습해온다. 늘 어디론가 나가야 하고, 일정 시간에서 해야할 일이 마련되 있을 것 같은, 내가 필요한 그곳이 없다면, 허전함에 앞서 삶 자체가 공허하고 무의미해 지는건 남녀노소 할 것 없다.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자신이 하는 일에서 늘 찾아야 하는 것 만큼 생이 빡세게 느껴질 수가 없다. 당위성은 사실 어느누구도 부여하지 않았음에도, 우리는 정말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게 철칙인 듯, 가정과 직장이 없으면 낙오자처럼 자신을 탓하게 되어버린다. 일정 나이가 되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됨과 동시에 일터에선 일정 수준의 지위에 올라야 하는 암묵적인 사회의 룰이 자신의 일생에 꼭 맞아야 한다는 강박을 갖게 된다. 

 관습과 통념이란게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당연한 것이 어느 순간 당연하지 않게 되는 것도 역사의 흐름으로 볼 땐 가히 이상하거나 괴이한 것이 아닌 현상이다. 아니 인간 양식이다. 인류의 존속을 기대하는 인간의 바램이 언제나 그들의 본성을 한결같이 유지하지는 않는다. 사람이 살기 위해 행하는 모든 것들 속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변변한’ 가정과 ‘변변한’ 직장이 있느냐 없느냐를 생각해 보면 간단하다. 변변치 못한 가정을 꾸리기 보단 혼자가 유리하도록 생존의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다. 변변치 않은 직장에서 박봉으로 시달리느니, 자아발전은 자신이 도모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출이기도 하다. 

 제대로된 가정과 직장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정당화 시키려는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 그러하다고 믿는다. 누구나 아무생각 없이 살아가지는 않는다. 생각대로 되지않는 세상임을 자신만큼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파도를 대신 맞아줄 사람, 아니 함께 맞을 껄 알기에, 자신 하나로 족하다는 것을, 가족을 확대하는 건 무리라는 판단하에 혼자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 역시 능력 부족이라고 누가 감히 손가락질 할수 있을까. 요즘 세상에 말이다. 

 능력은 출중해도 써주지 않으면 발휘되지 않는 게 얼마나 억울하고 속상할 일인가 가슴을 치며 울어본 적 있는 사람은 변변한 가정까지도 바라지 않고, 변변한 직장 언저리만 역시 맴돌 뿐이다. 

 타인의 삶이 무르고 약해 보인다고 자신만만해 할 일이 아니다. 우리도 언제나 단단한 가정의 테두리에서 온전히 보호받으며, 원하는 직장에서 인정받고 일할 수 있을 날이 완벽히 보장되 있지는 않다. 누구도 알수 없는 게 역시 인생의 참맛, 바로 그 맛 아니던가. 

 경기가 어려워지고 사는게 힘이 들수록 비난의 끝은 언제나 그런 사람들을 향해 유난히 뾰족하다. 지금처럼 다양한 직업의 세계가 펼쳐진 시대도 드물만큼, 선택 하거나 선택 되어질 수 있는 일도 많기도 많겠지만, 그 많은 곳들 중 나 하나 일할 그 변변한 곳 찾기가 하늘의 별을 세는 게 오히려 쉬울 판이다. 

 지금처럼 역시 사람들 기 꺾어 놓는 세상도 있을까 싶다. 다양성이 존재하는 만큼 개성은 생각 외로 존중되지 않는게 현실이다. 남과 다르면 다르다고 고운 시선이 아니라, 그 ‘변변치않음’으로 인해 사람마저 안타깝게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그래도 묵묵히 살아간다. 묵묵하단 말은 언제나 경건하고 고요하다. 그리고 아프다. 자신에게 쓴 잔을 부어대는 곳은 하는 수 없고, 채용하는 곳에선 열과 성의까진 아니여도 지장없이 출 퇴근에 임하며 살아간다. 아니면 집에 머물며, 변변한 가정과 직장을 가진 변변한 인간이 되기 위해 백수를 자처하고, 꿈을 준비한다. 

 이럴바엔 차라리 카프카의 한 마리 거대한 벌레처럼 ‘변신’을 꿈꿔야 마땅할지도 모르겠다. 집에 가족을 위해 돈 벌어다 주는 기계로써 자신의 존재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회 어디에도 발 붙일 곳 없는 이방인으로서의 삶 또한 자처할 수 밖에 없는 환경과 신분 속에서, 이유없이 한순간에 변해버린 레알 거대 곤충으로써, 그냥 그렇게 식구들 즐비한 집 안 방한켠에 갇혀 결국 죽고야 마는 그의 삶을 언제나 애도한다. 

 안 하는것과 못 하는 것은 그 간극만큼이나  인생 또한 갈길이 한참 멀다. 소속감과 안정감을 주는 곳을 끊임없이 찾아가는 중이라고 몸소 말하고 있는 그들의 행로에 꽃을 뿌려주자. 지금의 단촐함이 변변해지는 그날까지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외쳐주고싶다. 또한 벌레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자신안에 잘 안착해 나가고 잇는 중이라고 또한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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