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개울건너 Dec 07. 2023

                비싼 김장

   내일 김장을 하려면 오늘 밭에 가 배추를 가져와야 해서 퇴근 후 남편과 함께 밭으로 갔다. 그가 배추를 뽑기 시작했다. 배추 한 포기를 뽑아 겉잎을 벗기더니 그것을 밭고랑 위에 깔았다. 그리곤 그 위에다 배추를 뉘이고 칼로 흙 묻은 꼭지를 잘라낸다. 다음 배추도 그다음 배추도 그렇게 했다. 깔끔해진 배추들이 초록색 요 위에 나란히 누워있는 모습에 나는 몰래 감탄하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곤 저쪽 끝으로 가서 갓과 파만 뽑아 다듬었다. 이 너머 명희 씨의 고모가 생전에 한복 입고 뽀얗게 닦은 흰 고무신을 신고서 밭농사를 반질반질하게 지었다더니 저이가 여자였다면 그런 차림으로 농사짓지 않았을까. 흙 속에서 흙 하나 묻히지 않고.

   



   배추 무 등을 트럭에 싣고 집으로 왔다. 그때부터 우리의 다툼이 시작됐다. 배추를 절이려면 베란다부터 치워야겠어서 나는 거기에 펼쳐져있는 빨래 건조대를 접어 거실과 베란다 사이에 있는 미닫이 유리문에 기대놓았다. 그가 “저거 봐 저거 봐 하이 참! 그걸 유리에 그렇게  놓으면 어떡해!”  

   나는 말없이 거실로 들어왔다. 그가 선반에서 어느새 내려다 놨나 작년에 쓰고 말려 잘 접어두었던 김장 저리미(비닐 재질로 만든 배추 절이는 통)가 소파에 놓여 있었다. 배추를 절이려면 그걸 펴서 먼저 베란다에 놓아야겠기에 비닐주머니를 열고 그 안에 들어있는 저리미를 꺼내는데 얼마나 거칠게 뺐나 주머니가 찢어졌다. “또또 하아 참!” 그의 눈은 뒤에도 달린 게 분명하다. 그가 뒤에 눈을 달고 나를 감시하는 귀신처럼 느껴졌다. 나는 깜짝 놀라 그걸 놓쳤다. 그리고 나를 자꾸 놀라게 하는 그에게 순간 화가 솟았다. 나는 거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발버둥 치며 소리쳤다. “야아 아아이! 나 혼자 다 할 거니까 당신 빨리 방에 들어가 자아 아아!”

   

   그의 눈치를 보다간 김장은커녕 겉절이 반쪽도 못하게 생겼다. 내일 안으로 김장을 끝내려면 빨리 절여야 하니 이젠 속도전으로 가야 한다. 그에게 고성 지른  뒤 끝의 에너지로 나는 그가 네 쪽으로 갈라 넘겨준 배추를 소금물에 한 번 굴려 저리미 안으로 던졌고 그 위에다 소금을 마구 뿌렸다. 소금 알이 저리미 밖으로도 마구 흩어진다. 그는 이제 뭐라 하지 않고 홧김에 도권 잡은 나를 도와 배추를 갈랐다.  그러다가 틈틈이 일어나 내가 던져 놓은 배추를 다시 가지런히 놓으며 공간을 확장시켜 주고 가곤 했다.                   

   잠시 일어나 주방으로 가기 위해 거실로 들어서던 내가 발끝으로 소금그릇을 엎었다. 그가 조용히 한숨을 쉬면서 쏟아진 소금을 그릇에 담았다.     

   

   다음날 아침에 그가 출근하기 위해 현관문을 열려다 돌아서더니 당부했다. 이따 베란다에서 배추 씻을 때 물 많이 쓰지 말고, 물 한꺼번에 많이 내려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나는 아무런 대꾸 없이 식탁만 닦았다.

   그가 출근하니 집안에 평화가 왔다. 휴대폰으로 음악을 틀고 커피부터 타서 마시는데 사촌동서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얘기하면서 나도 부산스럽지만 남편 찬찬한 건 저 위의 신도 못 따라갈 정도라고, 나도 그처럼 하려고 시도해 본 적 있으나 되지도 않을뿐더러 힘들어 죽을 것 같더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출근하면서 베란다에서 물 조금씩 쓰라던데 그 말이 설거지할 때 주방 개수대에서 물 조금 쓰란 말과 뭐가 다르냐고, 이런 사람과 사는 나를 형님이 어찌 이해하시겠냐고 흥분했다. 그러자 형님이 사촌형제가 어쩜 그리 닮았느냐며 자기도 그런 사람과 사느라 힘들다며 시숙 흉을 봤다. 통화를 얼마나 오래 했나 남아있는 커피는 차갑게 식어있었다.

