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계절 Oct 22. 2023

꽃말은 낭만 - 뜨개 튤립

나에게 낭만이란 이런 것들이다.


여행에서 마주한 노을. 모래사장 돗자리에 앉아 마시는 캔맥주. 오랜만에 들린, 아주 어릴 때 봤던 만화 영화 노래. 한여름 그늘 속 벤치에 앉아 느끼는 달콤한 바람. 저화질 동영상 속 환하게 웃으며 노래하는 어느 젊은이. 그 옆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어느 늙은이. 공원에 둘러앉아 사랑하는 사람과 포근한 오후를 보내는 여자 혹은 남자.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에 내딛는 첫걸음. 어느 계절에만 피었다 지는 꽃과 그 꽃을 기억하려는 수많은 사진. 처음 본 사람들이 모두 함께 노래하는 콘서트장. 


그리고 꽃. 어떤 꽃이든 상관없다. 한 송이든 다발이든 상관없다. 그냥 꽃이면 된다. 금세 질 걸 알지만 주고받는 꽃다발에는 다양한 의미가 숨어있다. 축하와 격려, 사랑과 기쁨, 혹은 사과와 용서. 분명한 건 소중한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거다. 


특히 튤립이 좋다. 보통의 꽃처럼 벌어진 상태가 아니라 오므린 모양새인 것도, 다양한 색도 좋지만 특히 꽃말이 좋다. 보라색 튤립의 꽃말은 사랑과 저주가 함께 있다는 것을 아는가. ‘영원한 사랑’과 ‘영원하지 않은 사랑’을 모두 담고 있는 꽃이 튤립이다. 사랑, 믿음, 소망, 희망 같은 예쁘기만 한 꽃말이 아니라서 오히려 좋았다. 좋기만 한 것에는 낭만이 없다.


누군가에게 낭만이 한 끼 40만 원짜리 코스요리라면 내 낭만은 포장마차에서 4천 원짜리 잔치국수와 함께 먹는 소주다. 테이블 밑 전기난로에 한쪽 다리만 데워지고 얼큰하게 취한 아저씨들의 정치 이야기가 라디오처럼 들리는 빨간 천막 밑에서는 소주가 잘 들어가는 마법이 일어난다. 맥주도 안 된다. 꼭 소주다.


약간 짠 국수 국물과 뜨겁지만 결코 타지 않는 난로 앞 오른 다리가 낭만을 가져다주는 거다. 가장 중요한 건 함께 하는 사람이다. 지독하게 힘들었던 날이라면 혼자도 좋고 슬픔을 나눌만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좋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이런 낭만의 순간에 나와 가장 자주 있던 사람은 대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언니다. -옛 연인들은 제외한다.- 입맛이나 취향이 비슷해 자연스럽게 같이 보낸 시간이 많아졌다. 글로 밥 벌어먹겠다는 당찬 꿈도 서로 포기하지 않도록 쓰다듬는 전우기도 하다. 내가 심적으로 힘들 때 많은 보살핌을 받았던 고마운 사람인데, 요즘 언니가 힘들어 보였다.


꿈을 따라가자니 현실에 부딪치고, 현실에만 몰두하자니 꿈을 포기할 수 없던 언니는 여전히 그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비단 언니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가랑이가 찢어지면서도 낭만 찾아 바보처럼 글을 쓰는 나도 마찬가지다. 졸업 후 지금까지 무던히 잘 견뎌오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번엔 언니가 유난히 어지러워 보였다. 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무얼까, 하다가 꽃을 선물하기로 했다. 절대 시들지 않는 뜨개 꽃을 말이다. 



하이소프트를 사용해 꽃잎을 떴고 잎사귀는 이름 없는 실로 떴다. 3.5mm 코바늘로 떴는데, 권장 바늘보다 굵은 바늘이라 꽃을 가까이서 보면 성긴 느낌이 들긴 한다. 안쪽에 덧댄 철사가 보이는 건 아니니 아무래도 괜찮다. 아주 쉽게 뜰 수 있는 난도지만 철사와 꽃대, 접착제 등 부재료가 많이 필요하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재능도 없는 글을 쓰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며 한탄하는 언니에게 보라색 튤립을 선물할 거다. 세상에 영원한 꿈은 없고 영원한 현실도 없다고. 우리는 또 함께 잘 헤쳐나갈 거라고. 힘을 내라고. 앞으로 뜨개꽃의 꽃말은 낭만이라고 해야겠다. 무용한 것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만큼 바보 같고 낭만적인 건 없으니까. 

이전 12화 번외 – 뜨개 없는 뜨개 에세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