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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울건너 Oct 30. 2023

              동행

   "여기서 결정해, 올라갈 건지 내려갈 건지."


이십 년 전, 부부 모임에서 제주도 한라산을 오르기 위해  진달래 휴게소 앞에 섰을 때  남편이 나에게 말했다. 휴게소 관리소에선 정상까지 오르지 못할 사람은 여기서 내려가라는 방송이 연신 나오고 있었다. 나는 정상까지 오르고싶다는 욕심으로 몸은 우리 일행을 따라 이미 걷고 있었다. 남편은 "그래 가자, 가보자."

   

2월의 그곳 날씨는 화창했고 기온은 영상이었다. 등산 경험이 많지 않은 나는 몇 미터 오르지도 않았는 벌써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여기  정도에선 도로 내려가도 되지 않을까 몰래 갈등하며 걸었다. 애써 오른다고 오르는데 일행은  답답해보였는지 이미 나를 지나쳐 저만치들 가고 있었고 그림자처럼 뒤따라오던 남편이 내 등을 밀며 걸었다.

   

얼마를 올랐을 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미 멀어져 뒷모습조차 보이지 않는 일행은 나와 남편을 기다릴 상황이 아니었다. 산 너머 바다에서 인천으로 떠날 뱃시간에 맞추어 도착하려면 그들만이라도 서둘러 가야했다. 아예 처음부터 올렛길로 간 일행들 편으로 합류하지 않은걸 내딛는 걸음 속에서 후회하고 있었다. 내 주제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올렛길 팀들은 지금쯤 편안히 해안가를 돌고 있을 텐데..

   

남편이 배낭에서 쵸콜릿을 꺼내 입에 넣어줬 나는 급히 받아먹으며  올랐다. 얼마나 갔을까.  숨조차도 내쉬기 어려웠다.  그가 내 팔을 잡으며 말했다. "이젠 올라가는 수밖에 없어.  도로 못내려가" 나 채근했다. 시계를 자주 보면서. 얼마를 더 올랐을까.   


눈발이 드문드문 날리기 시작했다. 조금 더 오르니 눈발은 함박눈이 되어 세찬 바람과 함께 춤을 추어대며  볼을 때렸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쌓이고 있는 눈 속에서 나는 거북이처럼 기었고 그는 나보다 한 발짝 앞서곤 뒤돌아 내 손을 잡아 끌어 올려 나를  안다시피하며 올랐다.  내 몸무게 탓이었을까 눈 탓이었을까, 그가 미끄러졌다.  그는 내 손을 놓치며 굴렀고  나는 순간 옆 나무를 잡았다. 이번엔 내가 내려가 그를 올려야 했으나 그럴 기력이 내겐 없었다.

나무를 잡고  선 채  그를  내려다보니  그도 나무가 막아주어  많이  구르진 않았고 급히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다시 올라와 나를  잡고 올랐다.  

 

이렇게 그렇게 오르고 또 오르니 정상이 거기에 있었다. 함박눈을 뒤집어 쓴 많은 이들이 모두 눈사람들 같았고 일행은 고맙게도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모두 단체사진을 찍고,   삼삼오오  사진 찍고 또 급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를 때의 힘듦을 잊고 나는 빠르게 내려갔다. 그제야 남편이 자무릎이 꺾인다며 휘청댔다. 당신은 괜찮냐고 물으며. 이번엔 우리가 그 때문에 일행과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를 기다리지 않고 가벼워진 몸으로 마구 내달렸다.

   


그와 함께 한 삶에서 그가 짓는 결정의 매듭은 늘 굵고 단단했다. 맨 몸뚱아리 하나 밑천으로 처자식에게 굴곡 없는 삶을  선물하기 위해 걸은 그의 길은 외롭고 고단했을 것이다. 우리 가족이 이나마 지니고 있는 안온함은 과거 그가 과로로 화장실에서 겪은 혼절을 담보로 한 것이니까.


지금 그와 나는 인생의 내리막길에 있다. 그는 요즘 마음의 무릎이 꺾이는 날의 밤이면 힘들어 잠을 설치고 있다. 이제 나는 휘청이는 그를 두고 철없이 먼저  내달리지 않을 것이며 그가 그 길에서 나를 밀고 끌고, 잡아 안고 올듯, 나는 그의 허리를 감아 잡고 천천히 보조를 맞추며 이 길을 내려갈 것이다. 그리고 가만 가만 말해야지 당신 애 많이 쓰셨다고, 고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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