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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달 Apr 28. 2023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해 주세요.

2토록 아름다운1 (2학년1반)



매년 학기 초에는 아이들과 학급 이름을 정한다.

2학년 1반의 학급 이름은 '2토록 아름다운 하루(1)'

 




중학년까지는 아이들이 틈만 나면 많은 것을 준다.

돈 없는 연예인의 삶을 조금 산다.


편지, 사탕, 젤리, 그림. 집에서 가져온 돌멩이도 준다.

선생님만 보라며 조심스레 주고 가지만 보통 '선생님 사랑해요' 한 줄 적혀있다.


한 번은 꽤 긴 편지를 받았다.

"나를 사랑하는 선생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저 정말 기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그 기도가 이루어진 것 같아요."


아니 이렇게 뻔뻔하고 귀엽고 편리한 기도가 있다니...!

그 이후로 나도 자주 이 기도를 써먹는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많이 만나게 해 주세요."


모든 것이 해결되는 마법의 주문이다.

  

 



가끔 다른 반에 아이를 보내 심부름을 시켜야 할 때가 있다.

내가 누구를 시킬지 한번 쓱 둘러보면 아이들은 심부름이구나! 바로 눈치챈다.

2학년은 무조건 서로 하고 싶어 한다.

오늘 연극무대에 서고 싶은 배우의 마음으로 자신이 호명되길 간절히 바란다.

오늘은 요즘 친구들에게 살짝 치이는 아이의 이름을 부른다.

"혁이 앞으로 나오세요"

혁이는 긴장 반 기대 반 되는 얼굴로 통통 튀어나온다.


"이거 4학년 7반에 가져다 드리고 오세요. 속에 있는 것만 드리고 바구니는 다시 받아와야 해.

한 층 올라가서 성실동 쪽으로 가면 있어. 교실 들어갈 때는 똑똑 노크하고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고, 나올 때도 '안녕히 계세요' 하고 나오는 것도 잊지 말고. 할 수 있지?"

"넵!"

"몇 학년 몇 반으로 가라고?"

"5학년 6반이요!"


아 안 되겠다. 포스트잇에 4학년 7반이라고 크게 써줬다. 바구니 받아오는 것도 깜빡할 것 같아 바구니도 뺐다.


이 심부름 하나에 혁이는 자기도 모르게 하루종일 기분이 좋을 거라는 걸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심부름을 잘 다녀왔다고 공개적으로 칭찬을 몇 번 더 해주면 친구들에게 치이거나 무시당하는 일이 훨씬 줄어들 것도 알고 있다. 이번 주 혁이의 일기 내용도 이미 나는 다 알 것 같다.


"다녀오겠습니다."

인사하고 심부름을 떠나는 혁이의 뒷모습이 사뭇 비장하다.





아이들에게 조금 과하게 언성을 높였다 싶을 때가 있다.

끝나고 나면 이내 미안한 마음이 든다.

쉬는 시간에 아이들은 금세 다 잊은 듯 신나게 놀고 있지만, 사실 그건 아니고 선생님이 화낸 것은 절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나는 아무래도 미안한 마음에 급하게 교실놀이를 준비한다.

학습자료실에 가서 풍선을 잔뜩 꺼내고 열심히 바람을 넣으니 금세 팔이 아파와 나는 이내 참회를 시작한다.

자료실 도우미 선생님이 '선생님 또 그러셨냐'는 얼굴로 슬쩍 와서 도와주신다.





"선생님, 태민이가 머리 자른 게 마음에 안 든다고 학교에 안 간다고 고집을 부려서 조금 늦을 것 같아요."

 

아, 이런 문제는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다.


"어머님, 선생님이 친구들 없을 때 복도에서 한 번 보고 이상하면 집에 가게 해 준다고 하시고 복도까지만 데려오세요."


1교시가 끝나고 복도로 나가자 저 멀리 복도 끝에서 엄마와 실랑이하는 태민이가 보인다. 엄마는 무표정한 얼굴로 태민이의 손을 꽉 쥐고 있고, 태민이는 그 손을 뿌리치려고 안달이다.


"태민아~~~ 한번 봐바, 머리 잘랐어? 음...(살짝 시간을 끈다.) 나쁘지 않은데? 태민이는 짧은 머리가 잘 어울리는 두상이야. (그런 두상이 있는 척을 한다.) 아니, 오히려 예전보다 멋있는 것 같아!"


내가 미리 심어둔 우리 반 천사가 내 뒤를 따라온다.


"태민이 머리 어때 보여? 괜찮지 않아?"

"네! 멋있어요!"


선생님의 인정 하나, 친구의 인정 하나면 돌리지 못할 마음이 없다.

나는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태민이의 손을 유유히 이어받아 한 손에는 태민이, 한 손에는 우리 반 천사와 함께 교실로 들어온다.

반 아이들은 미리 한바탕 일러둔 대로 친구의 머리를 보고 웃거나 장난치지 않기를 철저하게 잘 지키고 있지만 사실 나는 그 요상한 머리를 놀리고 싶어서 마음이 드릉드릉하다.





아이들에게 선생님의 영향력이 클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다.

일기에다 댓글 몇 줄 적어주는 것이 받는 입장에서는 별 일이 아닌지 몰라도

하는 입장에서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꽤 힘들다.

아이들과 단 둘이 소통하는 유일한 창구이기도 하기 때문에 나는 나름 공들여 정성스럽게 써준다.


쉬는 시간에 일기장을 나눠주면

한두 명만 유심히 댓글을 읽어본다.  

대부분은 슥 3초 정도 읽고는 바로 가방에 넣고 놀기 바쁘다.  

몇 명은 내 댓글을 확인도 안 하고 가방에 넣는다. 살짝 마음에 스크래치가 간다.


결국 나는 그 질문을 하고야 만다.

"얘들아, 선생님이 일기장에 댓글 써 주면 그거 읽기는 하니?"


아이들이 말한다.

"네!" "저는 다섯 번 읽어요." "저는 매일 읽어요."

"저는 일기 쓸 때마다 다 읽어봐요."

진짜? 믿어도 되는 거야?


제발 안 그러면 좋겠는데 결국 나는 손을 들어 설문까지 한다.

"한 번 읽는 사람?"

"여러 번 읽는 사람?"

두 명 빼고는 모두가 여러 번 읽는단다.

이제야 수업을 시작할 마음이 생긴다.


선생님이 이렇게 쪼잔하다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줘, 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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