   그에게 또 지적당하지 않으려면 그가 오기 전에 아예 김장을 끝내버려야 한다. 얼른 배추부터 씻어야지. 배추가 많아 계속 씻어도 좀처럼 양이 줄지 않는 것 같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다 씻고 나니 오후가 되어있었다. 김장 중에 제일 큰 산을 넘었으니 배추에 물이 빠지는 동안 이제 좀 쉬어도 되겠다. 방으로 들어가 전기장판의 온도를 올리고 누워 잠시 눈을 붙인다는 게 밤잠처럼 깊은 잠이 들어버렸다.

   



대체 몇 시간을 잔 걸까. 눈을 뜨자 아차, 베란다에 틀어놓고 잠그지 않은 물이 생각났다. 배추를 다 씻고 저리미를 수도꼭지 위에 엎어놓은 채 그 안에다 수돗물 호스 꼭지를 위로 향하게 넣어 저리미가 씻겨지도록 틀어놓고 물을 잠그지 않은 것이다. 급히 나가 보니 우거지가 하수구를 막아 미처 내려가지 못한 물이 베란다에서 찰람댔다. 수도꼭지를 돌려 잠그며 다음 달 수도요금이 많이 나올 것을 걱정했다.

   현관 벨이 울렸다. 관리실이란다. 관리실에서 왜 왔을까 궁금해하며 문을 여니 아래층 벽에 물이 흐른다는 신고가 들어왔단다. 놀라서 그와 함께 내려가 보니 방 한쪽의 벽을 타고 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집 전체를 수리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거 어떡할 거냐고 젊은 여주인이 소리쳤다. 이게 꿈이었으면.. 그녀의 더 격앙된 소리는 나를 더 정신없게 했고 그 경황에도 남편이 모르게 해결하는 방법을 모색했으나 묘책이 떠오를 리 없었다.

   어쩔 수 없다. 그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수밖에. 이어지는 그녀의 다그침에 쫓기듯 밖으로 나와서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사고 쳤다고 일단 운을 떼며 훌쩍였다. 훌쩍임은 바로 큰 울음으로 넘어갔고 전화기 너머에서 궁금해하는 그에게 이실직고했다. 그러자 그는 보상해 주면 되지 뭔 문제가 되냐고, 업체 선택은 반드시 아래층 주인이 직접 하라 해서 연락해 오늘 저녁에 만날 약속을 잡으라고 전하란다.  

   

   여인이 그 집을 수리했던 업체와 약속시간을 잡았고 퇴근한 남편이 와서 같이 내려갔다. 벨을 누르고 내가 주춤거리자 그가 앞장서 들어갔다. 분쟁을 예상해서인지 그녀의 남자도 같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이 그에게 먼저 손 내밀어 악수를 했다. 그리고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는 사과와 함께 나의 실수를 인정했다. 업자는 불필요한 설명까지 곁들이며 이해 안 되는 액수의 수리비를 요구했으나 남편은 이의 없이 받아들이고 이 집의 가족들이 불편을 겪지 않도록 공사를 잘 부탁한다고만 말했다. 험악했던 표정의 그녀도, 일찍 들어와서 아내와 힘 모아 우리와의 싸움에 대비했을 그녀의 남편도 순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고 나는 가만히 남편 뒤에만 서 있었다. 그는 모두가 서 있는 거실에서 나를 돌아보며 크게 말했다. “걱정할 거 없어 이 사람아!” 내 안에서 죽어있던 기가 살아나고 있었다. 그녀가 남편에게 말했다. "집에 가셔서 사모님 너무 혼내지 마세요."

   그들의 공손한 인사를 받고 나와서 계단을 오르며 그가 말했다. 사람도 죽고 사는데 이게 뭔 대수냐고. 이미 살아나 팔딱이는 기에 그가 달아준 날개로 날아다니는 마음이 되어 이번 일로 손해 본 돈의 액수부터 계산해 보았다. 일 년 내내 농사지어 번 돈 보다 아래층에  보상을 약속한 돈이 몇 배 더 많았다.

   

   이 난리를 겪느라 미처 넣지 못한 배춧속을 우리는 마음을 뭉쳐 같이 넣고 통에 담아 베란다에 쌓았다. 다 끝내니 밤이 깊어져 있었다. 저녁식사가 밤참이 되어버린 식탁을  차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에휴.. 당신도 나 데리고 사느라 고생이 많다'고.



작가의 이전글                큰오빠와 어머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